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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희선 Nov 26. 2023

11월 24, 25

11월 24일

벌써 돌아오는 날이다. 아침부터 변의를 느꼈지만, 해결하지 못했다. 틀림없이 고생할 걸 예상했다. 원인 중 하나가 책이다. 여행 중 책을 갖고 다녔지만, 책을 읽기 힘들었다. 이번에는 단 한 권의 책 없이 왔다. 남편은 내가 책을 들고 화장실에 앉는 것이 변비를 악화하는 나쁜 습관이라고 하지만 그건 모르고 하는 말이다. 책을 읽고 있으면 변기에 앉아있는 시간이 아깝지 않고, 도리어 자연스럽게 배설에 집중할 수 있다. 그러나 책을 읽지 않으면 시간이 아까와 배설에 집중할 수가 없어 결국, 해결하지 않고 나온다. 내가 느끼는 변의는 극히 약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이리 다른데 그걸 인정하지 않고 책을 갖고 화장실에 들어가지 말라는 남편의 잔소리는 개 무시당할 수밖에. 집에 두고 온, 몇 장 남지 않은  <사도의 8일>이 아른거린다.

내장이 뻗치는 느낌이 시작되고 전신에 통증이 퍼진다. 미리 파스를 붙였지만, 허리도 불편하다.




오늘 아침 남편은 서울대병원 혈액종양내과에 간다. 혈액 검사 후 진료를 받게 된다. 나리타공항에서 남편에게 카톡을 보냈다. 백혈구, 적혈구, 혈소판과 호중구 수치를 물어 메모하라고.

면세점에서 그래도 뭔가를 사야 할 것 같아 면세점을 둘러봤다. 애써도 살 게 없다. 바나나빵, 비스켓류 초콜렛, 수수부꾸미처럼 생긴 찹쌀떡이 다다. 여행하면서 도무지 쇼핑의 필요를 느끼지 않는 편인데, 비교적 쇼핑을 한 편이다. 아이들 고 나도 쓰려고 6GF 자생 선크림까지 샀으니 말이다. 6GF 크림이 그리 좋다지만 화장품에 돈을 쓰지 않는 내게 비싼 편이다. 게다가 생전 선크림조차 쓰지 않는 내가 결단하고 선크림까지 샀으니 이걸로 충분하다.

비행기가 이륙하기 전 남편으로부터 카톡이 왔다. 다른 것들 수치는 괜찮은 편인데, 호중구 수가 약간 줄어 718이 되었단다. 호중구 수가 줄지 않으면 6개월마다 병원에 가기로 했는데 그럴 수 없게 되었다. 게다가 3개월 뒤에 가서 호중구 수가 줄었으면, 그때부터는 약을 쓰자고 했단다. 면역제를 쓴다는 거겠다. 3개월 전 호중구 수를 찾아봤더니 960. 그러니 3개월 동안 242개가 줄었다. 500 이하로 떨어지면 중증으로 분류된다. 낙관할 수 없다. 착잡하다. 있을 수 있는 일을 연상하려다 그만둔다. 질병과 함께 살아가는 게 지혜다.




일반 가격보다 비싼 비상구 자리가 다 비어있다. 그곳에서 한 시간을 서 있다 보니 몸이 한결 낫다. 착륙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지루함을 없애려고 친구와 커피를 마시는 여유까지 생겼다. 집에 가면 변비를 해결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다.

결국은 관장기를 사용했다. 관장기 안의 앱솜 희석액이 반도 들어가기 전, 아주 센 변의가 찾아왔다. 드디어 해결했는데 이번엔 화장실이 막혔다. 네이버에서 막힌 변기 뚫은 법을 찾았다. 나만 그런 게 아님을 실감한다. 빨래용 세제, 베이킹파우더와 식초, 뜨거운 물을 사용하는 법 등, 별의별 공작을 펼쳤다. 해결이 안 된다. 후기가 매우 좋은 쿠팡에서 새로운 장비를 샀다. 가스총이다. 내일 도착이다. 이것조차 안 되면? 머리가 복잡하다. 이런 일도 함께 살아가는 일. 걱정을 스트레스를 비우자. 사실 화장실이 두 개라 얼마나 다행인가?

신혼 시절, 화장실 한 개, 난방도 안 되던 집, 게다가 한겨울에 변기가 막혔다. 비눗물과 뜨거운 물을 붓고 친정으로 피신한 적이 있다. 다행스럽게도 다음날 돌아오니 해결되어 있었다. 이래저래 친정을 많이 의존했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가다 보니, 돌아가신 엄마, 할머니, 아버지까지 생각난다. 늙은이의 특징이다.




“당신이 집에 오니 그야말로 집이 시끄럽군.” 내가 했던 말을 남편도 한다. 내가 생각해도 소란스럽다. 변비, 화장실 폭파, 식탁에서 나는 소리, 기타 잔소리들. 이런 게 삶이고 활력제이며, 행복이었음을 나중에는 뼈저리게 느끼게 될 것이다.


11월 25일

아직 변기 뚫은 가스총이 오지 않았다. 사우나에 갔다가 늦은 점심을 하고 오니, 드디어 가스총 도착.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가스총 발사. 단 한 번에 성공. 휴. 락스를 푼 물로 온갖 사용한 도구들 소독. 이 작은 일 해결로 만사가 태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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