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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희선 Dec 07. 2023

12월 6일

하루에 여러 가지 일을 하지 않는다. 대체로 한가하게 지낸다. 그런 내가 오늘은 그야말로 하루를 촘촘히 썼다. 물론 오늘도 역시 나다운(귀엽다고 해주자) 멍청함을 놓치지 않았다. 그러니 나답게, 촘촘히!

4시에 일어났다. 책을 읽었고 남편 아침을 챙겨놨고 6시 30분이 되자 수영장으로 향했다. 전철에서도 열심히 책을 읽었다. <사무라이>(엔도 슈사쿠|뮤진트리) 오늘 도서반납일이다. 반납일을 넘기지 않아야 바로 책을 빌릴 수 있기도 하거니와 두 건의 오늘 약속에 무거운 짐을 조금은 가볍게 할 수 있다. 수영장에서 나와 10시 마포중앙도서관 도착. 반납할 두 권의 책 중 다 읽은 한 권은 책상 옆에, 또 한 권은 다 읽지 못한 부분을 어서 읽고 함께 반납하리라. 다 읽은 책을 꺼내놓고 보니 도서관 아닌 강동석 기자님께 빌린 책이지 않던가! 아 과연 나답다. 내가 이렇다. 첫 약속 건인 남편과의 약속에 맞춰 일어나려니 아직 다 읽지 못했다. 헐레벌떡 남편과 약속한 식당, 스탠포드호텔 점심 뷔페로 갔다. 짐을 가볍게 하려던 일에 실패하고 무거운 가방을 등에 지고 말이다. 가는 길에 있는 YTN 1층, 컬럼비아가 ‘패밀리세일’을 한다는 플래카드를 봤다. 시간만큼은 칼같이 지키는 나니까 그냥 약속 장소로. 

남편과 스테이크와 파스타 먹고, 작은딸과의 약속 장소, 합정역으로 가기 전 컬럼비아가 70% ‘패밀리세일’ 한다는 곳에 들러 20분도 안 되는 시간에 그야말로 가볍고 따뜻한 옷을 골라 남편에게 들려 보냈다. 딸과 만나 남대문 시장에 가서는 변비 해결을 위한 센나차를 사기 전, 구제품 사는 곳을 기웃거리며 4000원짜리 스웨터를 나와 딸 각각 둘씩 사기까지 했다. 전철 안에서 계속 서오는 동안 책을 읽었고, 집 앞에 와서는 16000원어치 옷을 16200원에 세탁 맡기는 일까지 깔끔하게 처리했다. 하루에 한 가지 일만을, 세탁 같은 건 미루고 미루는 내가 오늘같이 이 모든 여러 가지 일을 깔끔하게 마무리했으니 오늘은 정말 특별히 촘촘한 날이다. 물론 도서반납은 실패지만. 오늘같이 치열하게 살아온 날이 없었던 듯하다. 그 모든 일과 함께, 



오늘 내가 마침내 다 읽은 이 책, 다 읽은 내용으로 게 참으로 아쉽고 놓고 싶지 않은 책 <사무라이>는 바쁘게 움직인 나의 행적과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오히려 내 행적과는 동떨어진 채로 내 가슴을 뭔가로 무겁게 가득 채운다. 한동안 다른 책을 들고 싶지 않을 만큼. 사무라이와 벨라스코, 볼품없이 초라하게 양팔을 벌린 채 십자가에 매달려있는 예수라는 사내와 요조, 그들의 서로에 대한 시각의 변화, 교회와 정치ㆍㆍㆍ     


"주님에게는 그때 조직이 없었고 가야파에게는 조직이 있었지. 조직을 지키는 자는 늘 가야파와 마찬가지로 -대다수를 지키기 위해서는 한 사람을 버리는 것이 어쩔 수 없다- 그렇게 말할 거네. 주님을 믿고 있는 우리도 교단을 만들어 조직을 가진 순간부터 대제사장 가야파의 입장이 되고 말았지. 성 베드로조차도 교단을 지키기 위해 동료였던 스테파노가 투석형으로 죽임을 당하는 걸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을 수 없었으니까."_<사무라이>(엔도 슈사쿠|뮤진트리). 368  

   

엔도 슈사쿠의 <사무라이>를 읽는다면, 그는 읽기 전과 후는 기독교에 대하여, 사람에 대하여 다른 입장을 가지지 않을까 싶다. 그의 책이 다 그렇긴 하다. 

2001년 <침묵>을 읽은 후, <여자의 일생>, <바다와 독약>, <예수의 생애>, <그리스도의 탄생>, <깊은 강> 등 대학도서관에 있던 소설과 에세이를 다 찾아 읽었고 그의 작품 하나하나가 분명 내게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오늘 나의 신앙은 그에게 크게 빚지고 있다. 그러나 그가 150여 작품을 썼다고는 전혀 알지 못했다. 최근에야 내가 <깊은 강>을 읽은 이후에 번역된 책들이 있음을 알게 되고 여러 권을 더 읽었다. 그의 고통스러운 질병과 유쾌한 삶, 사랑과 깊은 사유. 그의 삶에 대해 생각한다. 그의 더 많은 작품이 소개되면 좋겠다.

이 책을 읽은 여운이 오래 갈 것이다. 다른 책을 한동안 손에 잡고 싶지 않지만 아마도 다시 잡아야 하지 않을까. 그처럼 사유해야 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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