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희선 Dec 13. 2023

12월 13일

솔직히 오늘 아침 어느 정도 허리가 괜찮아진 듯하다. 그러나 수영장에 가지 않는다. 밀린 책을 읽고 글도 쓰고 싶다. 어제 읽던 <알베르 까뮈>(유기환|살림) 92쪽, 손바닥 크기만 한 작은 크기의 책이 카뮈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내게 이리도 방대하고 깊은 지식을 전달하다니. 얼마나 감사한지. 카뮈의 출생과 삶, 실존주의, 그의 창작에 나타나는 세 개의 핵심 주제, ‘부조리’, ‘반항’, ‘사랑’. 그리고 그에 기반한 작품들, <이방인> 등과 <페스트> 등과 미완으로 남긴 <최초의 인간> 등과 철학적 수필 <시지프 신화> 등.

나좀 봐라. <최초의 인간>을 빌리려고 했고 도서관에도 있었는데 검은 색 삽화가 있는 책이 잘 읽히지 않을 듯해서 놓고 왔다. 내 한계다.




“카뮈에 의하면 부조리는 인간의 숙명이다. 카뮈의 세계가 합리와 비합리, 도덕과 배덕, 태양과 바다, 긍정과 부정, 고통과 기쁨, 광기와 이성 등 반대되는 두 항의 양립을 특징으로 하는 것은 그러므로 필연적이다.”(23)



“하나의 선험적 조건으로 부과된 부조리 앞에서 인간은 과연 ‘어떻게’ 살 것인가? 반항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다. 카뮈는 <시지프 신화>에서 부조리한 삶에 대한 있을 수 있는 대책으로서 ‘자살’, ‘희망’, ‘반항’ 세 가지를 예시하면서, 그중 마지막의 것을 참된 해결책으로 꼽는다. … 자살은 ‘인간의 의식’을 삭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희망, 즉 종교가 해결책이 못 되는 것은 부조리의 다른 쪽 항인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삭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그렇다면 가장 존귀한 진실은 의식이 끊임없는 유지라는 것인데, 반항이란 바로 세계의 모순을 살아있는 의식으로 바라보며 정면으로 맞서 싸운다는 것이다. 카뮈가 시지프를 ‘부조리의 신’으로 만든 것은 이런 맥락에서이다. … 부조리 인간 시지프는 그 부조리를 정통으로 바라보며, 그 부조리를 온몸으로 살아내기로 작심한다. … 그는 기꺼이 땀 흘리며 바위를 산정에 들어올렸고, 이내 곧 바위는 산기슭을 향해 굴러 떨어졌다. 그러나 악전고투 끝에 바위를 산정에 올려놓는 수간 시지프는 자신의 성공에 대해 행복해하며 시지프는 자신의 고역에 대해 한없는 자부심을 느낀다. 환원하면 ‘부조리’에 대한 해결책으로 그는 바야흐로 ‘반항’을 선택한 것이다. 벌이란 죄에 대해 일정한 고통을 주는 행위이거니와 벌에서 고통은커녕 행복을 느낀다면 그것은 이미 벌이 아니다. … ‘행복한 시지프’는 자신의 한계 속에서 최선의 삶을 찾아낸 반항아에 다름 아니다.”(23~25)



"<이방인>의 마지막 몇 페이지는 형이상학적 반항의 폭발 그 자체이다. .... 뫼르소도, 사제도, 소설가도, 독자도 모두 처형일만 다를 뿐사형수이기는 매한가지다. 부조리를 정면으로 응시하지 못하는 사제에 대한 분노는 사형집행일 날 최대한의 증오의 함성에 대한 소망으로 이어진다. 왜냐하면 부조리를 의식하지 못하는 구경꾼들이 뫼르소를 증오하면 증오할수록 그의 죽음은 더 부조리한 북음이 되기 때문이다. 카뮈에 의하면 뫼르소는 부조리하는 진실의 순교자, 즉 '우리들의 분수에 맞는 그리스도인'이다"(31)

2024년 1월 9일 시작되는 “고전 읽기, 쓰기” 시즌 2를 위한 준비에 매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다. 내년 시즌 2로 시작되는 “고전 읽기, 쓰기”를 위해, 정확히는 <이방인>을 읽고 쓰기 위해 나는 이 책을 읽고 있고, 어제 <페스트>를 빌려왔다. 아는 만큼 읽을 수 있기에. <이방인>을 읽으려고 책을 사놓은 게 언제인지 모르지만 아직 읽지 않았다. 못 읽었다. 그에 대해, 그리고 그의 작품에 대해 알지 못하는 나는 첫 부분부터 몰입하지 못했다. 이제는 가능할 듯하다.  되는대로 사는 것 같는 난데, 어찌보면  매사에 계획적인 이간이기도 한 듯하다.

“노년의 고전 읽기, 쓰기” 시즌 1에서는 내가 독서 지기였다. 리더 역할에 매우 부족한 내가 시즌 2에서는 그야말로 하는 일 없는 독서 지기마저 부담스럽다며 하지 않겠다고 했다. 모두가 알았다고 했다. 시즌 2에 참여자를 모으려면 그래도 누군가 공지라도 해야 하는데, 한가한 내가 사무실까지 내어주는 분들에게 그것까지 맡기는 겅 너무 비양심적이다. “제가 그냥 할게요.”“네 좋아요.”“제가 문구를 만들면, 디자인을 해주세요.”

이 편집장님이 문구에 참고할 만한 약간의 멘트를 보내주셨고, 나는 그걸 참고해 문구를 작성했다. “살짝만 고쳤어요 ㅎㅎ”와 함께 문구를 완성해 보내주셨다.

‘살짝’인데 솔직히 살짝이 아니다. 고작 18자, “그 부분을 폐기하기보다는 어떻게 소화할지”가 내용을 완전하게 한다. 역시 모르지만, 아는 것 같은 것과 알고 아는 것이 다르다는 사실을 뼈를 맞듯 인식한다.

<알베르 카뮈>를 읽는 것, <이방인>을 읽고도 모르는 상태 아닌, 읽은 후 그래도 조금은 알게 되게 할 것이다.




"날마다 죽어도 좋을 이유가 없다면,

우린 뭘 위해 사는 거지?"


영화, <뷰티풀 라이프>

노래 가사가 좋다. 영화 줄거리가 좋고 해피엔딩이라 편하다.


영화에서 딸 릴리가 그 엄마 수즈에게 전화했을 때, 그때에 수즈가 전화를 받지 않은 이유는~

딸 릴리가 그 전화를 받지 않은 이유를 알지 못한 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 사이에 금이 갔다면. 그건 누구의 잘못인가? 오해가 풀리고 서로를 사랑한 모녀 관계가 회복된다.


영화 <더 웨일>

왜 부정당하는 사랑이 있는가?

세상이, 아니 특정 시대, 특정 그룹이 규정한 범위 내에 있지 않다고 분명 사랑인 것을 부정당함으로 사랑하는 연인이, 한 개인이, 부부가, 부모와 자녀가 그토록 아파야 했는가.

왜 챨리는 딸의 아빠로, 헤어졌지만 여전히 사랑하는 전 아내의 남편으로, 그리고 사랑했던 동성 친구의 애인으로 그 곁에 있는 것조차 불가했는가!


자신과 곁의 사람들 모두가 돌이킬 수 없이 불행해졌다면 그건 과연 진실하게 남자 친구까지 사랑한 찰리의 죄인가, 과연 그의 죄인가? 시대의 혹은 타인의 조금 다른 삶을 부정하는 이들의 죄인가?


"부조리'로 인해.

세상은 얼마나 많은 부조리로 가득한가!


<알베르 카뮈>를 읽고 나니, 이런 자연스러운 질문을 할 수 있게 된다.

작가의 이전글 12월 12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