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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희선 Dec 19. 2023

12월 19일

나는 한때 목사였지만, 교회 부적응자다.

최근 감리교단 이동환 목사에게 출교를 선고하고, 항소를  위해서는 말도 안되는 재판비용과 기탁금을 내라고 하는 이 행위를 보라. 신앙 공동체 아닌 종교 집단에 실망하고, 개별적으로 존경할 많은 목사님과 교우들이 있지만, 교회 운영을 위한 어쩔 수 없는 한계들을 수용할 만큼 내가 넉넉하지 못한 인간이기에.

내 한계를 알지만, 이 또한 어쩔 수 없다.


누군가 내게 어느 교회에 출석하는지? 물으면,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다고 답하며 자연스럽고 당당하기보다는 조심스럽고 민망하다. 나도 내게 문제가 있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고, 가끔은 교회공동체가 그립기도 하다.

박현철 연구원이 강의와 글에서 "스스로 교회가 되는 것"에 대해 언급했는데, 그 다양한 방법(?) 혹은  견해(?) 중, 나로서는 할 수 없이 스스로 교회가 된 자라고 할수 있을까?

그렇다면,

내가 교회 '부적응자'가 된 근본 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이하 <복음과 상황>

엔도 슈사쿠 비하인드 스토리에 실린 글이다.


_____


오랫동안 질문했다. “만물과 나를 비춰줄 궁극적 진리는?” “내 출생의 기원과 삶의 목적은?” 누가 창조주 하나님을 말했다. 그 하나님은 나한테 맞지 않았다. 그래도 하나님이 필요했다. 내가 하나님을 만들었다. 전지한 분! 감출 수 없으니 감출 게 없었고 두렵지 않았다. 뭐든 물었다. 내 안에 계신 듯 답했다. 좋은 시절이었다. 3년 후 교회에 갔다. 많이 배웠으나 하나님이 작아졌다. 단순하고 투명하게 정리된 신, 배타적으로 타 종교를 혹은 비주류의 사람을 혐오하는 신. 내가 만들어낸 신과 교회의 신이 달랐다. 묻고 답하는 대화 아닌, 도깨비방망이 같은 기도가 나를 배신했다. 엔도 슈사쿠의 <침묵>을 읽고, 고통을 없애 달라는 기도에 도리어 함께 고통받는 신을 만났다. 다른 작품들도, <깊은 강>도 읽었다. 그 안에서 마침내 내가 그리는 신을 만났다. <깊은 강>의 오쓰가 만난 신. 그 이름을 뭐라 해도 좋을 양파. 사랑의 손길. 어쩔 수 없는 인간(유다)의 업을 수용하고 사랑하는 예수를. 누구나 무엇이나 받아주는 갠지스강은, 오쓰가 그 사랑을 흉내 내는 예수를 얼마나 닮았는지.



반면,

비록 미수로 끝났지만, 아들을 죽이려 했던 아브라함, 그에게 아들 이삭을 받치라 했던 하나님을 그 정치적인 종교집단은 어떻게 해석할지?,

아니면 전혀 고민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지?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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