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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희선 Dec 21. 2023

12월 20, 21

12월 20일

<페스트>를 다 읽었다.


패배]

전투에 이어지는 것은 어디서나 똑같은 의례적인 휴전, 항시 똑같은 유화책이었는데, 그것이 바로 패배의 침묵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친구를 에워싸고 있는 이 침묵에 대해 말하자면, 이것은 너무 촘촘했고, 거리의 침묵, 페스트에서 해방된 도시의 침묵과 너무도 긴밀하게 일치하고 있었기에, 리외는 이번 패배가 결정적인 패배임을, 전쟁을 끝내 평화 자체를 치유 불가능한 고통으로 만들어버리는 패배임을 잘 느끼고 있었다. 의사는 타루가 마침내 평화를 되찾았는지 알 수는 없었으나, 적어도 이 순간 만큼은 아들을 빼앗긴  어머니나 혹은 친구를 묻은 사람에게 종전이란 없는 것과 같이 자기에게도 평화란 결코 더 이상 있을 수 없음을 알 것 같았다.


<페스트>  288.


경험과 기억]

하나의 존재를 사랑한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라는 것, 아니 적어도 사랑은 결코 제대로 표현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하지 않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어머니와 그는 언제나 침묵 속에서 서로를 사랑하게 되리라. 그리고 때가 되면, 그들의  애정을 살아있는 동안 그 이상으로 고백하지 못한 채 그의 어머니는 ㅡ아니면 그가ㅡ죽을 것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그는  타루의 곁에서 지냈고,  타루는 진정으로 그들의 우정을 체험할  시간을 갖지 못한 채 이날 저녁 죽었던  것이다. 타루는  스스로 말했듯 경기에서 졌다.  그렇다면 리외는 무엇을 얻었는가? 그가 얻은 것은 오직 페스트를 겪었고,  그것을 기억한다는 것, 우정을 겪었고 또 그것을 기억한다는 것, 정을 체험했고 또 언젠가는  그것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페스트나 삶과의 경기에서 얻을 수 있는 전부는 경험과 기억이었다. 어쩌면 이런 것을 타루는 경기에서 승리했다고 불렀을 것이다. 289.

(타루의)살아있는 따뜻함과 죽어있는 모습. 바로 이런 것이 소중한  경험인 것이다. 290.


리외는 이 연대기가 최후의 승리의 연대기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연대기는 공포에 맞서, 그리고 공포의 지칠 줄 모르는 무기에 맞서 그가 수행해야 했던 것이자, 성자가 될 수는 없으나 재앙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의사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든 사람이 개인적 아픔에도 불구하고 계속 수행해 나가야 할 것에 대한 증언일 뿐이었다. (ㆍㆍㆍ)

그(리외)는 책에서 읽을 수  있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페스트 간균은 결코 죽거나 사라지지 않고, 수십 년간 가구나 옷 속에서 잠들어 있을 수 있어서, 방, 지하실, 짐 가방, 손수건, 폐지 속에서 참을성 있게 기다리다가 사람들에게 불행과 교훈을 주기 위해  쥐들을 깨워 그것들을 어느 행복한 도시에서 죽으라고 보낼 날이 분명 오리라는 사실을 말이다. 306, 307.


___


작품의 의미를 알기에도, 정리하기에도, 나는 몹시 부족하다. 한참 내 안에서 발효되는 시간이 필요할 것같다.

악!  인간의 책무, 악이 남기고 간 것들. 경험과 기억!


타루가 결국은 죽게 될 줄, 반복되는 "타루의 기록으로는~"과 같은 문장으로 예감했다.

그렇더라도 타루가 죽다니. 그런 거지.


참 이상하다. 아니 어쩌면 자연스러울 수도. 그러나

타루의 죽어가는 모습을 눈으로 읽어가며, 나의 죽어갈 과정을 그리게 되는데,

고통 속에  있지만, 평화로울 수 있을 것 같다.


읽기 시작한 <어떻게 늙을까>에서도 "죽음이란 수선  피울 일이 아니야"를 읽으며 죽음을 배운다.




12월 21일

오전 운동 외에 한 일이 없다.

오늘은 공쳤다. 모처럼 운전을 하긴 했다.  길이 막히지 않아 브레이크 밟을 일도 없었기에 쥐가 나지 않고 편하게 운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철로 다니는 왕복 시간에 읽을 수 있는 책 한 줄 읽지 못했으니, 나는 오늘  공친 것 같기만 한 것.


그럼에도 다시 생각한다면, 책을 읽지 못한 대신,  L 언니에게 사야 하는데 사지 못한 무거운 것을 사면 집까지 태워줄 수 있다고.

그렇게 해서 언니가 사고 싶지만 살 수 없었던 사골과 잡뼈를 한보따리 사갈 수 있게 했고, 남편의 심부름도 했고, 책을 읽지 못하는 시간, 어제 다 읽은 <페스트>의 등장 인물들과 페스트를 다시 떠올릴 수 있었다.


리외, 타루, 랑베르, 파눌루, 그리고 코타르와 악을 상징하는 페스트를.


절망 가운데 동요없이 자신의 최선을 하는 이들을. 점점 그렇게 되어가는 사람들.

추상성 속에서 거리를 두다가 마침내 구체적 사실에 동화되는 이들을.


그리고 어제 오수경 대표가 올린 청어라아카데미 메일링의 글이 겹쳐 생각났다.


"ㆍㆍㆍ요즘 곳곳에서 마음을 무너뜨리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죠.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말할 수 있는 기회들이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비로소 다른 곳을 볼 수 있으며, 담대하게 걸어갈 힘이 생기겠지요.ㆍㆍㆍ"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말할 수 있는 기회들'

어쩌면 페스트, 아니면 온갖 절망스러운 상황, 악에서 작품 안 등장인물들은 바로 절망을 인식하지만, 그 절망을 부인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거기에 결코 무너지지 않고, 결코 희망을 놓지 않으며,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말하는 이들 아니었나 싶다.


그러려면, 추상성 아닌, 구체적 삶이 있어야 한다. 기꺼이 추상성에서 빠져나와 구체적 접촉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대체로 추상성에 머물러 존재하는 인간이다.


가끔 남편이 나를 향해, 뜬 구름 잡는 일만 생각한다고 하는데, 이게 뭔지 지금에서야 알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면 나는 오늘 공친 게 아니라 구체성을 실현 한 것일 수도.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

손자들이 온다고 하면, 나는 매우 들뜬다.

남편이 다른 때와 달리 내가 오버한다고 한다.

나는 그야말로 전형적인 애니어그램 5번 유형.

실체로부터 멀리 거리를 두고 관찰하는 형. 그러다가 적절한 기회를 잡아 떠나는 사람. 그러나 손주들이 오면 '이거 하자', '저거 하자' 오두방정을 떠니, 그야말로 오버하는 거였다. 그야말로 나는 자연스럽지만, 평소의 나를 아는 남편에게는 오버였던 것!


그런데 이게 구체성인가보다. 그리고 사랑이란 구체성을 띠는 것. 관찰과 과한 행동 사이를 오가던 데서, 대체적으로 적절한 행동을 하는 방향으로 내 삶을 전환해가야 할 것 같다.

.가족과 조금 더 큰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말이다.

사람이 되어간다는 게 참 어렵고 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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