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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희선 Feb 05. 2024

2월 2일

어제 올렸던 글인데, 틀린 부분이 있어 다시 올립니다.




어제 청어람에서 2014년 5월 1일부터 11년째 군포시에 있는 ‘나들이’데이케어센터를 운영하는 정경환 대표를 만났다. 어쩌다 법을 공부했고, 다시 어쩌다 신학을 하고, 어쩌다 목회를 하고, 어쩌다 치매전담형 주간보호를 운영하게 되었고, 어쩌다 (사)치매케어학회 회장을 맡게 되었다고 했지만, 그의 표정과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어쩌다’가 아니라, ‘매 순간 치열’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집에 돌아와 그의 페이스북 포스팅을 살폈다. 디멘시아뉴스 황교진 국장이 정경환 대표를 인터뷰한 글이 있어 그의 꾸준한 연구와 노력, 결실을 알 수 있었다. 2022년 9월부턴 치매케어 이야기 모임으로 매월 가족 지지를, 노동법을 공부하고 장기요양 법령을 찬찬히 일독하는 모임으로 치매친화적 지역사회의 바람을 지속했다. 무엇보다 함께 공부한 ‘3기 장기요양 고위자 동문회’가 있어 <장기요양 실무법령집>(노인연구정보센터, 2023)을 출간할 수 있었다.

막상 천착해보니, 사업과 돌봄의 현장을 아우르는 장기요양 전체를 아는 사람이 우리나라에 없지 않나 싶을 정도로 장기요양 관련 법령은 굳어져 유연성을 잃어버리고, 법(法)이란 이름으로 겁(怯)을 주는 풍경을 봤다고 한다. 그는 대학생 시절 법학과를 다니며 읊조렸던 오든(W. H. Auden)의 詩, ‘법은 사랑처럼’(Law, Like Love. 1939)을 올려놓기도 했다.


“법은, 사랑처럼 어디에 왜 있는지 모르고, 사랑처럼 억지로는 못하고 벗어날 수도 없고, 사랑처럼 흔히 울지만, 사랑처럼 대개는 지키기 어려운 것”


법의 취지와 바람은 사라지고, 조문의 구절 하나하나로 규제하는 모습에 맘이 아픈 현실을 나타낸 마음이라 했다.


그 마음을 들으며 나는 며칠 전 <이방인>을 읽으며 생각한 법의 세계를 떠올렸다. 정해진 재판의 세계, 그곳에서 통하는 언어와 형식이 있어, 그 안에 사건 당사자인 뫼르소를 욱여넣음으로 재판 당사자를 소외시킨 재판의 세계를 상기했다. 과거 카프카의 <소송>을 읽으면서 마주친 법의 폭력도. 일단 법이라는 이름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 진실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고 추락할 수밖에 없게 하는 법의 폭력을. 당장 현실에선 정의보다는 강자, 권력에 가깝고 약한 자에게는 먼 그 세계를 만나기도 한다.




정경환 대표는 할아버지의 치매를 곁에서 경험했고, 따라서 자신도 결국은 치매를 겪게 될 것이고 20년 정도에 걸쳐 진행하는 자연스러운 노화로 80세가 넘으면 누구라도 결국은 치매를 마주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그러나 치매 정책을 실현할 지자체는 관심이 부족하고, 치매안심센터와 국민건강보험공단은 협력이 부족하다. 무엇보다 현장에서 ‘사람 중심’의 치매 접근이 부족하다. 치매인과 치매 가족의 돌봄권 주장은 개인의 몫이 돼 있다. 그래서 ‘나 자신이 치매라면’하는 감정이입으로, 요즘은 ‘돌봄민주주의’를 살피는 중이라고 한다.


돌봄권 주장은 개인의 몫이 된 곳은 치매만이 아니다. 질병에 거리거나 거동이 불편한 가족을 돌보는 것 역시 오로지 가족의 책임이다. 2021년 5월 8일, 강도영 씨가 존속살인죄인 부작위 살인(가족부양의무를 다하지 않았을 때 적용되는 살인)으로 징역 4년을 선고받은 사건이 있었다. 2020년 쓰러진 아버지를 어떻게든 살리려고 했지만, 병원비와 퇴원 후 돌봄을 감당할 능력이 없었다. 아버지는 죽기를 바랐고, 강씨는 무력감으로 집에서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아버지 방에도 들어갈 수 없었다. 그리고 일이 나자 119를 불렀다. 여러 보도 매체가 이 사건을 기사로 다뤘고, 개인과 단체가 탄원서를 냈으나, 판결은 바뀌지 않았다.




엄마가 요양원에 3년 동안 계셨다. 학대받은 적은 없지만, 나는 내 노년을 결코 그곳에서 보내고 싶지 않다. 하물며 치매 환자는 어떨까! 치매인에겐 인간으로서의 존엄이 아예 인정되지 않는다. 치매 이전 바로 그 사람은 그곳에 없다. 돌봄을 받는 사람과 돌보는 사람 사이에 유용한 단순한 기능의 스킬 만이 있을 뿐이다.


작년에 본 영화, 2015년 리사 제노버의 소설이 영화화된 <스틸 앨리스>가 생각났다. 유능한 언어학자였던 그녀가 알츠하이머 환자와 그 가족 모임에서 한 연설이 생각났다. 나는 일기에‘지옥 같은 고통’, ‘바보처럼 무능해지고 우스워지는 모습’, ‘원인이 있고, 진행되며, 치료법이 있을 수 있는 병’, ‘다음 세대가 겪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순간을 살고자 하는 의지’, ‘상실의 기술을 배우려는 의지’가 담긴 그 연설을 기록했다. 치매가 와도 여전히 치매 당사자는 여전히 사람이며, 여전히 그 자신이며, 여전히 누군가의 당신인 것이다.

정경환 대표가 그곳에서 데이케어센터 이름 ‘나들이’를 따왔다는 천상병 시인의 <귀천> 싯구를 옮겨본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누구라도 소풍을 끝내며 아름다운 날을 보내고 왔다고 말할 수 있는 세상이 오기를!

정경환 대표가 말한 ‘돌봄 민주주의’를 나도 가슴에 품어본다. 돌봄 영역만이 아니라, 모든 영역에서의 민주주의.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민주주의를.




* 국내 최초 민간 ‘치매 도서관’으로 2500여권의 치매 도서가 있어 자유롭게 열람할 수 있는

디멘시아도서관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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