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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희선 Feb 16. 2024

2월 16일

사순절 3일

이 글을 읽고 있는 오늘 하루 동안 - 이 글은 1999년에 쓰여졌고, 국내에서는 2003년 번역되어 나온 책으로 지금은 절판 상태다 - 우리는


* 100 가지 동식물을 멸종시키고

* 20,000 헥타르 (약 6천 5십만 평)의 사막을 만들어내고

* 8,600만 톤의 비옥한 땅을 침식시켜 파괴하고

*1억 톤의 온실가스를 배출하고 있다.


_  프란츠 알트 <생태주의자 예수> 28.


1912년 침몰한 호화 여객선 타이타닉호 갑판 위에는 춤과 연극, 샴페인과 근사한 의복, 넘치는 돈, 박약한 정신으로 가득했다. 승객들은 그 배가 가라앉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늘은 어떤가! 지구라는 갑판 위에서 선진산업국 사람들은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가!

이들은, 우리는, 오늘의 정치, 경제, 언론, 교회 엘리트들(?)은 황무지로 변한, 변해가는 지구를 푸르게 하고 파괴된 숲을 재건하는 것보다, 지구에서 2억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화성이 푸르게 되는 꿈을 꾸고 있다. (28, 29 참고)

20세기후반과 21세기 초반에 우리가 자연에 맞서 벌이고 있는 제3차대전은 1·2차 세계대전으로 죽은 사람들의 수(각각 1,500만 명, 5,000만 명)를 합친 것보다 훨씬 많은 희생자를 요구할 것이다. 그리고 선진산업국의 ‘기독교인’들은 자연에 대항하는 이 전쟁의 최전방에 서 있다.

지금 우리는 우리 자녀들과 제3세계 사람들 나아가 우리 손자손녀들의 몫을 가로채어 살아가고 있다. 자연이 5십만 일 걸려서 만들어낼 수 있는 분량의 석탄과 천연가스와 석유와 우라늄을 우리는 단 하루 만에 소비하고 있다 – 글이 쓰여질 당시 1999년이니, 지금은 이를 훨쓴 능가할 것이다 - 인류 역사상 최초로 제 후손에게 아무런 보호 본능도 아무런 책임감도 느끼지 못하는 세대가 되었다. 우리 시대의 치명적 죄악이다. (19, 20 참고)




여전히 교회에서, 혹은 경치 좋은 곳에서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새찬송가 478장)라는 찬송이 들린다. 보고 싶은 것, 보이는 것만 보는 이들에게 가능할 듯하다. 겉으로 보이는 아름다움 아래 숨겨진 피조물의 애통을 들을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 아닌가 싶다.

우리와 그들, 인간과 비인간, 주류와 비주류를 가르며 우리, 인간, 주류의 구원을 감사하는데 만족하는 대신, 신음하는 피조물, 모든 비인간, 소수의 목소리에 교회가 귀 기울이는 데 앞장선다면 – 그게 예수의 삶이었고, 고통 속에 신음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들은 하나님 아니던가 - 우리의 삶은, 모든 피조물이 살아왔고 앞으로 살아갈 지구는 어떻게 되었을까? 어떻게 되어갈까? 그야말로 하나님의 뜻대로 멸종으로 사라지는 대신 생육하고 번성하여 조화를 이루며 사는 ‘참 아름다운 주님의 세계’가 되어갈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그러나 교회는 어땠는가?

“지난 이천 년 동안 기독교 신앙은 학문의 빗장을 치고 닭 한 마리 얼씬하지 못하게 하며 오직 한 그루의 나무 외에는 아무것도 들어서지 못하게 하는데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로 인한 결과는 분명해졌다. 현재 우리는 자연에 맞서 제3차세계대전을 치르고 있다. (…) 생태적 윤리가 없는 종교는 따분해질 수밖에 없다.”(19)

 

‘한 그루의 나무’는 뭘까? 구원? 교회? 인간? 타 학문으로부터 고립된 신학?

그게 정확히 뭐든 교회는 확실히 우리가 살아가는 드넓은 현실에서 많이 소외되어있고 고립된 듯하다. 교회가 스스로 세상의 빛, 세상의 소금이라고 주장해도 세상이 더는 그런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세상이라고 다르지 않다. 지역공약 남발이 진행되는 가운데 기후변화 대응은 뒷전이다.




비록 교회에 출석하지는 않지만, 그리고 교회 혹은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어떤 사람들과는 다를지 모르지만, 나는 기독교가 말하는 신을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기독교인이다. 내가 쓴 글이나 책이 교회에서 사용하는 기독교적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그 내용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그래서 내가 쓴 책들이 일반 문학으로 분류되었어도 내가 기독교인 이상 그 책들은 기독교 서적이고, 내가 아는 이들 대부분 기독교인이다. 그러니 내가 쓴 책을 사주고 읽어준 분들 대부분이 나를 아는 기독교인들이다. 그런데 그 두 권의 책 중 <몸을 돌아보는 시간>을 읽어주신 분 중, 3부, “모두의 몸을 돌아보는 시간 세상을 돌아보며 영원의 시간을 살다” 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분은 없었다. 한 친구만이 그 부분에 대해 언급해줬다. 변변치 않을 수 있는 책을 읽어주신 분들게 무척이나 감사하지만 한편 아쉬움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시듯,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비인간 피조물에 대한 관심이 여전히 부족하기만 한 현실이 안타까웠다.

외식이 하고 싶어 맛집 검색을 하면, 언제나 고깃집, 횟집이 대세를 이루고, 우리 집 근처 식당 역시 고깃집 횟집이 주를 이룬다.




사순절이다. 우리의 식생활이 피조물들의 신음을 줄이고 늘릴 수 있다. 어는 기독교 기관이 사순절 채식 순례를 진행하는 이유일 테다. 우리의 삶, 식생활을 다시 생각해야 할 때다. <아무튼, 비건>을 읽고 올린 구선우 목사의 글을 올린다.


<아무튼, 비건>


설명할 수 없는 끌림이 있어, 동물 친구들에게 관심이 생겼다. 미디어와 책들을 접하고 있는데, 오늘은 《아무튼, 비건》(김한민, 위고, 2018)을 읽었다. 비거니즘을 소개하는 짧은 에세이 같아서 부담 없이 전자책을 펼쳤다. 무거웠다.


완벽한 비건 만들기보다, 다수의 사람을 비건적으로 만드는 것이 사회적으로 봤을때 효과적이라고 한다. 저자는 비건은 정체성이나 명사이기 이전에 형용사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저자에게 비건은 "참 비장한 소명"이다.


책은 계속해서 비거니즘에 대한 오해와 질문에 대해 변호한다. 고개가 자연스럽게 끄덕여지다가도, 감히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숙연해진다. 가벼운 에세이인줄 알고 책을 펼쳤다가 책의 진지하고 공격적인 태도가 당혹스럽게 느껴졌다. 저자는 한국 사회가 아직 준비가 안된 것에 대해 정말 많이 아쉬워한다. 육식을 찬양하는 이들의 과학적, 의학적 근거는 배후를 의심해야 한다면서, 채식에 대한 긍정적인 과학적, 의학적 연구결과를 소개하는데.. 자기 관점과 답을 정해놓고 하는 논쟁은 소모적이긴 하다.


“진지한 비건의 심정은 되어본 사람만이 안다. 그것은 노예제 사회에 살고 있는 노예 반대론자들의 심정, 홀로코스트 시대를 살던 쉰들러 씨의 마음이다.” - 5장 실전 중


아 그래! 사람이 무슨 권리로 동물을 괴롭히고 죽여도 되는걸까? 이런 생각이 들다가도.. 자꾸 노예해방 운동이랑 연결하니 왠지 크게 공감이 안된다. 저자는 소극적인 비건이 관심 없는 사람보다 낫다고 옹호하면서도, 엄청 경계한다. 퀴어에 관해 섣부르게 함부로 얘기했다가 양쪽(?)에서 다 욕 먹기 쉬운 것처럼, 이 주제도 회색 지대에서 함부로 얘기하면 큰 일 날 것 같다. 조심해야 하는데... 왜 자꾸 욕심나는지.


저자의 강렬한 논지 앞에 논리적으로 반박하기는 힘든데, 그렇다고 이 운동에 열렬히 참여할 수 있을까 고민이 되면서도, 일단 작은 실천부터 해야겠다. 비인간 동물들을 위하여!


"이제 각 종교 전통들은 동물에 대한 도덕적 감수성이라는, 지금 세계적으로 떠오르는 새로운 운동의 도전과 만나야 한다."  -《동물신학의 탐구》앤드류 진저/장윤재 역, 대장간, 2014: 60쪽.


여전히 이 문제에 있어선 한국 사회와 교회가 늦긴 한듯. 결론. 진지한 신학적 사회적 성찰과 실천이 필요하다. 일단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 잔인한 산업화에 대해선 반성할 필요가 있겠다. (비인간) 동물도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의 타자, 이웃이기에 사랑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실천할 것인가. 싸우지 않고, 관대함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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