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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희선 Feb 19. 2024

2월 19일

사순절 5일

예수의 언어가 이렇다.


가뭄, 가시, 거주, 겨자씨, 고기덩이, 곳간, 광야, 구름ㆍㆍㆍ 새, 샘, 생명, 생수, 강, 송아지, 식사, 썩은 고기, 씨, 씨뿌리는 사람, 씻기, 아궁이, 양, 연기, 열매, 영원한, 생명, 영혼, 요리, 용서하기, 음식물, 이해하기, 잃어버림, 살아남, 절벽, 젖먹이, 죽음ㆍㆍㆍ 평화, 포도, 포도주, 물, 풀밭, 하나님, 하루살이, 황소, 황폐하게 하기, 회개ㆍㆍㆍ 



예수는 이 창조 세계에 하나님의 모습이 어리어 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자연은 예수의 아버지, 곧 창조주의 참된 계시다. 우리는 생태적 예수의 학교에서 미래를 위한 가장 중요한 밑천, 즉 미래에 대한 신뢰, 창조 세계에 대한 신뢰를 두루 연습할 수 있다. 자연을 신뢰하는 사람에게 자연도 신뢰를 나타낸다.


"예수의 자연 비유는 낭만적인 문학 작품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것이 암울해 보이는 상황 속에서도 우리가 끝까지 신뢰할 수 있는 무엇, 즉 하나님의 '지금 여기 계심'에 대한 비전을 일깨우는 것이어야 한다."_페메 페린스


평범한이 세계는 하나님이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장소로 소개된다. 하나님은 모든 것 안 어 모든 것은 하나님 안에 있다."_매튜 팍스

이는 범재신론으로 불린다. (나 역시 범재신론자다)


이 책(<생태주의자 예수>)에서 나(프란츠 알트)는 예수를 오늘의 예수가 되게 하고, 생태위기가 최대의 문제로 부각된 우리 시대의 현실 속으로 예술을 불러들이려고 한다. 예 수의 신학은 추상적인 이론이 아니라 생명 (삶)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보고 하나님을 가까이 경험하는 것으로서 결국 '생명론'이요 '생태론'이다. 예수가 보기에 모든 생명을 위해 이바지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진보다. 예수가 말한 "생명의 충만함"이나  "넘쳐나는 생명"(요한복음 10장 10절)은 바로 이것을 말하고 있다.

지금까지 교회가 우리에게 가르쳐 왔던 것과는 다른 모습이다. 112를 외치는 물질주의적 생활 방식과 성장 성장 성장을 볼 수 있는 우리 시대의 철학은이 시대 세대와 오는 세대에게 생 피해 문제를 안겨주었다. 예술은 생명의 충만함을 꿈꾸며 그런 우리의 생활 방식 우리의 철학에 근본적으로 문제를 제기한다. 춤추고 노래하고 즐기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우리 인생일 터인데 왜 고통스러운 노동만이 판치고 있나?


예수의 죽음은 다른 사람을 위한 희생의 죽음, 오늘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죽음이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그런 식의 신학적 사고는 순전히 자기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 지어낸 공상에 불과하다. 정작 예수에게는 속죄 - 죽음 - 구원과 같은 사유의 도식이 없다. 어떻게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단 말인가! 모든 이에게 자비한 하나님이 어떻게 수십억 죄인을 위해 무고한 한 명을 희생시키기로 한단 말인가! 이 모든 것은 아직도 유치함을 벗어던지지 못한 신학의 잔인한 넌센스다. 예수는 '유치한' 사람이 되라고 한 적이 없다. '어린이처럼' 되라고 했을 뿐이다. 희망하고 감탄하고 배우는 사람이 되라는 뜻이다. 예수는 자신의 길을 갔고 그것이 다른 이에게 모범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이 결코 우리에게 자신에 우리 의 길, 우리 자신의 책임을 면제해주지 않는다.

예수의 긍정적인 생명력은 모든 사람의 정신적 영적 발전을 돕는다. 예수의 삶은 인류가 신뢰와 희망과 사랑, 그리고 자연스러움을 통해 더 인간적인 경지로 나아가는 길에서 결정적인 도움이 될 수 있다.


<생태적 예수> 33~37.




빈곤한 신학적 상상력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예수를 알아가는 데, 얼마나 걸림돌이 되는지.

풍성한 사랑의 하나님과 예수, 그분의 삶과 길, 죽음을 단순한 프레임 - 속죄양, 대속적 죽음 정도 - 에 가둬 우리의 눈을 멀게 하고  가슴을 닫아왔는지.

전하는 자도 듣는 자도 관성에 젖어 이 프레임을 포기하지 않는다. 못한다.

이해를 위해 이론이 필요하지만, 이론이 실제를 담지 못하면 당연히 버려져야 한다. 실제를 온전히 담아내는 이론이란 있을 수 없다.

그리하여 모험이 계속되는 법이고, 우리의 삶이란, 모험으로 사는 인생인 것이다. 과거에 폴 투루니에의 <모험으로 사는 인생>을 읽으며 얻은 통찰이다. 그는 조직의 형성과 해체에 관해 이런 식으로 말했다.


어쩌다 절판된 이 책을 감사하게도 중고 서점에서 구하게 되었는지.

오래전부터 재신론자인 나는 이 책을 만나, 하나님과 예수를 조금은 더 알아가게 될지 감사하다.


그러나 이 은혜와 감사, 그리고 앎이 내가 사는 방향성과 삶의 책임까지 져주지는 않을 것이라.


조금은 기쁘고,

조금은 더 무겁다.

그러나 앎이 삶을 이끌어 갈 것을 희망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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