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희선 Feb 20. 2024

2월 20일

사순절 6일

우주 공간에서 우리의 별 지구는 다른 별 하나를 만난다. 그 별이 지구에게 묻는다. “너 잘 지내니?” 우리의 별은 이렇게 대답한다. “그렇지가 못해. 나는 호모 사피엔스를 태우고 다니거든.” 그러자그 낯선 별이 지구를 이렇게 위로한다. “까짓것, 신경 쓰지마. 금방 사라질 거야.”

고열이 계속되는 것을 견뎌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지구라고 다를 게 있겠는가?

_ <생태주의자 예수> 44, 45.


저 나사렛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꿈꾸었건만, 지금 존재하는 것은 교회다. 교회가 미래를 박탈당하지 않으려면 로마에서 떠나, 비텐베르크에서 떠나, 갈릴리 나사렛으로 돌아가야한다. 거기서 예수의 생태주의, 생태주의자 예수를 만난 것이다. 그가 세운 학교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 존재의 온 힘을 다해 신뢰할 때 그분은 우리를 결코 실망시키지 않는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다. 예수가 가르쳤던 창조주 하나님, 그리고 창조세계에 대한 그분의 신뢰는 이성이나 학문의 방법으로 증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생태적 예수도 아버지의 사랑을 학문적 증명으로 습득한 것이 아니라, 그저 직감적으로 파악했을 뿐이다. 마치 땅속의 두더지도 햇빛을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오직 우리의 영혼 깊은 곳에서, 탁 트인 마음으로, 자연의 고요함과 사랑하는 사람의 눈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생태적 예수가 말하는 종교란 문자에 얽매인 신앙이나 유럽에 대한 충성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신적인 것에 예민하게 감응하는 것이요. 우리를 둘러싼 신적인 것에 대한 열려 있음이다.

참된 종교인이란 맹목적인 신앙인이 아니라 뭔가를 추구하는 사람, 신뢰하는 사람, 열려있으면서 기꺼이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이다.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찾지 못한다. 발작하듯 추구하는 사람도 찾지 못한다. 그러나 눈부시기 푸르른 저 하늘처럼 너르고 열린 사람은 반드시 찾게 된다.

하늘 아버지의 좋은 창조세계를 끝없이 신뢰했던 예수를 나는 ‘생태적 예수’라 부른다.

_ <생태주의자 예수> 44, 45.




성경은 학문적으로 기술되어있지 않고 온통 이야기로 되어있다. 비유로 되어있다. 예수는 삶의 이야기로 말했지만, 예수를 다 이해할 수 없었던 바울은 그를 이해하기 위해 자신이 배운 학문을 동원해 개념화했을 것이다. 예수라는 실제를 바울이 배운 학문, 그 안에서 빌린 개념이 다 담을 수 없고, 바울의 어려운 말을 이해한 이들도 극히 드물었을 것이다. 오늘 여전히 우리는 하나님을 만난 구약 사람들의 경험과 이야기, 예수가 비유로 하신 이야기를 이해할 수 없는 학문의 이야기로 혹은 그것조차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상태에서 어떤 교리들로 하나님과 예수를 이해하려고 한다. 그러면서, 창세기에서 만나는 창조의 아름다움, 예수가 만나는 창조세계를 잊어가며 이제는 거의 도외시하고 있는 건 아닐지!

이제, 어쩌면 창조주와 예수는 광신의 대상이 되고, 교회와 교리만 존재하게 되고, 그로 인해 창조주와 예수가 사랑한 모든 피조물 중, 어떤 종, 그 종 안에서조차 어떤 부류만 사랑의 대상이 되고 어떤 종은 착취의 대상이 되어 신음하며 어떤 부류는 혐오와 차별의 대상이 되어가는 건 아닐지!

호모 사피언스의 착취로 피조물이 신음하고 지구도 이제 더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보시기게 좋은’ 별이 아니다. 지구가 더는 Earth 아니라, EEarth 가 되었다고 누군가는 말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낯선 별이 우리 별을 위로하며 한 말로 나타날지 모른다.

“까짓것, 신경 쓰지 마. 금방 사라질 거야.”


나는 지금 당장은 내 아이들, 그리고 어린 것들, 내가 알고 있는 이들, 그리고 또 신음하면서도 고통을 묵묵히 감당할 수밖에 없는 피조물들이 염려된다. 그리고 이 푸르고 너르고 아직도 아름다운 이 지구별이 변할 모습을 상상해보며 마음이 무겁다.

이 지구의 몸살은, 열병은 결코 인간의 산업화가 만든 것이 아니라는 무책임한 자들의 말이 차라리 맞기를 한편으로 바란다.


(다행히 스프레이는 쓰지 않지만) 내가 사용하는 냉각제, (다행히 개인 교통수단은 거의 사용하지 않지만) 전기와 연료들, 무분별한 음식과 의류의 소비에 어떻게 책임질지~ 도무지 자신이 없다.

아마 이 글을 쓰는 이유는 그래서일 거다. 혼자 못하니, 함께 알고 함께 하자고.

아마 그래서일 거다. 드라마와 영화, 소설이 설교보다 좋은 일을 하고 있다고 느끼는 거 말이다.

작가의 이전글 2월 19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