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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희선 Feb 21. 2024

2월 20일

사순절 7일

프란츠 알트의 <생태주의자 예수>를 읽고 있습니다.




우리 몸에 열이 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열은 우리 몸에서 위험한 요소를 제거하라는, 땀으로 배출시키라는 신호다. 지구에 열이 있다는 것은 아마 지구에게 가장 해로운 존재를 없애버리라는 신호일 것이다. 지금 그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우리 인간들이다. 45


" 자연은 항상 옳다."

_ 괴테


내(프란츠 알트)가 이 책(<생태주의자 예수>)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히로시마에 투하되었던 폭탄 1백만 개를 합쳐놓은 만큼의 파괴력을 지닌 원자탄을 25000개가 존재한다. 히로시마 폭탄 1백만 개라니! 인간들한테는 핵무기로부터 벗어날 방책을 강구하는 것보다 핵무기를 만드는 것이 만드는 편이 더 쉬웠나보다. 아직도 국제사회에서는  핵무기를 사용하며 좌지우지하는 나라가 강대국으로 인정받는다.


과거 미국 핵폭력의 최고 지휘관이었던 리 버틀러에 의하면 핵무기를 위협 수단으로만 사용한다는 여전히 통용되고 있는 주장은 완전한 자기기만이다. 50.


버틀러에 의하면 냉전 50년동안 미국은 핵무장의 60억 달러를 쏟아부었 다. 미국은 116 종의 핵무기 7만 개를 보유하고 있으며 이 무기들은 다양한 상황에서도 발표가 가능한 것들이다. 심지어 미국은 핵수류탄까지 개발했다. 1998년부터 인도와 파키스탄도 핵무기를 갖게 되었다. 그전까지 5대 핵무기 보유국이었던 미국, 러시아, 중국, 프랑스, 영국은 이에 대한 격렬히 저항하면서 핵 클럽의 두 신출내기에게 핵무기를 즉각 완전히 철거할 것을 요구했다. 강도가 "도둑이야"하고  소리치는 꼴 아닌가! 51~52.


자연과의 평화 없이 세계 평화는 없다.


예수가 마태복음 13장에서 말하는 하늘나라의 비밀을 모두 담고 있는 것이 어쩌면 산상설교인지 모른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우리 삶을 진정 풍요롭게 해줄 모든 보물이 예수의 산상설교 그리고 다른 핵심 가르침에 담겨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 보물이란 평화의 보물, 나 자신에 관한 사랑의 보물, 사람들 서로 간의 평화와 사랑이라는 보물, 나아가 자연과의 평화, 자연에 대한 사랑이라는 보물, 마침내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보물이다.

자연과의 평화 없이는 도무지 평화가 불가능하다.


거룩한 창조 세계란 훼손됨이 없는 창조 세계, 그러니까 광우병에 걸리지 않은 소, 돼지 콜레라에서 안전한 돼지, 환경 파괴로 각종 알레르기나 오존층 파괴로 인한 피부암의  고통을 받지 않는 인간을 뜻한다.  거룩한 창조세계! 그것은 깨끗한 물과 공기, 건강한 고래와 살아있는 숲이다.

산상설계는 분명하게 말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본 뜻이다." (마태복음7:12)


예수의 계획은 사람들을 평화와 정의를 위해 자유롭게 하는 것이었다. 내적이고 외적인 평화, 우리 자신과의 평화, 다른 생명체와의 평화,  자연과의 평화를 위해.

59~63.


예수는 다음과 같은 확신 속에서 말하고 행동했다.

사람들에게 스스로에 대한 신뢰를 선사할 수 있는 사람은 그들의 능력, 용기, 치유의 능력, 그리고 사회적 정치적 능력을 열배로 늘릴 수 있다. 이것을 이해하고 거기에 따라 살고 행동하는 사람은 "나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어" 라는 구태의연하고 기만적인 변명을 둘러대지 않는다. 오히려 정반대다. 생태적 예수의 뒤를 따르는 사람들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묻게 된다.

"내가 하지 않으면 도대체 누가 이것을 바꾸려 들겠는가?" "지금 하지 않으면 언제 하겠는가?"

"여기서 하지 않으면 어디서 하겠는가?" 예수의 전략은 우리의 감수성을 예민하게 하는 것, 우리의 직ㅈ관을 심화하는 것, 우리의 양심을 더 날카롭게 하는 것이다. 이 전력은 감성적인 것이 아니라 지성적인 것이다. 하늘에 이르는 사다리는 타인의 감정에 대해도 예민해지는 것이다.  65, 66.


오늘날 생태적 진보와 성공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종교와 영성의 요소, 특히 아버지와 창조 세계를 향해 예수가 보여주었던 신뢰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모든 인간은 종교적이다. 바로 이 종교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창조질서를  보존하는 일에 진정한 일꾼이 될 것이다.

오늘날 교회가 텅텅 비어가는 것은 본질적으로 교회의 가르침에 그 책임이 있다. 그러나 예수는 전혀 달랐다. 68.




이 글을 읽으며, 왜 인간 개인의 다양한 부르짖음에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으시는지, 아니 못하시는지 알 듯하다.

영화  <Almighty>가 생각난다. 누구 한 사람의 부탁을 들어주려면 그와 그의 문제와 연결된 세계 전체에 균형이 깨진다.   세계는 서로 연결되어있지 않은 게 없다.

하나님은, 사람을, 그리고 개인을 사랑하시지만, 그와 함꺼 창조세계 그 어느 하나 사랑하지 않으시는 게 없다. 하나님은 창조세계 전체를 사랑하시고 관여하신다. 이를 방해하는 게 인간이고 인간 집단 아닌가!


인간집단과 각자의 인간이 제 자리를 잡지 않아 자신에게, 인간 집단에게 해를 끼친다.

개인과 인간집단의 돌아섬이 필요하다.


기독교의 인간관은 지극히 부정적이다. 인간으로서 어쩔 수 없다며 그 변화의 책잉 을 예수께 전가해왔다

그야말로 예수의 인간관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랍비 조너선 색스 역시 유대교의 인간관이 스스로 계신 하나님의 형상을 받은 인간은 그분이 세상을 창조한 언어의 능력을 받은 자로 언어로 상상하며 개념을 만들고, 인간 자신과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을 스스로 창조할 능력있는 자라고 말한다. 즉 이제까지의 부정적 인간관과 선을 긋는다. 실제로  예수님은 긍정적 인간의 모델이었다.

그러나  기독교는 핵을 폐기처리하는 것 보다, 핵을 제조하는 게 더 쉬운 세상처럼, 이제껏 외쳐온 부정적 인간관을 폐기하는 것보다 그것을 더욱 더 강조하는 게 더 쉬ㅂ게 여길 것이다. ㅂ긍정적 인간관은 그만큼 인간의 책임을 무겁게 할 수 있으니 말이다.


"인간이라 어쩔 수 없이, 저를 짓는다" 에서 벗어나 희망을.

창조세계를 위한 걸음을.

나와 인간이라는 범위를 벗어나 창조세계 전체의 회복을 그려야 한다.


사순절이다. 교회는 교우, 사람을 넘어선 창조세계를 향한 사랑과 비전을 이야기할 줄 알아야 한다.

통증으로 인해 우울증에 걸려 정신과에 다닐 때 의사가 할 말이 생각난다.

"아픈 몸에 집중하지 마세요. 주변 세상으로 눈가 귀를, 신경을 돌리세요. TV에 넘쳐나는 건강 프로그램을 보지 마세요."


지금 고통 한가운데 있는 인간  모두가 기억해야 할 말인 듯하다.




글을 쓰고나서야 또 건강프로그램을 봤고, 또 좋다는 건강보조제를 사들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앞으로는 정말 절제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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