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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희선 Feb 22. 2024

2월 22일

사순절 8일

<생태주의자 예수> 71~76


 

예수는 자신이 살았던 시대를 현저히 앞서 나갔다.




예수는 카를 마르크스보다 훨씬 급진적이다. 마르크스는 사회관계를 바꾸려고 했지만 예수는 가슴을 변화시키려고 했다.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에서 사회적 문제에 참여적인 태도를 보이는 해방 신학자들에게 바티칸은 지금도 공산주의 간첩이라는 혐의를 두고 있다.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이 해방 신학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슨 신학이란 말인가? 오늘날 선진 산업국에도 해방 신학이 필요하다. 생태문제, 인간의 문제 사회의 문제에 깊이 관여하는 신앙 말이다.


유럽 연합에 속한 국가들은 지난 20년동안 50~70% 프로정도 부유해졌다. (1999년 기준) 경제는 인구 성장률보다 빠르게 성장했으며 독일의 경우는 더욱 그러했다. 그런데도 현재 유럽 연합에는 실업자가와 빈곤 기준치 이하의 삶을 사는 사람들, 노숙자가 넘친다. 도대체 그 남아도는 돈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부자들은 더 부유해지고 가난한 사람들은 더욱 가난해진다. 미국의 경우는 서유럽보다 심하다. 초국적 기업들은 독일에서 거의 세금을 내지 않는다. 기업 집단은 조세법상 자신들에게 유리한 부분(세금이 거의 없는)에 소득을 기재하여 거둬들이 높은 이익을 새로운 일자리나 연구, 교육에 투자하지 않고 금융업과 외환 투자에 이용한다. 자본이 사회적 생태적 인본주의적 의무로부터 이탈한다면 번영은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




유럽에서 정치적으로 주목할만한 평화운동이 처음으로 일어나기 1,950년 전에 예수는 산상설교를 통해서 원수사랑을 평화주의의 토대로 삼았다. 1980년 핵무기가 다시 제조되기 시작한 시기에도 예수의 평화주의적 차원을 파악하고 그것을 설교하는 목사나 신학자들은 극히 소수였다. 공산주의자였던 미하일 고르바쵸프는 예수의 평화주의를 신학자들보다 훨씬 심오하게 이해하고 거기에 따라 실천했다. 고르바초프의 측근 가운데 한명이 1985년 나의 책 <평화는 가능하다- 산상설교의 정치학> 에 대한 반응을 보여왔다. 그는 이렇게 썼다.


"크레믈린에 있는 우리는 이제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는 예수의 모토를 따라서 군축 정책을 시행합니다."

같은 시기에 바티칸은 내 책을 이탈리아어로 번역할 계획을 세웠던 로마의 한 출판사에게 작업 중지를 요구했다. 바티칸의 설명은

"예수의 때가 아직 무르익지 않았다."였다.

공산주의 지도자였던 사람이 이수의 정신에 따라 세계를 변화시켰던 반면 파티의 잠푸러기들은 세계사의 역사적 낀 순간을 또 한 번 그냥 놓쳐버렸고 예술 가르침을 배관하고 말았다. 영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그것이 우리에게 다시 희망을 준다. 예수의 가르침은 평화주의적이고 생태주의적인 신학이다.




여성 운동이 일어나기 2천년 전에 예수는 남자와 여자의 파트너 관계를 제시한 '최초의 새로운 남자'였다. 교회에서는 오늘날까지도 여성들이 소외되고 차별대우를 받는다. 그러나 예수는 아무렇지도 않게 여성들과 더불어 갈릴리 지역을 돌아다녔으며 막달라 마리아를 사도 중에 사도로 세웠다. 이것은 그 당시로서는 전대미문의 사건이었고 남성중심으로 구성된 정치적 종교적 기성세력에게는 엄청난 도전이었다. '최초의 새로운 남자'였던 이 나사렛 예수가 실천한 사랑은 수많은 여성에게 하나의 이상이 되었다.

예수의 하나님은 창조의 원리 여성성에 가까운 원리다. 이 원리는 지배나 두려움, 폭력이 아니라 책임, 관계, 사랑, 동반자 의식과 관계된 것이며 무엇을 지배하는 권력이 아니라 무엇을 실현시키는 힘과  관계된다. 예수가 생각했던 하나님,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사랑의 관계는 가부장적이거나 페미니스트적인 것이 아니라 동반자적 관계다. 예수는 남자- 여자, 아버지 - 자식의 관계도 같은 방식(동반자)으로 생각했다.

이러한 예수는 오늘 우리에게 생태위기가 전세계로 확산되고 우리네 삶의 초대가 허물어질 위기에 처한 이 시기에 어떤 메시지를 주고 있는가? 사람은 뿌린대로 거둔다고 했던 예수와 다른 많은 종교 창시자들의 메시지는 생태 위기 시대에 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 의미는 명백하지 않은가? 핵발전소를 만든 사람은 핵 참사를 겪게 될 것이다.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한 텔레비전 대담에서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우리가 21세기의 생태계 위기에서 해법을 찾지 못한다면 우리는 다른 모든 것을 잊게 될 것입니다."




오늘 교회에서 듣는 메시지는 어떤가! 전쟁과 핵 제조에 반대하고, 생태계와 인간으로 인해 신음하는 피조세계를 살리자고 말하기엔, 교우들의 삶 자체가 너무 팍팍하기만 한가!

맞는 말이긴 하다. 그러나 더 볼 수 있어야 하지 않을지!



그러나 내가 경험하기로는 하나를 깊이 사랑하는 이는 많은 것을 사랑할 줄 알고, 많은 걸 깊이 사랑하는 이가 하나 또한 깊이 사랑한다.

한 사람을 옳게 사랑하는 이는 많은 사람을, 사람을 깊이 사랑하는 사람은 생태계의 피조물을 사랑하게 되는 것!

생태계도 자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많은 것을 안겨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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