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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희선 Feb 24. 2024

2월 24일

사순절 9일

예수는 우리에게 말한다. 너희 안에 있는 나침반을 사용하라. 전통 뒤에 숨지 말라. 그것이 교회와 가문의 전통이든, 정치 전통이든, 그 뒤에 몸을 숨기지 말라! 이제 너희의 양심에 귀 기울이라! 날씨를 알려면 하늘을 올려다볼 일이다. 예수에게는 각 사람의 책임의식이 그 어떤 전통보다 중요하다. "어찌하여 너희는 옳은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누가복음 12:57)  80.


신뢰는 사람을 건강하게 한다. 두려움 사람을 병들게 한다. 심리학자 에릭슨에 따르면 인간은 엄마와 아이 사이에 원초적 관계를 통해 '근원적 신뢰'를 배운다. 이 근원적 신뢰는 인간과의 신뢰 관계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과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 단계도 포함된다.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이 "이 세상은 친절한 한 곳인가 아닌가?" 일 것이라고 했다. 예수가 그랬던 것처럼 "그렇습니다. 아버지. 당신의 나라가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답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구연적 신뢰를 가진 사람임에 틀림없다


"ㆍㆍㆍ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 (마가복음 1:9~11)

여기에 지금까지 인류 역사에서 결정적인 순간이 묘사되고 있다. 하나님은 더 이상 분노의 하나님, 복수의 하나님, 질투하고 벌 주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랑하시는 분으로 나타난다. 나는 이것이 참된 세계의 혁명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예수의 말이 울려 퍼진다. "하나님 나라가 왔다."


예수는 하나님의 음성을 내적으로 들었고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 이 깊은 영적 체험, 철저한 하나님 체험이 서른살 청년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하나님의 사랑 선언은 예수를 전류처럼 관통했다. 하나님의 사랑의 에너지가 청년 예수에게 파트너처럼 밀려왔고 그것이 그를 변화시켰다. 예수와 하나님 사이의 근원적인 신뢰가 싹 텄다. 예수의 하나님에게는 차별도 없고, 아웃사이더도 없다. 그분의 태양이 모두에게 비치기 때문이다. 예수의 하나님은 위협의 메시지가 아니라 기쁨의 메시지다. 정치적으로 예수를 의지하는 사람은 정치적 종교적 인간적 형태의 독재에 동조하지 않는다. 동반자적 남녀관계, 노사관계가 하나님의 뜻 안에 알맞은 삶과 노동의 형태이듯이, 민주주의야말로- 예수에 따르면 - 하나님의 뜻에 맞는 국가 형태다.


예수가 전하는 아버지 하나님은 상처를 주는 분이 아니라 상처를 싸매주는 분이다. 제도권 종교인들에게 이런 하나님 이미지는 새로우면서 동시에 위험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제거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강구했다.

예수는 하나님을 어머니 같은 분으로 경험했고 그 하나님을 가르쳤다. 그와는 반대로 전통이 가르치는 하나님은 남자 주인의 모습이었다. 83~90.




예수는 하나님 나라가 왔다고 했다. 그래서 그분은 즐거운 가나혼인잔치 에서 포도주가 떨어지지 않게 하는 일부터 시작하셨을 것이다. 필요해서 원하는 부탁을 들어주셨다. 강요하고 강제하는 일이 없으셨다.

누구와도, 무엇과도 동반자적 관계를 이루셨다.


오늘날 처럼, 형식만이 아닌, 실질적인 민주주의로 누구도 자신이 속한 영역에서 소외시키지 않으셨다.

며칠 전 돌봄 민주주의를 말하는 분을 만났다. 그리고 모든 영역의 민주주의를 꿈꿔봤다.

교육 민주주의, 의료 민주주의, 경제 민주주의, 가정 민주주의 ㆍㆍㆍ


만일 오늘도 지금 이 자리에 계신다면 누군가를 얽어매는 종교적, 정치적 전통에 얽메이지 않으시는 모습을 보여주시고  어쩌면 또다시 하나님을 광신하는 자들과 권력자들에게 모함을 받고, 죽으시게 될 것이다.

비종교적 예수!

누구에게나 자신을 드러내도록 자유를 주고, 그를 들어주실 예수!


내게 무엇을 원하느냐? '하기 전에' 묻고 행하실 것이다.

우리 또한 물어야 할 테다.

나 자신에게, 내 양심에게. 그리고 사랑하는 이들과,  생태계의 피조물들에게. 순종, 맹종은 예수와 거리가 멀다. 오늘 살기 어려운 세상이 된 건 우리가 누군가에게,  무엇에게 묻지 않아서다.


어떤 집 아이들과는 좀 다르게, 우리 딸들이 좀 쎄다. 출간한 책을 읽어달라고도 안하거니와 딸들도 읽어주거나 홍보해주지 않는다. 하고싶으면 할 일이다. 이번에 쓴 글도 바쁜 아이들에게 읽어달라고 부탁하지 않았다. 그 아이들대로의 삶이 있을 테니까.

어제 큰사위가 기꺼이 읽겠다고 하기에, 긴 글을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으로 보냈다.

조금 쎈 딸의 핀잔에 주눅이 들까봐 글의 시놉시스(출판사가 시놉시스를 보내라는데, 시놉시스가 가능한가)를 딸과 사위 외에 오랜 우정에게 보냈다.

다행히 작은딸은 부드럽게 답을 줬고, 이범진 편집장은 매우 중요한 이야기로 도움을 줬다.


어제 큰사위가 기꺼이 읽겠다고 하기에, 긴 글을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으로 보냈다.

조금 쎈 딸의 핀잔에 주눅이 들까봐 글의 시놉시스를 딸과 사위 외에 오랜 우정을 신뢰하며 이범진 편집장께 보냈다.

다행히 작은딸은 부드럽게 답을 줬고, 이범진 편집장은 매우 중요한 이야기로 도움을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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