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은 영혼을 갉아먹는다. 그러나 예수에게 이제 두려움은 없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인간이었다.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의 바다, 신뢰를 공급해 주는 그 바다에 안겨 두려움으로부터 가장 자유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인간과 자연에 대해 맹수처럼 잔인한 오늘날 우리 삶의 태도는 집단 자살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점점 뚜렷하게 실체가 드러나고 있는 집단적 위기에 직면하여 우리 삶을 주도하는 이미지에 총체적 전환이 필요하다. 두려움과 공격성에서 탈피하여 신뢰와 평화, 사랑으로! 파괴가 아니라 창조성으로! 이런 이미지를 우리는 예수의 창조주 하나님에게서 발견한다. 하나님 이미지와 인간 이미지는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예수가 분명하게 말했듯이 하나님이 오직 우리 안에서 발견된다면,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고 느끼는 것처럼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고 느낄 것이다. 또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느끼고 생각하는 것처럼 다른 모든 생명들에 대해서 느끼고 생각할 것이다.
기독교적 사유에는 오늘날까지도 상대성 이론이나 현대의 뛰어난 기동성이 깊이 파고들지 못했다. 그러나 기독교가 역사의 박물관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싶지 않다면 그런 새로운 생각과 조우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수 자신도 친구들에게 새로운 생각에 스스로를 개방하라고 계속해서 격려했다. 예수는 낡은 사상 특히 그 사상의 대변자들과 자주 맞닥뜨렸다. 그들은 고분고분 물러서는 법이 없다. 선을 행하는 사람은 언제나 호의적인 대답을 받을 것이라는 생각은 아주 위험한 환상이다. 예수는 그 짧았던 공적 활동 기간에 전혀 흔들림 없이 의식적인 결단ㆍ전통과의 단절ㆍ도전ㆍ두려움 등에서 자유로운 생각, 위험을 회피하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그는 당시 기성 종교ㆍ정치권력의 눈에 위협 요소로 비쳤다. 하지만 바로 그것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그를 잊지 못하는 것이다.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이미지와 거기에 상응하는 인간 즉 그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받으며 스스로를 사랑하는 인간 이미지를 제시함으로써 예수는 그 시대를 한참 앞서 갔다. (126~131)
오늘날 기독교도 교회도 교우도 많은 사람이 따르고 싶지 않은 대상이다.
나 역시 내가 흉내조차 낼 수 없는 훌륭한 분들 조차, 과거 하나님을 이해하기 위해 형성된 한시적인 신학적 교리에서 벗어나지 않는 분들을 보며 실망한다. 앎이 삶을 이끌어 간다. 바르지 않은 앎이 더 나은 삶을 제한한다.
곳곳에 예수 닮은 이들이, 그런 교회가 있지만 드러나지 않을 만큼 소수에 불과하다.
나와 우리가 믿는 기독교의 전통에 대해 의심해보고, 개방해도 괜찮다.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아니 그래야 한다.
우리의 의심에 의해 무너지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고, 그래서 무너지는 교리는 마땅히 무너져야 한다.
"죽일 수 있는 하나님은 죽여야만 한다." _클리포드 스탠리 <만들어진 예수 참 사람 예수>(존 쉘비 스퐁
한국기독교연구소) 21. 에서 재인용
우리는 어떤 학문에서 얻은 진리에 맞서서 신을 방어할 필요가 있다면, 그 신은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하나님과 진리는 서로 모순되는 것일 수 없다. _존 쉘비 스퐁
나는 어떤 신을 알고 있는가?
그 신은 죽지 않을 신인가?
내가 모르고 있던 신은 어떤 분인가?
신을 향한 질문은 신을 향한 사랑이지 않을까!
" 부활절이 무엇이었든지(변화적 신비인지 명제적 진리인지, 혹은 신화인지 사실인지) 간에 제자들이 부활절 이후에 보여준 영웅적인 행동이 입증하는 것 처럼 부활절은 그들로 하여금 공포를 넘어서게 했고, 그들에게 청중의 언어로 말하는 능력을 준 성령의 이야기가 밝히듯이(행2) 부활절은 그들로 하여금 부족적 정체성을 넘어서게 했으며, 새롭게 거룩한 날을 설정하는 것이 선언하듯이 부활절은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종교적 한계를 넘어서게 했으며. 또한 그들의 부활 언어가 명시하듯이 부활절은 그들의 죽음에 대한 의식을 넘어서게 했다."_존 쉘비 스퐁 <만들어진 예수 참 사람 예수> 1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