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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희선 Mar 01. 2024

<만들어진 예수 참 사람 예수>를 읽으며

참 쓰기도 말하기도 두려운 말을 한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두려운 게 아니라,  확신에 거하는 사람들이 두려운.


____


나는 성서도, 신조도, 교리도, 교의도, 심지어 종교 자체도 초월하여 예수를 탐구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하나님의 신비, 생명의 신비, 사랑의 신비 및 존재의 신비만을 응시하게 될 것이다.

나는 과거의 종교 이해가 쇠퇴하고 소멸하는 것을 성장하기 위한 새로운 기회로 본다. 즉 새로운 의식으로 성장하고 하나님 체험에 대해 새롭게 말하는 방식을 탐구하는 기회로 본다. 신약성서의 기적은 초자연적인 개입이 아니며 부활은 육체적 소생에 관한 것이 아니며, 또한 "예수의 신성"에 대한 믿음은 외계의 신이 인간적 존재 속으로 침입하는 것이 아니라는 그런 인식 말이다. 나는 유신론은 하나님이 누구인지에 관한 것이 아닌 것과 같이 무신론은 단순히 하나님이 누구인지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어 기쁘다.

나는 과거의 시대적 조건에 의해 뒤틀려진 설명에 대해 방어적으로 집착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섬겨진다고는 믿지 않는다. 과거의 문자주의적 이해를 포기할 때 오늘을 위한 그리스도 이야기를 탐구할 수 있는 놀라운 기회가 제공된다는 것이 나의 신념이며 나는 이 과제를 위해 열정을 쏟고 싶다. 로마 카톨릭 교회 역사에서는 20세기 중반의 전통적 사고방식의 게토에서 벗어나 현실 세계와 대화하려는 단편적이지만 바람직한 시도가 있었다. 그것은 교황 요한 23세(1958~63)의 임기 중에 일어났다. 그는 시대 착오적인 교회가 지금 면은 거대한 문제들을 감지한 후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하여 과거의 신앙 이해가 오늘의 학문과 상호 작용하도록 주선했다. 그 결과는 매우 유익한 것이었다. 이 오래된 기관에는 변화와 개혁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것은 영광스럽고 희망찬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오래가지 못했다. 가톨릭 교회의 전통적이고 낡아빠진 이해가 공개 도전을 받기 시작하자, 신도들은 공포에 떨 수밖에 없었다. 위험을 느낀 교회 지도자들은 권력의 상실을 직감하게 되었고 "신앙의 수호자들"은 이 잠재적인 생명 확장을 위한 개혁을 분쇄하려고 한 목소리로 크게 외치며 일어났다.

요한 23세의 서거와 함께 그 개혁 운동은 붕괴되고 말았다. 이후 가톨릭 교회는 바오로 6세를 교황 자리에 앉혔는데, 그는 모든 창의적 신학 연구를 중단시키고 가족계획에 관한 모든 진척을 뒤집어 엎었다. 그다음에 또 그다음에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황의 직책을 차지했고 가톨릭 공동체에서 모든 창의적 사상을 조직적으로 억압하기 시작했다. 끝으로 베네딕트 16세가 망토를 입게 되었는데 그는 요한 바오바로 2 세의 정통주의를 강화시킨 제 1인자의 이기도했다.

하나님에 대한 궁극적 진리가 신조 혹은 교리 형식으로 요약될 수 있다는 생각은 가사롭기도 하고 역적인 자살 행위 기도하다. _ 존 쉘비 스퐁 <만들어진 예수 참 사람 예수>(한국기독교연구소) 203~206.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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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는 목사라면, 누구라도 무한의 하나님이 성서, 특정 신조나 교리 안에 갇힐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할 수밖에 없다. 목사뿐 아니라 실은 누구라도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은가!

그러나 은퇴했고, 심지어 교회에조차 출석하지 않는 나같은 사람도 이런 글을 쓰면서도 누군가 나를 이단, 삼단으로 여기고 관계를 끊거나 비방하리라는 두려움이 있는데, 지금 목회를 하는 목회자라면, 이미 교우들 안에 굳게 터를 잡고 있는 것들을 거슬러 다른 생각을 전한다는 게 얼마나 두렵고 힘들겠는가!


그러나 생각해보자.

정말 무한의 하나님이라면 우리가 굳게 붙잡고 있는 과거 전통에 갇힌 분이겠는가!


아무려면 어떨까. 다 좋다. 나는 가끔 우리가 우리를 대신해 모든 걸 짊어지고 죽으신 그분께 우리의 책임을 떠넘기지 않으려면, "참 인간 예수"에 촛점을 맞춰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 예수가 살았던 앎이기에 우리 또한 그와 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는 메시지가 들릴 것이다.


예수를 본 제자들,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만난 제자들의 삶이 그랬던 것 처럼.


나는 왜 우리가 예수보다 교회에 집착하는지 의심스럽다. 과연 우리가 예수를 다 알고 있을까! 교회에서 가르치는 전통에 의해 규정된 예수만을 알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해야 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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