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8일 일기로 올린 글 '기도를 이뤄주지 않으시는 하나님, 우리의 기도가 우리를 향하기 원하는 분'에 대해 설명할 필요를 느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어떤 걸까!
사랑한다?
그건 촛점이 주고 받는 데 있지 않다. 어떤 관계에 있느냐의 문제다.
어리기만 한 우리는 하나님이 뭐든 하신다고 믿었다. 비가 오게 해달라고, 그치게 해달라고, 이런저런 소원을 빌어왔다. 그리고 우리가 구하는 대로 주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진작부터 경험했다. 그럼에도 이것저것 그분이 좋아하시리라 생각하거나 배웠거나 세뇌된 것들을 드리면 혹 소원을 들어주시지 않을까,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매달린다. 간혹 어쩌다 소원이 이뤄지만, 하나님께서 정성에 응답하신 걸로 여기고 계속 그분께 그런 식으로 매달린다.
그러나 그런 매달림이 씨알도 먹히지 않는 경우도 있다.
어떤 이는 아무 능력도 없는 하나님을 떠난다.
또 어떤 이는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맺는다.
그동안 얻기만을 바라고 믿었던 자신의 미숙하고 어리기만 한 의존을 벗어나, 조금씩 성숙하며 하나님의 심정을 헤아리고 그분의 편이 되어 동역하는 관계로 들어간다. 자녀가 성숙해가며 비로소 부모를 이해하고 부모의 편이 되고 돌아보게 되듯.
더는 응석만 부리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벗으로 생각과 마음을 나눈다. 그런 가운데 새로운 상상력의 공간이 생기고 그 안에 성령이 활동한다.
애초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형상을 나눠주셨다. 외형의 모습이 아니다.
언어로 세상을 만들고 가꾸신 그분 처럼, 우리도 언어로 세상을 만들어간다. 언어란 개념을 만들고, 없는 것을 상상하는 능력이다. 상상력은 창조하는 능력이다.
하나님이 본을 보여주셨듯,
우리도 언어로 새로운 개념을 창조하고, 다시 그 개념에 상상력을 더해가며 세상을 보기에 좋게 창조하는 게 가능하다. 그런가 하면, 그분처럼 스스로 있는 자로, 자신의 생을 스스로 개척하는 능력을 부여받기도 했다. 땅이 제 역할을 다해 땅을 채우듯(이 점에 대해서는 캐서린 캘러의 <지구정치신학>(대장간)을 참고하면 좋겠다.)
우리 역시 타고난 나의 본성을 아름답게 실현시킬 의무를 부여받았다. 그 의무를 행함에 즐거운 괴로움(엔도 슈샤쿠가 사용한 말이다)이 있다. 그때의 '쉽지 않지만 그만 둘 수 없게 하는 뭔가 모를 동력'이 나는 영성이라고, 배에서 흘러넘치는 생수라고 생각한다.
어쩔 수 없는 죄인이기에, "오직 주께서만이~"라며 기도할 게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나눠주신 당신의 형상으로 무엇을 해야 할까, 궁리해야 한다.
하나님을 향했던 기도를 내게 하는 것의 의미다.
이건 어쩔 수 없는 구제불능의 인간이라는 서구의 기독교교리와의 단절이다.
물론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음으로 잃어버린 게 분명 있다. 그건 어떤 이들이 알고 있는 선악 분별과는 다른 것을 전달해준다. 인간은 이미 좋고 나쁜 게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ㄱ러니 하나님도 하라 마라 말씀할 수 있었다. 그로 인해 우리가 잃은 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고 남의 눈을 의식하며 본면의 자신이 아닌 타인의 욕망을 따라 살아가게 된 것이다. 오늘 세상의 아픔이 있게 한 바로 그것. 타인의 욕망을 따라 거짓된 삶을 살아가게 된 것 말이다.
프리츠 오저의 '종교적 판단 발달 이론'(이 이론과 도널드 위니컷의 대상관계이론을 중심으로 나는 '자율적 신앙'을 정의하고, 논문 "자율적 신앙을 위한 목회자의 역할"을 썼다. 자기 자신과의 관계가 타인과의 관계,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끌어가며, 그리고 어떤 가치를 중요하게 여길 지를 결정한다. 다행인 것은 그 역도 가능하다는 점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형성되면, 나머지 관계를 바르게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기도가 관계를 형성한다. 이띠 기도란 깨비방망이와 같은 주문이 아니라 대화다. <엄마의 일기가 하늘에 닿으면>에 있는 엄마의 평생 일기는 그야말로 하나님과의 대화였다. 기도였다.)과 조너선 색스의 <랍비가 풀어내는 창세기>를 근거로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