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희의 《세 여자》(한겨레출판)을 읽고

by 조희선

독서모임에서 조선희의 《세 여자》(한겨레출판)를 읽고 생각하게 된다.

역사를 배반하지 않은 소설이다. (“역사 기록에 반하는 상상력은 자제했고, ‘소설’이 ‘역사’를 배반하지 않도록 주의했다. _ 조선희” 906),


1900년 전후로 태어나 1920년대에 20대가 된 주세죽, 허정숙, 고명자와 그들의 남자들을 중심으로 한 1920년대에서 1950년대에 걸친 한국 공산주의운동의 탄생부터 소멸까지 다룬 이야기다.

"재산도 버렸고 애인과 가족도 버렸고 더 버릴 것이 없을 때는 목숨을 버렸다." _ 책 중에서

이는 두려움도 비겁함도 없었던 치열하고 순수하고 고통스럽고 눈물겨운 그들의 생애를 표현하는 말이다.


허정숙은 ‘우직한 건 단순하고 현명한 것은 모호하다고 그리고 진실은 복잡한데 숨어 있다’고 생각했다.

"소설이란 말이죠. 인물의 심리묘사만 제대로 해도 사회적 의미를 가지는 거예요. 심리가 사회를 반영하니까. 그 안에 리얼리즘도 있고 인민성도 있어요. 소설에 그렇게 교조적인 잣대를 들이대면 톨스토이도 설 자리가 없어요. 레닌은 톨스토이를 러시아 혁명의 거울이라 했지만, 플레하노프는 그저 양심이 가책을 느끼는 귀족 작가 정도로 취급했죠. 그래서 플레하노프는 레닌이 될 수 없는 거예요. 융통성 없는 원칙주의는 중국에는 분파주의밖에 못 되는 거지요. 단순한 주의 주장으로 달려가 버리면 소설이 아니라 팸플릿이 되는 거예요. 카라마조프의 둘 둘째 아들 이반이 그런 말을 했잖아요. 우직한 건 단순하고 현명한 것은 모호하다고 그리고 진실은 복잡한데 숨어 있는 거라고."

그리고 그녀는 그의 생각대로 살았다. 허정숙은 ‘신념’을 따라 움직였고, 북에 남아 어쩔 수 없이 김일성을 따르기까지 그 안에는 단순한 이념의 선택이 아니라 복잡한 생존, 책임, 그리고 죄의식의 층위가 얽힌 삶을 살았을 것이다.


조선희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마음의 지형’을 따라간다. 살아가는 배경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인물들의 심리묘사로 과연 ‘진실이란 복잡하게 숨겨져 있음’을 알려준다. 우리는 소설 안의 실제 인물 어떤 누구도 단죄할 수 없다. 그들은 마음의 양심을 따라 고뇌하며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며 최선을 다해 살았고 모든 걸 버렸다. 그들에게 감사하고 숙연해질 뿐이다.

오늘도 우리 눈 앞에 펼쳐지는 일들이 그렇듯,

“혁명이란 처음처럼 마무리까지 정의롭고 낭만적인 것은 아니다. 혁명은 함께하고 목숨을 던질 수도 있지만, 권력은 나눠 갖지 못한다는 게 혁명세대 정치인의 아이러니였다.” 244


영화 <콘클라베>에서 감독 로렌스는 말한다. 신앙의 적은 확신이라고. 콘클라베에 참석한 추기경들이 언제나 의심할 수 있는 신앙이 되기를 바란다고. 혐오주의와 각종 혐오로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려는 기독교회, 극우와 극좌(?)들. 최근 중국 혐오와 같은 정치적 술수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이 넓어지면 좋겠다.


장지락(김산)은 그의 회고록 《아리랑》에서 강경하기만 했던 지난날의 자신을 돌아말한다.

(조형근의 《콰이강의 다리 위에 조선인이 있었다》(한겨레출판) “별 없이 걸었다 캄캄한 식민의 밤을” 302에서 재인용)

"어쩌면 옳은 것과 그른 것이란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존재하는' 모든 것은 옳은 것이 아닐까? .... 진리라고 생각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는 것은 위험하다. 자기가 틀렸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 나름의 신념과 오류를 지닌 채 행복하게 죽도록 내버려두어라. 근본적인 질문으로 타인의 영혼을 괴롭히지 말라."

“적과의 싸움에 목숨을 건 혁명가들이 동지가 밀정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몸서리를 쳤다. 의혹과 믿음 사이에서 흔들렸다.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시작한 독립 혁명의 길에서 증오가 자랐다. 미움이 서로를, 스스로를 파괴하기 일쑤였다. 사방이 캄캄한데 어쨌든 나아가야 했다. 싸우고 사랑하고 실패하고 반성하는 수밖에 없었다. 별 없이 걷는 법을 배워야 했다. 상처 입은 채 서로 연루될 수밖에 없었다. 그 걸음을 생각하다 보면 가슴이 서늘해진다.” 18번째 에피소드 “캄캄한 식민의 밤을”에서 (302)

한위건과 장지락 둘 다 서로를 밀정으로 의심했다. 장지락은 한위건의 중국 공산당 입당을 저지했고, 한위건은 베이징 국민당 정부에 체포되어 40여 일간 혹독한 고문을 받고 텐진의 일본영사관을 거쳐 신의주로 압송되어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나 베이징으로 돌아온 의심하고 비판하는 데 앞장섰다. 그러나 그들 둘 다 밀정이었던 적이 없다.


‘우직한 건 단순하고 현명한 것은 모호하다고 그리고 진실은 복잡한데 숨어 있다’는 허정숙의 생각도, ‘어쩌면 옳은 것과 그른 것이란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는 장지락의 생각도, 모두 옳고 그름을 해체‘한다. 서로 다른 시대의 많은 이가 즉 진리의 복잡성과 인간의 모호함을 인정하는 자리에 도달한다. 자신이 믿던 절대적 신념이 무너진 자리에서 비로소 만나는 인간의 진실이 이렇다.


오늘 세계정세와 한국의 나아갈 길에 대해, 뭐가 절대적으로 옳은지 모른다. 장지락의 말대로 사방이 캄캄한데 어쨌든 나아가야 하고, 싸우고 사랑하고 실패하고 반성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별 없이 걷고 있다. 세계와 그 안의 악과 선 모두에 연루되어 있기에, 그 걸음을 생각하면 가슴이 서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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