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의 세계》(슈테판 츠바이크, 지식공작소)를 읽으며
"이상과 현실, 세계주의와 국가주의 사이에" 선 증인의 역할을 생각한다.
거대한 대중의 이데올로기들,
이탈리아의 파시즘, 독일의 나치즘, 러시아의 볼셰비즘,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 최악의 흑사병, 즉 우리 유럽 문화의 만발을 가로막고 마비시킨 국가주의,
훨씬 전에 잊혔다고 믿었던 야만 상태, 반(反)인도주의라는 고의적이고 계획적인 도그마,
선전포고 없는 전쟁, 강제 수용소, 고문, 집단 약탈, 무방비 상태의 도시에 대한 공습,
이 모든 야수성!
인류가 기술면에선 예상도 할 수 없었던 성과들.
항공기에 의한 대기권의 정복, 순식간에 지구 전체에다 지상의 말을 전달하는 능력, 우주 공간의 극복,
원자의 파괴,
가장 몹쓸 병의 극복.
츠바이크가 광기의 역사에서 만난 것들을,
그의 시대와 지금까지 이어지는 인간 안에 날뛰는
'악마성'과 하느님에 가까운 "신성'을 우리도 눈 앞에 보고 있다.
츠바이크는 이와 같은
우리 생활에 대해 증언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그는 이미 스스로 죽기를 결심하고, 시대의 증인으로서의 의무를 생각하며 이 글을 썼을 테다.
"내가 지금 내 자신의 인생을 돌이켜 보면서 그것을 어떤 일정한 날로 우선 끝을 맺게 한다 해도 나는 전적으로 무의미한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저 1939년 9월은 우리 60세 된 인간들을 만들어 내고 길러낸 시대의 결정적인 종지부를 찍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우리의 증언을 통해 붕괴되어 가는 시대 전체로부터 다만 한 조각의 진실이라도 다음 세대에 전할 수 있다면 우리가 한 일이 전혀 헛되기만 한 일은 아니다."
_ 머리말 중에서
그는 호텔 방에서 자신의 책, 수기, 친구의 편지 등 어떤 자료도 없이 오직 과거의 기억에만 의존해 기록한다. 그러나 그에 대해 연연해하면서 애타하지 않기로 한다. 그는 "우리의 기억이라는 것이 어떤 것은 그냥 우연히 보유하고 다른 것은 단지 우연히 상실하는 그런 것이라고 보지는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의식하면서 정리하고 쓸데없는 것을 현명하게 줄이는 힘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람이 자기의 인생에서 잊어버리는 것은 모두 원래 내면의 본능에 의해 훨씬 전에 잊히고 말게끔 정해져 있다. 오직 스스로 남으려고 하는 회상만이 다른 여러 가지 회상에 대신하여 남겨줄 권리를 갖는다."고 한다.
우리는 아주 가까운 곳에서 부터 세계 구석구석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거의 동시에 기록과 영상으로 전달받는다.
어떤 이는 외면하고, 어떤 이는 보고도 아무런 심장의 움직임을 감지 못하고,
또 어떤 이들은 단지 구경거리로 바라보거나 참상에 오히려 동조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누구나 츠바이크처럼 이 시대의 증인이다.
이런 증인이 많아지는 그만큼 세상은 조금씩 나아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복잡하고 고된 일상에 조금은 더 평안이 깃들 수도.
에라스무스를 최초의 세계주의자라고 평한 츠바이크 역시 세계주의자로,
그의 책을 읽는 우리 역시 국가주의를 벗어나 세계주의자가 될 수 있다면 좋겠다!
어쩔 수 없이 우리 나라의 형편을 생각하게 된다.
개인의 위치, 정당의 위치, 행정책임자의 위치 ... 모두가 한결같을 수 없다.
며칠 전 <복음과상황>에서 읽은 "고통은 낭막적이지 않다" 가 떠오른다.
"우리 삶에 일어나는 고통이 자동으로 협력하여 선으로 귀결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고통 이면에는 선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의미도 이유도 없이 찾아와 우리를 파괴하는 카오스가 있으니 말이다. 고통은 우리 정신 세계는 물론이고 목숨까지 파괴할 힘을 지니고 있다. 고통을 선으로 만들 기회는 고통으로부터 살아남은 자들에게 주어지는 특권이다. 그러니 고통으로부터 어떻게든 '살아남는 것'이 먼저다." _ 홍동우
그러니, 일단 '나라(國家)'의 길이라면, 일단은 국민이 살아남게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