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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다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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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출판사, 기독교 서적 등등, '기독교'라는 제한적 단어가 들어가는 책을 읽지 않은지 꽤 되었다. 나에 대해 누구보다도 한계를 느끼는 내가 혹시나? 하며 알아가는 하나님인데, 기독교, 혹은 교회라는 틀에 내 이해를 먼저 가두고 싶지 않아서다.
단 '신', '종교'라는 조금은 포괄적인 단어가 들어간 출판물을 선호한다.
이번엔 성경의 황금률만이 아닌 역사 안에 존재했던 다양한 황금률을 살핀다.
저자가 권했듯,
대하소설 읽듯 《황금률》(권수경, 야다북스)을 읽고 있다. 대하소설은 기승전결 없이 계속해서 독자의 생각을 유연하고 자연스럽게 확장해주는 유익이 있다. 굳이 머리를 쥐어짜며 읽지 않아도 되어 재미까지 있다. 읽고 있다. 천천히 곱씹으며 읽 인류의 위대한 스승 소크라테스에 관한 부분을 옮긴다.
그리스, 이스라엘, 중국, 인도, 중동 등 어디에나 있는 황금률의 비교를 거쳐,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지 무척 기대되고 흥미롭다.
저자가 권했듯,
대하소설 읽듯 《황금률》(권수경, 야다북스)을 읽고 있다. 적어도 내가 피하고 싶은 기독교적 책은 아닌 듯하다. 대하소설은 기승전결 없이 계속해서 독자의 생각을 유연하고 자연스럽게 확장해주는 유익이 있다. 굳이 머리를 쥐어짜며 읽지 않아도 되어 재미까지 있다. 읽고 있다. 천천히 곱씹으며 읽 인류의 위대한 스승 소크라테스에 관한 부분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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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의 황금률 사고는 서양 문화의 사상적 요람인 고전기 그리스 시대에 소크라테스(470~399B.C) 플라톤 (424~348), 아리스토텔레스(384~322) 세 사람에 의해 이론과 실천 양면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40.
당시 황금률 사고를 대중적으로 확산시킨 주역들은 이들과는 관심이 달랐던 소피스트들이었다. 소피스트들은 말이 좋아 공정이지 사실은 자리 바꾸기를 권유하여 자신에게 최대한 유리한 것들을 얻어내고자 한 것이다.
그럼 세 사람의 위대한 철학자는 소피스트와 어떻게 달랐을까? 간단히 말해 친구와 원수를 구분하지 않고 모두에게 유익이 되는 보편성을 추구한 점인데 이런 사람을 선도한 사람은 수천 년 서양 지성사에서 최고의 스승으로 존경받는 소크라테스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다른 사람 자리에 설뿐 아니라 남을 자기 자리에 세우기도 했다 하여 남을 설득하기 전에 언제나 자신을 먼저 설득하려 노력했다. 대화편 《크리톤》에 보면 젊은이를 타락시켰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혀 사형을 기다리고 있던 소크라테스에게 한 친구가 다가와 탈옥을 권한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국가의 처지가 되어보자 제안한다. 자신의 행위로 피해를 입게 될 국가 자리에 자신을 세워 본 것이다. 탈옥이라는 한 사람의 범법 행위가 모두의 행동이 될 수 있음을 말해 주면서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그러니 누구에게 무슨 일을 당하든 앙갚음하거나 헤쳐서는 안 되네."
국가가 나에게 불의한 일을 했지만 내가 그걸 불의한 행위로 되갚을 수 없다는 말이다. 한 사람의 악행을 모두가 따라 할 수도 있음을 염려하는 부분에서 처지바꾸기 사고가 이미 모두가 지켜야 할 보편 규칙이 되고 있다. 《파이돈》에서는 자살의 부당성을 또 황금률 논리로 설명한다. 죽음을 앞둔 소크라테스는 자기가 죽음이 두렵지 않다 하자 친구가 그럼 왜 자살하지 않느냐 묻는다. 소크라테스의 대답은 남이 내 소유물을 내 허락 없이 함부로 할 수 없듯 신의 소유물인 우리 역시 우리 마음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신의 분노라 징벌이 두렵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의 사고를 신의 자리에 확대 적용해. 무엇이 옳은지 생각해 본 것이다. 43, 44.
'영혼 돌봄'을 철학의 목표로 삼았던 소크라테스는 고대 그리스의 이상인 덕을 추구하였는데 우선 싸워 이기는 게 덕이라 보았던 호메로스의 사고를 상호 협조의 덕으로 바꾸었다.
사람의 품성 향상에 초점을 둠으로써 오늘날 이데올로기와 탐욕에 휩쓸려 성령의 열매와 인격적 변화에 둔감한 교회를 부끄럽게 한다. 소크라테스는 더 나아가 상대적이고 상호 모순적인 여러 개념을 깨뜨리고 모두에게 언제나 적용할 수 있는 보편 개념인 이데아를 추구했다. 황금률을 다룰 때도 개인의 이익이나 너와 나 사이의 정의를 넘어 모두에게 유익이 되는 영원한 것을 목표로 했다. ... 단순한 처지 바꾸기나 공감 능력을 초월하여 황금률을 의도하는 바를 가장 원숙한 모습으로 보여주는 것은 자신의 무죄를 변론한 글이다. 제자 플라톤이 정리한 대화편 <소크라테스의 변명>에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유죄 여부를 판단할 오백 명 배심원에게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 가운데 자신의 경우를 생각하며 기분 나빠할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보다 사소한 소송 건으로 싸울 때도 배심원들에게 눈물을 흘리면서 빌며 탄원하고, 동정심을 최대한 불러일으키기 위해 아이들을 법정에 데리고 오고 친구나 친척까지도 부르는데, 저는 심각한 위치에 처해 있는 것 같은데도 그렇게 하지 않고 있으니 말입니다.
제 생각에 배심원들에게 탄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배심원 직책의 존재 목적은 호의를 베풀라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정의인지 판단하라는 것입니다. 배심원은 자기 마음대로 호우의를 베풀지 말고 법에 따라 판결하기로 서약한 사람들입니다."
처지 바꾸기를 이용해 최대한 이익을 취하려 했던 이소크라테스의 태도와는 정반대다. 소크라테스는 공감능력을 이용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황금률을 단순히 너와 나 사이의 원리로 제한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황금률을 단순한 처지바꾸기로 오해할 때 생길 수 있는 오류를 언급하면서 황금성 황금률이 진정으로 추구하는 이상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든다.
소크라테스는 배심원이 전체 사회에 갖는 책임을 설명한다. 상호성을 훌쩍 뛰어넘었다. 그렇게 배심원들을 가르치고 설득함으로써 자신뿐 아니라 배심원들을 포함한 모두에게 유익이 되는 길을 찾으려 하고 있다. 탈옥을 거부하거나 자살을 반대하는 것도 단순히 처지를 바꾸거나 신의 보복을 두려워하는 차원이 아니라 보편 진리를 향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좋은 것, 아름다운 것을 향한 추구다. ...
소크라테스는 당대의 그리스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 조그의 거리낌도 없이 사람들에게 설명한다. 자기가 만나본 지혜롭다는 사람들은 사실은 무지하면서도 그걸 모르고 있는데, 자신은 자기가 무지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소크라테스가 평생 교훈으로 삼은 구절은 델피의 아폴론 신전에 적혀 있던 문구 "너 자신을 알라!"였다. 자신을 아는 것은 결국 소크라테스 자신이 추구하던 그 이상을 아는 것이 아니었을까?
소크라테스는 그런 이상을 추구하면서도 그것이 무엇인지는 끝까지 몰랐다. 그런 한계를 알고 솔직하게 시인하였기에 소크라테스는 오늘까지 위대한 도덕 선생으로 추앙을 받고 있다. 49,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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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한 가지로 설명되지 않는다."《파이 이야기》를 읽을 때 내게 다가온 주제 중 '하나'다.
어제 본 영화 《여행과 나날》의 주제 중 하나로 내게 다가온 '낯섦'이다.
황금률은 흔히 ‘상대의 처지가 되어보는 공감의 윤리’로 이해되지만, 소크라테스가 보여주듯 그것은 공감에 앞서 자기 판단의 한계를 인정하는 태도에서 출발한다.
《파이 이야기》가 말하는 ‘하나의 설명으로 환원되지 않는 세계’, 그리고 《여행과 나날》이 건네는 ‘낯섦’은
공감에 앞서 자기 판단의 한계를 인정하는 태도에서 출발하는 황금률과 만나는 지점이 아닐까.
이 둘을 함께 품을 수 있을 때,
황금률은 도덕 명령이 아니라
자기 한계를 아는 인간의 태도로 다가온다.
그래서 이 둘을 내 안에 간직할 때, 황금률에 조금은 더 가까이 갈 수 있을까 싶다.
다 읽지 못했으나《황금률》(권수경, 야다북스)은 소크라테스와 인간 역사 전반을 소개하는 것을 주 목적으로 하는 책이 아닐 것이다. 그런가 하면 황금률이 어느날 세상과 무관하게 갑자기 예수님으로 부터 뚝딱 만들어져 하늘에서 떨어진 것 역시 아님을 말해준다.
일반 황금률의 뜻을 그대로 살리시면서 어떻게 거기에 당신의 인격과 사역을 바탕으로 새로운 뜻을 담아 생명의 말씀으로 만드신 것인지를 보여주기 위한 책이다. 우리는 이 흐름을 알 필요가 있다. 세상과 동떨어지고, 다른 것들을 배제하고 혐오의 대상만으로 여겨서는 신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역사의 흐름과 우리의 위대한 스승들에게서 배우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모든 것을 무시하고 현재의 기독교의 우월성만을 주장하는 어리석음에서 빠져나올 필요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