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멸망 외치던 내가 아기를 낳게 된 이유

인류 망하라던 사람이 왜…

by hee

나는 세상이 망해야 한다고 생각하던 사람이었다. 사는 게 너무 피곤했다.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 고생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는 했다. 일상 곳곳에서 고통이 보였다. 세상엔 너무 많은 억울함이 있고, 다들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으며, 나 또한 어쩔 수 없이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래서 디스토피아적이고, 인간의 이중성이 담긴 이야기를 참 좋아했다.


지구 환경은 점점 더 나빠지고, 지구촌 곳곳에서 민주주의가 망하거나 여성 인권이 땅에 떨어지거나 아이들이 굶어죽거나 하는 절망스러운 소식들이 들려왔다. 국내에서도 도무지 모두가 평등하고 공정하고 행복한 세계가 올 것 같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역시 인류는 망해야 돼"라는 자조를 했다. 그러면서 지구를 위해서나 인류를 위해 뭔가를 하지도 않았다.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평가했고, 그 평가 결과는 언제나 비관적이었다. 더 나아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고 언제나 어딘가로 도망치고 싶고, 여길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만 했다.


아기에게는 관심도 없었다. 아기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도 잘 몰랐다. 20대 중반에 이런 일이 있었다. 아기를 낳은 친구네 집에 다른 친구들과 함께 놀러갔다 친구가 뭔가 하는 동안 "잠깐 아기좀 보고 있어"라고 했는데, 나는 정말 아기를 쳐다보기만 했다. 친구들은 아기를 웃게 하려고 아기 앞에서 재롱을 떨었다. 나는 그게 너무 어색했다. 체면... 같은 것이었을까? 가면...이었을까? 그렇게 하는 친구들이 부럽기도 하면서도 나는 영 그 벽을 넘기가 어려웠다. 뭔가를 진심을 다해 예쁘다고 표현하고 내 감정을 드러내는 것,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올라오기는 했지만 영 낯설어 내리 눌렀다. 우리 조카들도 앉아서 몇 단어라도 말할 수 있게 되기 전까지는 한번 안아주지를 않았다. 이제 생각하면 좀 못났다.


그런데 무엇이 나를 이렇게 뒤바꿔 놓았을까. 요즘도 새삼 이런 내가 낯설다.


나도 내가 아이를 낳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불과 몇 년 전까지도. 10대, 20대 나를 알고 지낸 거의 모든 사람도, 우리 엄마, 아빠도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서른 셋에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했고, 결혼 후 약 1년 뒤, 아기를 가졌다. 심지어 계획된 임신이었다. 내가 원해서 계획하고 실행한 것이었다.


내가 살면서 아이가 갖고 싶다거나 엄마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아기를 키우고 엄마가 되는 삶이 좋아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고 이해할 수 있었던 엄마의 삶은 우리 엄마와 내 친구들의 엄마의 삶이다. 혹은 미디어에서 다루는 엄마의 삶.


엄마들은 항상 피곤하고 힘들었다. 아빠들은 철이 없거나 술을 마시거나 무능했다. 아빠에게 기대지 못 한 엄마들은 딸들에게 푸념했다. 아빠는 돈을 벌어오고, 엄마는 집에서 가정을 돌보는, 그런 전통적인 가정조차 되지도 못 했다. 엄마는 돈도 벌고 가정도 돌봤으며, 시가에서 부여되는 온갖 책임까지 떠안았다.


그런 엄마들이 결혼을 해야 한다거나 아이를 가져야 한다고 말하는 모습은 너무 설득력이 없었다. 행복하지 않은 삶을 왜 강요하려 하는지 이해가 안 됐다. 그러면 엄마들은 “아기를 키우는 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라거나 “큰 기쁨”이라고 했다.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건 자신의 피곤한 삶을 그나마 지탱해주는 잘못된 믿음, 자기 합리화라고 생각했다.


우리 집은 제사를 지냈다. 할머니, 할아버지를 중심으로 가족들이 모이면 꽤 대가족 같았다. 큰 아버지 댁, 작은 아버지 댁, 우리 집, 이렇게 모여도 집마다 애들이 둘 셋에 그 사촌들 중 아기를 낳은 집도 있으니 사람이 많았다. 명절날 큰어머니, 우리 엄마, 작은 엄마, 그리고 큰 사촌오빠와 결혼한 새언니는 언제나 편한 옷을 입고 있었다. 식구들이 먹을 음식을 만드느라 바빴다. 상은 항상 분리해서 앉았다. 뭔가 어른 같은 사람들이 한 상, 애들이 한 상, 며느리들과 아기들이 한 상을 차지했다. 나는 가끔 어른 같은 사람들이 앉는 상에 불려가기도 했다.


제사를 지낼 땐, 나는 절을 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여자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굳이 절을 했다. 별로 하고 싶진 않았지만, 그렇게 배제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나는 어쩐지 저절로 엄마를 도와 상을 차리고 치우기 시작했다. 아무도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내 눈엔 명절이 엄마의 노동을 착취하는 날이었다. 아빠의 식구들은 앉아서 맛난 걸 받아먹기만 했고 엄마들은 끊임없이 움직였다. 그런데 우리 가족은 사이도 좋고 '화목'하댄다. 누구의 화목인 걸까. 이게 가족일까. 나는 계속 의심이 들었고, 겉돌았다. 웃고 있는 가족들이 모두 위선적이라고 생각했다. 결혼 뒤 내 운명도 그렇게 남의 가족의 '화목'한 위선적 얼굴 뒤에, 보이지 않는 노동으로 가려질 것 같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게다가 임신, 출산은 내 일 같지 않았다. 나에게는 사회적 성취가 중요했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내가 배운 건 좋은 대학을 가야 한다는 것, 성적이 좋으면 누구도 건드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야망이 있었고, 성적이 좋았으며, 그게 세상의 룰이라 생각했다. 또 막연하게나마 세상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고 싶었는데, 내가 배운 역사 속에서 임신, 출산이 그런 일은 아니었다. 누구도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 누구도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회적 야망을 품은 자에게 장래희망은 엄마일 수 없었다. 엄마는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일이 아니었으므로.


사족이지만, 여기에 정말 중요한 문제가 있다고 본다. 엄마는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일이 아니다. 엄마는 위대하다고 추켜세우는 분위기가 있지만, 실제로 그런가? 우리 사회에서 사회적으로 인정받는다 함은 가정의 영역에서 이룬 성취를 의미하지 않는다. 엄마는 가정에서만 위대하다. 사회가 엄마를 하찮게 여겨놓고, 사회에 열심히 적응하고자 하는 야망 있는 소녀가 가임기가 되자 갑자기 엄마는 위대하니 애를 낳아라, 하는 건 말이 안 된다. 이 커다란 인식의 갭이 저출산을 양산하는 데 크게 일조하고 있을 것 같다.


하여튼간에. 이랬던 내가, 그 문턱을 넘었다. 생각보다 매우 쉽게.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에게 몇 가지 변화가 복합적으로 생겼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우선 평생 함께해도 좋을 것 같은 사람을 만났고 같이 살고 싶었다. 결혼하지 않고 같이 사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걸 선택하는 귀찮음을 떠안고 싶지 않았다. 더 솔직하게는, 결혼제도를 혐오하면서도 그 안에 들어가지 않으면 불안한 마음도 있었다. 또 내가 사랑하는 이 사람이라면, 결혼제도와 가부장제가 가져다주는 어려움을 최소화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결혼할까, 언제 할까, 하는 이야기를 12월에 하고는 이듬해 4월에 식을 올렸다. 상견례도 전에 우리끼리 날짜를 잡고 식장을 예약했다. 그게 구식 결혼제도에 대한 작은 반항이라면 반항이었다.


결혼생활은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거의 모든 게 좋아졌다. 물질적인 것도 마음도 한결 좋아져 이전의 나보다 덜 뾰족하고 평온한 사람이 됐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누군가 나를 진심으로 이해해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편안했다. 또 남편과 나는 신혼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함께 애자일코칭을 받았는데, 그덕에 가정에서도 끊임없이 성찰하고 대화하며 함께 성장하는 방법을 적용할 수 있었다. 사람이 섞여 지내는 일에 대해 많은 얘기를 나눴고 또 나누고 있다.


더 중요한 건, 재산이 늘었다는 점이었다. 이건 생각지도 못했던 장점이었다. 연애 시절만 해도 우리는 스타트업 나부랭이에서 코딱지만한 임금을 받거나 프리랜서로 근근히 살고 있었다. 그런데 어쩐지 갑자기 우리 둘 다 큰 기업에서 일하게 됐고 재산이 불어났다. 돈이 처음으로 남기 시작했다. 심리적 안정과 물질적 안정. 이건 임신을 결심하는 데 중요한 요인이 아니었을까 한다.


또 한 가지, 주변 환경이 변했다. 큰 회사로 옮기고나자, 전에 없이 육아인들을 많이 만나게 됐다. 남자만 많은 회사였다면 달랐을 텐데, 여자도 많은 회사였다. 나보다 열 살쯤 많은 선배들이 아기를 낳고 기르면서 회사에 다니는 모습을 지켜보게 됐다. 워킹맘이라고 하면 힘들고 피곤하기만 하고 야망은 적을 줄만 알았는데, 내가 만난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아이를 기르는 행복감을 충분히 느끼면서도 동시에 일에서도 열정적이었다. 각자 어려운 점은 당연히 있었겠지만, 가족이 주는 기쁨을 만끽하는 모습이 좋아보였다. 못 할 일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정생활의 가장 큰 레퍼런스였던 우리 가족의 모습이 나에게 좋아보이지 않았던 이유는 우리 가족이 모범적이지 않아서 그랬다기보다 30여년의 갭이란 게 너무 컸기 때문이었다. 시대가 변하면 가정의 형태도 변한다. 가족에서 의사결정권을 갖는 부모의 사고방식이 변화하기 때문이다. 요즘 시대의 부모, 내가 될 수 있는 부모의 모습과 나보다 30여년 먼저 부모가 된 우리 엄마, 아빠의 사고방식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내가 꾸린 가정의 모습과 부모님이 꾸린 가정의 모습은 굉장히 다를 것이다.


나는 그게 다를 수 있을 거란 생각을, 주변 선배들의 모습을 가까이서 보기 전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선배들이 그렇게 생활하는 모습을 지켜보니, 아기가 있는 내 삶을 그려볼 수 있었다. 내가 내 것을 포기하지 않고도 아기를 키울 수 있다는 걸 배웠다. 엄마와 내 삶은 완전히 다르다는 것도 알게 됐다. 내가 꾸릴 가정에 조금은 자신감과 기대감이 생겼다.


또, 내가 나를 좋아하게 됐다. 그러면서 타인에게도 좀더 여유가 생겼다. 나를 짓누르는 실체 없는 거대한 것들에 겁내고 초조해하기보다, 현재를 바라보는 힘이 생겼다. 그건 심리상담과, 상담 후 남편과 나눈 이야기들의 힘이었다. 3,4년 전쯤에 나는 조금만 스트레스를 받으면 현기증이 자주 심하게 나곤 했었다. 머리가 어질어질하다가 갑자기 불이 확 꺼진 듯한 느낌이 번개처럼 스쳐지나가곤했다. 숨이 턱턱 막힐 때도 많았다. 숨을 쉬는데 뭔가가 가슴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직관적으로 이건 신경과 질환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고, 지인에게 상담사를 소개받아 심리상담을 받기 시작했다.


상담실에서는 주로 어린시절이나 부모와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처음엔 내가 부모님 때문에 상담을 찾은 것도 아닌데 왜 자꾸 그런 이야기를 묻는지 의아했고 반감도 들었다. 게다가 내가 그렇게 크게 고장난 것 같진 않은데 심리상담을 계속 받아야 하나, 이게 효과가 있는 건가 의심도 많이 했다. 하지만 뭐든 금방 질려하는 습성을 누르고 하나라도 꾸준히 해봐야겠다는 결심이 들어, 일단 하는데까지 해보자고 마음을 다졌다. 그렇게 약 50번 정도 상담실에 방문했고 작년에 완전히 종결했다.


상담을 하면서는 나와 나를 둘러싼 환경을 바라보는 관점이 변했다. 상담에서 돌아올 때마다 남편과 이러저러한 이야기들을 나눴는데, 그렇게 곱씹어보는 과정이 크게 도움이 됐던 것 같다. 거두절미하고, 결국엔 나 스스로와 주변 관계에 대해 긍정적인 상을 갖고 확신과 자신감을 회복했다. 요즘에도 온갖 혐오들을 보면서 인류는 답이 없으니 망해야 된다 생각하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미약하나마 내가 할수있는 일들에 대해 생각한다. 현기증 같은 것도 싹 없어졌다.


이런 복합적인 변화가 2, 3년 사이 나에게 벌어졌다. 그리고 언젠가 문득 자연스레 아기가 갖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여러 가지 변화를 적어놓고 보니, 내가 이 변화를 인식하고 출산을 결정한 것처럼 보이긴 하지만 그건 어떤 생각이나 판단이 아니었다. 그냥 문득 그럴 마음이 들었고, 그 마음이 좋았다. 그렇게 되기까지를 돌이켜 생각해보니 이러저러한 변화가 있었던 것뿐이다. 그리고 그런 마음은 이런 변화가 뒷받침되었기 때문에 들 수 있었을 것이다.


남편은 언제나 임신, 출산, 수유 관련해서는 전적으로 나의 결정에 달렸다고 말했다. 내가 하고 싶어야 하는 것이며, 자신은 결정할 자격이 없다고. 아기가 있으면 좋을 것이고 함께 잘 키울 것이지만, 내 몸이 상해가며 낳는 것이기 때문에 아기를 낳을지는 나의 결정에 따르겠다고. 그래서 나는 정말로 그걸 원한다는 마음이 들고 나서야 결정했다.


과거에는 내가 어떤 꼬리표를 달게 되면 그 꼬리표대로 내 인생이 바뀌는 줄 알았다. 예를 들어 내가 공무원이 되면 지루한 사람이 된다고 생각하는 식이었다. 마찬가지로, 엄마가 되면 인생이 재미 없어질 거라 생각했다. 엄마가 되면 희생만 해야 하고, 아기만 생각해야 하고, 내 야망을 찾기는 어려울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꼬리표보단 내가 어떻게 살 것인지가 훨씬 중요하단 걸 안다. 과거 나의 생각은 큰 오해였다. 세상에 엄마가 수만명이라면 그 수만명의 엄마는 다 다를 것이다. 언제, 어디에 있든, 내가 나를 잃지 않으면 오히려 레거시를 바꾸는 데 힘이 될 수 있다.


이런 마음의 여정을 거쳐, 나는 나의 후손에게 나의 시대보다 더 나은 이야기를 전해줄 수 있다는 자신감 같은 게 들었다. 작고 귀여운 나의 후손에게 내 경험과 이야기를 전해주고 싶었다. 그냥 어쩐지 생각만으로도 소중하고 벅차오르는 그런 존재에게 큰 사랑을 주고 싶기도 했다. 언젠가는 인류가 멸망할 수도 있겠지만, 그리고 세상의 일부는 여전히 절망적이겠지만, 그럼에도 삶의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세상을 비관하던 내가 결혼제도에 뛰어들었고, 아기를 낳았고, 남편과 아기 세 식구가 함께 우리만의 삶을 꾸리고 있다. 아직 세 사람이 서로 완전히 적응하지는 못 했다. 그중 한 사람은 아직 말도 못하는 사람이다. 앞으로 더 많은 시간이 우리 앞에 있고, 더 많은 일이 닥치겠지만, 잘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아기의 웃음에 바보처럼 헤- 웃고 있는 우리 부부를 보면, 그냥 그런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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