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몬 전쟁에서 살아남은 여자들과 엄마

by hee

임신, 출산 기간은 호르몬과의 전쟁 기간이다. 사람은 원래 호르몬의 영향을 받기는 하지만, 이 기간엔 평소와 달리 높아진 임신 호르몬의 영향으로 임신 전의 나와 다른 사람이 될 때가 있다. 전반적인 컨디션뿐 아니라 감정까지 널뛰기를 한다. 특히 평소엔 감정 기복이 크지 않은 나인데, 이 기간 정말 당황스러운 일이 여럿 있었다. 임신 기간 대표적인 일로는 메론빙수 사태가 있다.


엄마들은 꼭 임신 기간에 너무 먹고 싶은데 못 먹었던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씩 갖고 있다. 특히 남편이 먹고 싶은 걸 안 사다주면 두고두고 생각에 남는다고, 그런 얘기를 많이 들었다. 그런데 막상 임신을 하고 보니 먹고 싶은 건 대부분 사 먹을 수 있었다. 엄마 세대 때만큼 먹을 걸 구하는 게 어렵지 않기 때문인 것 같았다. 인터넷으로 주문하면 다음날 먹을 수도 있었고, 바로 배달해 먹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먹고 싶은 게, 뭔가, 고등학교 2학년 광복절에 학교 앞 일미분식에서 친구들이랑 먹었던 떡볶이, 같은 너무 구체적인 것이 아니라면 조달이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임신 기간 내내 먹고 싶은 게 거의 없어서 더 고생이었다. 뭘 먹어도 맛있지가 않아서 입맛도 없었다. 한동안은 참기름, 참깨, 깻잎 냄새, 어떨 때는 고기 기름 냄새 같은 게 너무 역했다. 이 기간 입맛이 없는 것은 그냥 평소에 컨디션이 안좋아 입맛이 없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불쾌감이었다. 입에 항상 무슨 필터가 끼어서 내 미각을 통제하고 있는 것 같았다. 뭔가를 먹으면 구토를 하는 심한 입덧은 임신 4개월 무렵 저절로 사라졌지만, 먹어도 맛이 없고 먹고 나도 기분이 안좋은 상태는 출산 전까지 계속됐다. 입덧이 심할 때는 게토레이밖에 먹지 못 했는데, 게토레이도 토했다.


내가 겪은 이 입맛없음 증상은 입덧 증상 중 하나인데, 입덧의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hCG라는 호르몬이 감소하면 입덧도 저절로 사라지는 것으로 보아 이 호르몬의 영향인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hCG호르몬은 수정란 착상 후 점점 증가해 임신 4개월쯤이면 줄어든다. 또 입덧 증상은 사람마다 많이 다르다.


여튼 그래서 나는 먹고 싶은 걸 안 사다줘서 서운할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세상에 마상에 그런 일이 일어났다.


임신 기간에 진짜 딱 두 개, 너무 고난이도의 당김이 있었는데, 바로 백도와 메론빙수였다. 아마 2월쯤이었을 게다. 그리고 나는 심지어 그 두 가지가 먹고 싶다고 생각해본 적이 임신 전에는 거의 없었다.


검색을 해봤다. 복숭아는 하우스 복숭아조차 나오지 않기 때문에, 아쉽지만 가슴에 고이 묻을 수밖에 없었다. 메론빙수 또한 철이 아니었다. 메론은 출시가 되긴 했지만 한 수에 4만원이었다. 빙수 업체가 판매를 할 수 없는 가격이었다. 몇 만원이라도 지불할 생각으로 호텔 빙수까지 찾아봤는데, 정확하진 않지만 제주 신라에서 하는 것도 같았다. 제주 신라… 코로나 시국에다 조산 위험으로 휴직까지 하고 있던 임산부가 쉽게 움직일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문제는, 메론은 구할 수 있었으므로 백도처럼 쉽게 포기가 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문제가 애먼 남편한테 가서 터졌다. 메론빙수가 먹고 싶다고 남편한테 이야기했는데, 남편은 검색을 좀 해보더니, 아직 출시되지 않았다며 매우 안타까워했다.


안타까워하는 것.. 그게 정말 문제였다. 그게 끝이라는 사실이 갑자기 굉장히 섭섭해지는 것이었다. 메론을 사다가 만들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왜 거기까지는 치열하게 생각하지 않는 거야? 만드는 법을 찾아보는 열정은 없는 거야? 인터넷을 찾아보니 레시피도 엄청 많았는데!


나는 평소에 그런 사람이 아니다.. 차라리 빙수를 만들어줘, 라고 말한다. 우리 남편이 빙수를 만드는 사람도 아니고, 메론빙수가 먹고 싶은데 팔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한발 더 나아가 내가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나서서 만들어주겠다고 하는 일까지 나는 기대하지 않는 사람이다. 심지어 메론빙수는 평소에 질 만들어막는 메뉴도 아니다. 누가 나한테 그렇게 알아서 자기가 원하는 걸 해결해달라고 하면 싫다. 그리고 내가 싫은 걸 다른 사람에게 요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땐 그게 진짜 너무 섭섭한 마음이 드는 것이었다. 동시에 그 마음이 낯설고 좀 웃기기도 했다. 그래서 너무 섭섭하다고 세상이 망한 것처럼 울면서, 동시에 이런 말하는 나도 너무 웃기다고 웃으면서, 메론빙수가 먹고 싶으니 만들어달라고 했다.


평소와 다른 나의 패턴에 잠시 당황한 듯 했으나, 남편은 미안하다며 바로 연유를 사왔고 우유를 얼리고 으깨서 결국 메론빙수를 만들어줬다. 그리고 그 빙수는 정말 맛있었다. 나중에 아기를 낳고 여름이 되어 빙수 프랜차이즈에서 메론빙수를 결국 먹었는데, 남편이 만들어줬던 것이 훨씬 맛있었다. 메론을 볼 때마다 그때 생각이 난다. 그리고 추가로, 올 여름, 백도를 집착적으로 먹었다는 후문..


출산 후 호르몬의 널뛰기는 더 심각했다. 출산 후 한 일주일 동안 매일 감정 붕괴 상태가 벌어졌다. 하루는 슈퍼파워를 얻은 것 같았다가 다른 하루는 내가 세상 쓸모 없어진 것처럼 우울해졌다.


이때도 평소의 나같으면 안 그랬을 일이 몇 개 있었다. 조리원 신생아실을 지나가는데, 우리 아기가 딸꾹질을 하고 있는 게 보였다. 그런데 신생아실 간호사들은 좀 바빠보였다. 나는 아기가 혼자 딸꾹질 하고 있는 게 세상 속상해서 혼자 대성통곡을 했다. 또 하루는 출산 후 잔뜩 부어 있는 다리를 보다가, 발목까지 부어버려서 발목이 없어졌다며 통곡했다. 또 내가 너무 못생겨진 것 같다고 울고, 남편이 이제 나를 별로 신경 안쓰는 것 같다고 울었다.


며칠 뒤에는 조리원에서 좀벌레 한 마리가 나왔는데, 그것 때문에 또 한바탕 난리가 났다. 그 전날 먼저 퇴소한 남편한테 전화해서 벌레가 나왔다고 짐가방에 좀벌레가 묻어서 집에 따라들어간 거 아니냐고 난리를 쳤다. 대성통곡하느라 말도 제대로 못했다. 벌레가 흑 집에 흑흑 간거 흑 아니야 흑흑 어떡해 흑흑. 조리원에도 벌레 사진을 보여주면서 당장 퇴소하고 싶은데 산후관리사를 못 구해서 못 간다고 했다. 뭐 그덕에 조리원 실장이 좀 더 신경 써주셔서 머무는 기간 중 약 반절은 무료로 지낼 수 있기는 했다.


벌레가 나오면 놀라는 게 당연하긴 한데, 그당시 나의 감정상태는 좀 정상이 아니었다. 그냥 벌레 한 마리잖아.. 나는 100가구도 안 되는 시골 마을 이장 딸이다. 고등학생때까지는 벌레 나오는 농가주택에서 살았다. 그냥 벌레 한 마리라고.. 그 다음날, 그 다다음날엔 벌레가 그렇게까지 막 걱정되지도 않았고, 점점 더 퇴소하고 싶은 마음도 사그라들었다. 수유콜 갔다가 방에서 혼자 넷플릭스 보고 간식먹고 누워 있는 게 너무 편하고 좋아졌다. 평소의 나로 돌아왔다는 느낌이 들어서, 그 전날 벌레로 난리친 게 좀 민망했다. 남편한테도 조리원 실장한테도…


이건 산후 우울감이었던 것 같다. 산후우울감은 출산 직후 호르몬 불균형 때문에 생기고, 산모의 70% 이상이 경험한다. 이는 자연스레 사라지지만, 우울감이 사라지지 않으면 우울증으로 발전한다. 나의 우울감은 출산 후 일주일 정도 지나 어느 순간 지연스레 사라졌다.


인류가 지금까지 번식할 수 있었던 건 이 호르몬 전쟁을 견뎌낸 수많은 여자들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그런데 아기를 낳는 것에 관해, 아기를 직접 품고 낳는 여자들의 몸에 대해서는 나는 직접 경험하기 전까지는 까마득하게 무지했다. 그래서 매번 닥치는 몸의 변화, 그로 인한 마음의 변화가 당황스러웠다. 그냥 난자와 정자가 만나고 위대한 생명이 탄생한다는 무미건조한 스토리, 그 안에 실제 몸의 일부를 내어주는 인간은 배제된 영양가 없는 스토리만이 임신, 출산에 관한 지식의 전부였다. 생각할수록 그 부분이 좀 억울하다.


예전에 대학 친구 한 명이 아기를 낳고 뭔가 계속 억울했다고 했던 기억이 있다. 남편도 잘해주고 시가도 좋고 애들도 좋고 다 좋은데도 억울한 마음이 든다고 했다. 오, 이제사 그 얘기가 다시 떠오르며 공감한다. 나도 같은 기분이었다. 나에게는 가부장제에서 살아가는 많은 여성들에게 닥치는 어려움이 적은 편이다. 그런데 억울하다, 억울하다. 어떻게 아기를 품고 낳는 경험이 이토록 철저하게 인류의 경험이 아닌 여자의 경험에만 갇혀 정상적인 인간의 경험으로 전수되지 않고 있는 것인지, 그 부분이 가장 억울한 것 같다. 이 경험을 체계화하고 이야기하고 연구하기 전에 '이성’에 몰두해온 세계가 좀 밉다. 온 인류가 여자의 임신과 출산에 빚을 지고 있는데, 임신, 출산의 경험은 전부 여자의 경험이 아니고 인류의 경험이어야 하지 않은가? 솔직히 우리 사회는 인구 감소를 당해도 싸다.


하지만 억울함도 잠시… 호르몬은 또 위대한 일을 한다. 다른 모든 걸 뒤로 하고 아기를 안고 만지고 보듬을 때 깊은 사랑을 느끼게 만든다. 아기의 온갖 요구를 들어주게 하고, 밤잠을 설쳐도 아침에 천진한 아기 얼굴을 보면 따라서 웃게 만든다. 졸려 죽을 것 같은데 아기가 웃으면 나도 헤벌레 웃고 만다. 어쩌면 나는 엄마여서 아기를 사랑한다기 보다 그 지독한 호르몬이 나를 아기를 사랑하는 엄마이게 만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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