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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섭섭 Sep 07. 2015

일 년에 두세 달이 화창할 뿐

#1

“우리는 히피다. 집이 없이 사는 사람을 히피라고 한다.”

“뭐, 대충 홈리스랑 비슷한 거 아닌가?”     

토마스가 땅속에서 잘 익은 당근을 하나 뽑아 올린다.

“요즘 사람들은 음식이 슈퍼마켓에서 나오는지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 봐라. 음식은 땅에서 나온다.”     

당근을 한입 베어 물고는 허세까지 부린다.

“우리는 왕이다. 왕처럼 먹고 왕처럼 논다.”   

  

나도 따라 당근을 하나 뽑아 올린다. 

당근은 땅에서 나온다. 

한입 베어 물자, 당근에서는 땅의 맛이, 천국의 향이 난다.


#2

“어떻게 하루도 쉬지 않고 파티를 벌일 수가 있나요. 오늘은 좀 쉽시다.”     

기분 좋은 나의 투덜거림에 셀리나가 둘러댄다.

“캐나다의 여름은 아름답다. 그러나 매우 짧다. 일 년에 두세 달이 화창할 뿐, 나머지 날들은 춥고 우중충하다. 여름을 아쉽게 보내면 일 년이 전부 엉망이다. 지금 즐겨야 한다.”


티셔츠를 훌러덩 벗더니, 호수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한참을 나오지 않는다.


#3

그들을 처음 만난 날은 캐나다의 여름이 한창이던 칠월의 세 번째 금요일. 나는 영문도 모른 체 그들을 따라 동네 파티에 참석했다. 

그렇지, 동서고금. 불금이구나!

토요일 오전엔 잠깐 밭에서 일을 하는가 싶더니 점심을 먹자마자 해변으로 간다. 해가 질 때까지 수영하다 누웠다, 누웠다, 수영하다를 반복하더니, 파티를 한다. 동네 사람들이 하나 둘 모인다. 양손에 와인을, 바비큐 도구를 들고, 빵과 샐러드와 수박을 들고, 기타와 북을 들고…

이것이 주말이지!

     

일요일엔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잠을 자더니 점심을 먹자마자 해변으로 간다. 해가 질 때까지 수영하다 누웠다, 누웠다, 수영하다를 반복하더니, 역시나 파티를 한다. 동네 사람들이 하나 둘 모인다. 양손에 맥주를 들고, 살구와 자두와 체리를 들고, 바이올린과 피리를 들고….

3일 내내 이렇게 놀아버리면, 월요병은 어떻게 감당할까...

     

어라, 월요일도 똑같다. 

이들의 생활계획표는 화요일에도 수요일에도 변하지 않는다. 내가 함께 한 한 달 동안 이들의 하루 일과는 고정이다. 이들의 밤은 언제나 금요일이고, 이들의 낮은 언제나 토요일이다.


#4

후에 만나는 세상 사람들에게 이 가족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재밌네, 정말 히피구나. 근데…. " 

"근데…. 그 사람들, 아이들 학교에 안 보내지? 아이들에겐 좋지 않을 거야." 하고 반응한다.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다. 가치를 판단하는 것은 나의 몫이 아니며, 그들에게 좋은 게 무엇이고 안 좋은 게 무엇인지 도무지 알 방도가 없다. 

그러나 한 가지, 내가 이제까지 살며 만난 아이들 중 가장 행복해 보이는 이들은 그곳, 캐나다의 한 지명 없는 마을, 오아시스 팜에 살고 있었다는 사실 하나는 분명하다.


#5

캐나다 브리티시 콜롬비아 주 교외엔 반가운 야생동물이 많다. 

한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아기 사슴, 줄지어 차도를 건너는 메추라기 가족, 오카나간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아 물고 우아하게 하늘을 나는 대머리 독수리….

그중에서도 가장 반가운 야생동물은 멸종 위기에 처한 것으로 알려진 이들, 히피. 어쩌면 이들은 지상에 마지막으로 남은 히피의 자손들이었는지도 모르겠다. 


#6

이 종족이 그렇게 대책 없이 놀기만 하는 건 아니었다. 

포도, 자두, 살구 등 다양한 종류의 과일과 당근, 감자, 오이, 토마토, 호박, 옥수수, 고추 등의 채소를 재배하고 수십 마리의 닭과 다섯 마리의 말이 있는 농장을 가꾸는 사람들이었다. 나름 일을 할 땐 열심히 하는 농부들이었고, 그들과 함께 지내며 내가 한 일도 그 농장 일을 돕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생활은 일 보다는 놀이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고, 그건 너무나 당연한 일처럼 보였다. 일은 놀이를 위한 수단일 뿐. 팔아서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성 들여 재배하여 신나게 먹고 놀기 위해 그 큰 농장을 꾸리니, 이들에게 놀고먹는 일이란 게 얼마나 중요한지.


#7

캐나다의 여름은 짧다. 일 년에 두세 달이 화창할 뿐, 나머지 날들은 매일 춥고 우중충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여름을 즐기지 않으면 안 된다고, 이 종족은 말한다.

그러나 나는 이들이 가을과 봄, 겨울을 어떻게 보낼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겨울엔 어떻게 지내나 확인하러 올 겨" 하는 미적지근한 작별 인사를 남기고 한 달간 지내며 정이 많이 든 오아시스 농장을 떠났다.


나의 다음 계절이 어떠할지를 그려보는 일도 잊지 않았겠다.  


"Happiness is in the doing, 

not in the getting what you wa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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