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은 양달의 벤치에 가만히 앉아 있기가 아직은 조금 뜨겁게도 느껴지고, 일주일에 한 번쯤 비가 내리는 날에는 옷깃을 여며야 하기도 한다.
대체로 볕이 따사롭고 바람은 선선하다. 계절이 날짜에 의해 분할되는 것인지 기온이나 기상 따위에 의해 규정되는 것인지 잘 모르겠으나, ‘가을엔 항상 기분이 좋았다.’ 하고 생각해보면 뉴욕의 시월은 더할 나위 없는 가을.
맨허튼의 Upper East, York Avenue, 79th street의 작은방, 지인의 아담한 스튜디오 바닥에 빈대처럼 침낭을 깔고 지내는 이곳이 에콰도르 5달러 골방의 눅눅한 침대보다 낫다고 말할 수도 없겠으나, 세상의 중심이라고들 하는 곳에서 매일 밤 몸을 누이는 기분이 썩 나쁘지만도 않다.
돈 그거 아무 소용도 없는 기라/돈 마이 벌면 머할낀데/
소고기 사묵겠지/소고기 사묵으면 머할낀데/
힘이 나가 일 열심히 하겠지/일 열심히 하면 뭐할낀데/
돈 마이 벌겠지/돈 마이 벌면 머할낀데/기분 좋아가 소고기 마이 사묵겠지/소고기 마이 사묵으면 머할낀데…/
얼마 전 우연히 한 개그 프로그램의 블랙코미디를 보고는 한참 웃었다.
그러고는 분주한 맨허튼 거리를 나도 모르게 분주히 걷다가, 잠시 멍-해지고 말았다.
출근 시간대의 지하철역이나 퇴근 시간 5번가의 어느 횡단보도에 가만히 서서 이방인의 눈으로 뉴요커들의 종종걸음을 멍하니 보고 있노라면, “내가 여기서 뭐 하는 짓인가” 하는 생각이 들다가, 이내, “그나저나 저들은 여기서 뭐 하는 짓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맨허튼의 아무 사거리에 가만히 서서 신호등을 몇 차례 흘려보내고 있노라면, 입을 굳게 다물고 흰색 페인트 검은색 페인트 가리지도 않고 바쁘게 길을 건너는 뉴요커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런 괜한 심술이 나는 것이다.
‘아, 저 사람들 또 소고기 사 먹으러 가는구나.’ 하는.
<말테의 수기>에서 릴케는 파리를 이렇게 묘사하지 않았던가.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여기로 몰려드는데, 나는 오히려 사람들이 여기서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한 세기 전 파리가 그에게 있어 견딜 수 없었던 도시였던 것처럼, 누군가의 드림시티 뉴욕도 나에겐 사람들이 금방이라도 죽어 나갈 것 같은 곳으로, 삐딱하게만 보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