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주혜쌤, 5분 후에 교사실에서 회의한대요.”
주혜는 미간에 모인 눈썹을 순식간에 헤치며 대답했다.
“네, 곧 갈게요!”
씩씩하게 대답한 목소리와 달리 영 밝지 않은 표정으로 앞으로 1년간 쓰게 될 교실을 둘러보았다. 머릿속으로 대학생 때 배운 정적 영역과 동적 영역을 분리하며 열심히 영역을 구성하려는데, 개원한 지 6년이 다 되어가는 교실 상태는 빈말이라도 깨끗하다고 말할 수 없는 상태였다. 노트북 포맷처럼 깨끗하게 비워달란 것도 아닌데, 그래도 휴지통 비우기 정도는 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과부하 걸린 서랍장은 열기도 전에 내용물을 쏟아내기 직전이었고, 교구장에는 먼지에 자리를 잃어버린 교구들이 아이들 대신 놀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하는지 엄두도 안 나는 이 상황 속에서 성실히 자기 일을 하는 시계 긴 바늘은 어느새 1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아 맞다! 회의!”
부리나케 2021이 은빛 자수로 큼직하게 박힌 다이어리와 삼색 볼펜을 들고 교사실로 향했다. 사실 주혜가 사용하는 다이어리는 신입 교사 오리엔테이션 때 원장님이 선심 쓰듯이 준 투박한 디자인의 다이어리가 아닌, 카페마다 매 시즌 한 벽면을 알록달록 채우는 기획형 상품 다이어리다. 벚꽃과 카페 특유의 로고가 그려진 다이어리를 샀는데, 어쩐지 공과 사를 구분해서 ‘공’인 유치원 일은 이 예쁜 다이어리에 한 줄이라도 적고 싶지 않아서, 유치원에선 원장님이 준 그 투박한 다이어리를 사용하기로 했다. 나름대로 유치원 교사로서 임주혜와 인간 임주혜를 철저히 나눠 워라밸을 지키고자 했던 의지라고나 할까? 그리고 고등학교 때부터 쓴 귀여운 미피가 그려진, 열가지 색이 있는 뚱뚱한 볼펜 대신 삼색 볼펜을 택한 건,
“이거 설마 미피냐?”
카페에서 열심히 다꾸(다이어리 꾸미기)를 하던 내게 지영은 ‘이게 죽지도 않고 살아 돌아왔구나’하는 얼굴로 주혜의 소중한 볼펜을 바라보며 말했다. 딸깍딸깍 10가지 색깔을 바꿔가며 다꾸에 열중하던 주혜가 지영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응, 왜?”
“이거... 왜 써?”
생각치도 못한 질문이었다. 그냥... 10가지 색깔이나 있어서? 아니면 미피가 귀여워서? 그것도 아니면 손에 익어서?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고민하는 사이에 지영이 한 마디 덧붙였다.
“너 설마 지훈이가 선물해준 거라서 쓰는 거야?”
맞다. 이건 고등학교 때부터 미피 펜만 쓰던 내게 전 똥차인 지훈이가 100일 선물로 줬던 펜이다.
‘네가 미피 펜을 좋아하니까, 선물은 상대방이 좋아하는 걸로 하는 거잖아’
지금 그게 말이냐고 되묻고 싶은데, 푹 패인 보조개를 남발하며 내가 준비한 닥스 지갑을 쏙 가져가던 똥차를 생각하면, 아직도 이가 갈렸다. 그 뒤로도 미피는 죄가 없다며 미피 펜을 고수했으나, 지영이 덕분에 생각난 쓰라린 기억에, 미피는 고민도 없이 쓰레기통을 향해 몸을 던졌다. 이런 미피 십색...
교사실에는 다소 어수선한 분위기가 맴돌았다. 남는 공간으로 만들었나 싶을 만큼 작은 교사실에서 그나마 넓은 자리는 원감 원감이 차지했고, 교사 수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PC와 프린터, 그리고 6년간 유치원의 역사를 보여주는 다양한 두께의 파일들이 제 자리를 고수하고 있었다. 좁은 자리를 비집고 들어가 입사 동기인 현주 옆에 앉았다. 입사한 첫날 본 게 다였지만, 주혜 혼자 동질감을 바탕으로 내적 친밀감을 쌓았기 때문이다. 현주는 주혜보다 4살 위지만 경력은 7년이나 많은 베테랑 교사였다. 4살 차이지만 경력이 거의 2배나 차이나는 현주를 보며 주혜는 자신이 왜 ‘나이 많은 신입’인지 알게 되었다. 일반적인 사회에선 26살이 한창 신입으로 입사할 나이인데,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서 26살이면 경력자로 이직할 나이라는게 새삼 불편한 진실에 기분이 이상했다.
아직 신입 교사와 기존 교사가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아 미묘하게 어색한 공기가 맴돌았고, 발언권이 센 교사는 개원 멤버인 여은. 현지, 화림 뿐이었다.
“그래서 신학기 회의는 언제 한다는 거에요? 5분에 한다고 해서 환경 구성하다가 뛰쳐 내려왔건만”
여은이 볼멘소리로 말했다.
“원장님 통화 중이시던데, 얘기가 길어지나보다. 조금만 더 기다려봐. 다들 환경 구성은 다 되어가지? 올해 수업일수가 모자라서 수료식을 조금 늦게 잡았어. 그러니까 새학기 준비 부지런히 해야해”
“아니, 새학기 준비 시간을 최소 3일은 줘야하는 거 아닌가요? 새학기 준비를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하는 곳이 어딨어요.”
여은이 턱을 괴고, 시선은 다이어리에 둔 채 툴툴거렸다. 여은과 같은 개원 멤버인 선화도 옆에서 거들었다.
“원감님, 들어온 서류 분류하고, 또 학기 시작 전에 전화도 돌려야 하고, 가방장, 옷걸이 등 이름표도 붙여야 하는데, 회의 나중에 하면 안 될까요?”
“아참, 너네 유아학비카드 다음주에 유아수첩 앞에 테이핑해서 나가야한다!”
원감이 불현 듯 생각난 유아학비카드에 대해 이야기하곤, 여은과 선화를 바라보며 특유의 익살스런 말투로 대답했다.
“이게 또 새학기의 묘미 아니냐, 이렇게 휘몰아치듯이 바쁘고 나면 또 한동안 잠잠하잖니”
서류 분류, 전화 돌리고, 이름표 붙이고... 당최 어떤 일인지, 노동의 강도는 어떤지 등 가늠이 안 오는 초임교사 주혜는 왜 대학교 때 그 누구도 새학기 준비에 대해 알려주지 않았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그놈의 피아제나 비고츠키말고 예쁜 이름표 도안 찾는 법이라든지, 학부모와의 첫 통화 팁이라든지... 이런 거나 알려줬어야 하는 거 아닌가하는 강한 불만을 뒤로한 채, 옆에 앉아 다이어리에 오늘 해야 할 일을 체크리스트로 만들고 있는 현주에게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