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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nest Jul 26. 2020

얼마나 있어야 행복한가

가오라도 있는 삶을 살기 위하여

며칠 전 퀴즈 프로그램을 보는데, '얼마나 있어야 행복한가요?'라는 질문이 나왔다. 쓸데없는 잡상을 많이 하는 편인 나는 그 질문에 대한 답도 오래전부터 생각해 왔는데, 나의 대답은 대략 100억 정도부터 다다익선이라는 쪽이었다. 왜 다다익선인가. 내게 꼭 그 많은 돈이 필요해서가 아니다. 돈이란 가치를 저장하고 교환하는 수단이기 때문에 돈이 정말 많다면, 세상에서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들에 우선권을 부여할 수 있다. 다 내가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 내게 돈이 많다면 내가 생각하는 가치 위주로 자원을 재분배할 수 있다는 뜻이다. 가끔씩 빌 게이츠를 보면서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한다. '정말 개 같이 벌어서 정승 같이 쓰는구나'. 사업가로서의 빌 게이츠는 결코 지금처럼 멋진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번 돈을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치 위주로 배분하는 데에 아주 적절하게 쓰고 있다. 최소액이 100억인 것은 내가 장학재단을 설립하기 위한 최소 자본금이다. 그러고 보니 결국 이 또한 내 나름의 가치 배분에 다름 아니구나. 나라는 사람은 내가 생각하는 가치의 우선순위를 상당히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슬프게도 아직 마흔조차 되지 않은 나는 내 인생을 실패한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어렸을 때는 꿈도 목표도 확실한 사람이라고 여겼었는데, 알고 보니 모두 사상누각이었다. 그리고 내게는 어떤 끈기나 고집도 없었다. 어려움을 많이 겪지도 않았지만, 어려움에 부닥칠 때마다 핑계와 도망갈 길을 찾기 바빴던 것 같다. 그때 내게 핑계나 도망갈 길이 되어 준 가장 큰 이유는 다름아닌 '소신'이었다.


이 무슨 엉뚱한 말인지 모르겠다. 세상에 '소신'을 핑계로 어려움에서 도망치고, 꿈과 목표를 버리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런 사람이 여기 있다. 우리는 살면서 자신의 꿈과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그 과정에서 부딪치는 문제들을 쉽게 간과해 버리는 사람을 자주 맞닥뜨린다. 결국 이 또한 나의 자기합리화에 다름아닐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도저히 그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작은 것과 타협하는 사람은 나중에 큰 것과도 타협하게 된다. 한 번뿐인 인생,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내가 쫓고 싶은 가치를 쫓으며 사는 것 아닌가. 물론 참고 견뎠을 때, 먼 훗날 더 큰 보상과 권한이 주어질 수 있을 것이라는 점 또한 나는 모르지 않는다. 그런데 부끄럽게도 나는 그때까지 내가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이 없었다.


공부라는 꿈을 포기할 때, 물론 내가 이걸 계속해서 먹고 살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도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내 맘대로, 나의 의견을 마음껏 펼칠 수 없다는 것이 가장 컸다. 내가 생각하는 방법론에 의해, 내가 그려 왔던 이야기들을 실컷 하고 싶었는데, 그 방법론은 옳지 않고 지금은 다른 사람들이 하는 표준에 따라서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쉽게 납득할 수 없었다. 심지어 공부는 '내돈내하'(내 돈 내고 내가 하는 것) 아니던가. 군대를 왜 장교로 다녀왔냐고. 이것 또한 내가 병사로 갔을 때 살아서 가서 살아서 나올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이 전혀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작은 조직이라도 내 가치 순위에 따라 내가 책임지고 변화를 만들어 보고 싶었다. 물론 사람은 어느 자리에서나 주위를 변화시킬 수 있다. 그러나 말단 어딘가에서 하는 것보다는 내가 책임자가 되었을 때 더 많은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내가 가장 힘들었던 때는 나의 판단과 다른 명령을 내려야 했을 때고, 이때 나는 군대라는 장소와 맞지 않게 선배들과도 엄청 많이 부딪쳤다. 심지어 선배 장교로부터 마음의 편지를 받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나의 미래에 대해 축복하는 말을 아끼지 않고 해 주지만, 솔직히 마흔이 낼모레인 나는 내 삶이 앞으로 크게 나아지지 않을 것이며, 달라지지도 않을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부끄럽게도 내게는 많은 친구들이 가지고 있는 지위나 명예는커녕 돈조차도 별로 없고, 그렇다고 해서 남들이 납득할 만한 엄청난 논리의 대가인 것도 아니다. 그래서, 대신에 잃을 것이 많지 않은 나는, 늘 나의 소신껏 할 말은 하고, 내가 생각하는 가치 위주로 다른 사람들과 타협하지 않는 삶을 살려고 한다. 비웃을 수도 있겠지만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라고 해서, 지킬 것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는 자신이 가진 작은 권한에 집착하고 그로 인해 비굴해지는 사람도 많이 보았다. 그런 광경을 볼 때면 친구, 형제가 잘난 것에 많이 감사하게 된다. 나 스스로가 '고작 저 정도에?' 하고 생각하고 나면, 좀 더 초연해지고 담담해질 수 있다. 물론 이조차도 '너는 그조차도 못 가지는 것 아니냐?'라는 소리를 들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나마 다행인 것이 내가 물질적으로 많은 욕심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반면 알뜰한 쪽으로는 최적화되어 있어서 만나는 사람은 많고, 벌이는 적어도 큰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 편이다. 오죽하면 내가 '살까 말까 할 때는 사야 하는 사람'이라고까지 생각하겠는가. 대개 '살까 말까 할 때는 사지 마라'고 하지만, 내게는 그런 경우조차 잘 없기 때문에 웬만하면 '살까 말까 할 때는' 사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물론 나도 사람이니 좋은 것을 좋아하고, 비싼 음식 먹으면 맛있고, 좋은 곳에 가면 신난다. 그러나 적당히 좋은 것, 적당히 맛있는 것, 적당히 좋은 곳만 가도 충분히 만족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으로서 살아가야 하기에 물질이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슬프게도 나는 사람들에게 '경제적으로 불임'되었다고 이야기하고는 하는데, 그것은 만약 내게 아이가 있을 때도 내가 지금처럼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고, 내가 지키고 싶은 가치를 지키며 소신껏 살아갈 수 있을지에 대한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이런 사람도 있다. 만약 내가 내 스스로의 소신을 충분히 지키고 살아갈 수 있을 정도의 재물이 있다고 여긴다면, 나 또한 나의 2세를 만날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번 생에서는 힘들지 싶다.




한때는 나도 가지고 싶은 것도 많았고, 올라가고 싶은 자리도 넘쳤다. 얼마큼 모아야지, 언제는 어느 자리까지 올라가야지 하는 꿈도 많이 꾸었다. 그때라고 해서 내게 가치나 소신이 없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군대에 갔을 때처럼 아마도 더 높은 자리에 오르면, 더 많은 것을 가지면 내가 할 수 있는 것, 나의 가치와 소신을 더 많이 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졌었다. 그리고 그것이 꼭 틀린 것도 아니다.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으면서 어렸을 때와는 다르게 책임져야 할 것도 늘어났고, 세상 일을 내 소신과 가치판단대로만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면서 조금씩 포기하는 것이 많아졌고, 무엇보다 나는 어렸을 때의 내 꿈과 목표를 버렸다. 물론 내가 겪었던 어려움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비겁했고, 또 그런 이유로 타협할 줄 몰랐다. 그래서 '소신'이라는 미명하에 꿈과 목표를 던져버렸던 것이다. 누구도 강요한 결정이 아니었다.


어쩌면 이제 하나 남은 알량한 자존심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가진 것이 없는 지금 도리어 나는 그래서 단단해졌다는 느낌도 든다. 나는 이제 지위도, 명예도, 돈도 특별히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정말 나의 소신껏 살 수가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지금 내가 가진 작은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닐 터다. 그러나 잘난 친구, 형제를 보면서 이 작은 것들에 연연하면서까지 살지는 말아야지 하고는 다짐한다. 모든 것을 다 잃었기에, 어쩌면 그래서 내게는 아직 하나 남은 소신이 있다. 쉽게 타협하지 않는 '가오라도 있는 삶'. 그것이 내게 마지막 남은 나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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