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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nest Aug 06. 2020

당신이라는, 사람

작은 모임 하나를 주최하는 일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어렸을 때라면 친구들끼리 "야, 모여!" 하면 될 때도 있었는데, 나이를 들면 고려해야 할 요소가 하나둘 늘어나거든요. 꽤나 여러 모임에서 총무 비슷한 역할을 맡고 있는 저는 얼마전에도 작은 모임 하나를 만들었습니다.


카톡방을 열어 보니 이 모임에 나오는 사람은 저를 포함해서 대략 열일곱, 여덟쯤 되는 모양입니다. 모임을 열기로 결정하면 바로 저보다 위의 선배분에게 전화를 겁니다. 대략 언제쯤, 대충 어디께,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윗분들 가운데 어느어느분께까지 일단 의사를 여쭈어볼지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눈 뒤에는 가장 윗분들부터 몇몇 분에게 전화를 드립니다. 그분들의 일정을 확인하고, 장소를 추천받고, 약속을 잡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이 쉽지는 않습니다. 대체로 높은 분들일수록 가능한 날짜를 모두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선호하는 날짜 하루이틀을 지정해 주거든요. 맞춰야 할 사람이 너댓 명을 넘어가면 한 달 전에 약속을 잡는다고 해도 이게 쉽지 않고, 한 사람이라도 안 된다고 하면 전화를 다시 돌려야 합니다.


"아니, 카톡방도 있다면서? 그냥 거기에서 이야기하면 안 돼?" 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죠. 친목 모임인데요. 그렇지만 당신도 당신 회사 대표이사에게 카톡으로 보고하지는 않잖아요. 이 모임에는 한 회사의 대표이사도 있고, 임원도 있고, 팀장도 있고, 퇴직 임원도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퇴직 사원입니다. 사실, 그 방에 있는 사람 중에 가장 자신 있게 대충 카톡으로만 연락해도 되는 사람이죠. 저는 이 모임의 가장 주니어입니다. 처음 입사했을 때 바로 위의 부장(차장도, 과장도 아닌)님이 얼마나 좋아하셨는지 모릅니다. 사실 과장님도 계시긴 했습니다. 그러나 현장직이기도 하고 해서 모임에 나오는 일조차 쉽지 않으셨죠. 부장님과 저는 13살 차이였고, 과장님과도 저는 11살 차이가 났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제 퇴사하고 10년이 지났습니다.


대표이사님도 계시고, 가끔씩은 모임 안에서 임원 승진자도 나옵니다. 어린 분도 저보다 11살 많다면 50을 눈앞에 둔 셈이니 제가 지갑을 열 걱정은 할 필요가 없습니다. 가끔씩은 오히려 모임이 끝나면 택시타고 가라고 신사임당을 받는 일도 있습니다. 그래도 이런 모임을 열고 진행하고 하는 일은 여간 번거롭지 않죠. 특히 다들 누군가가 맞춰주기만 하신 분들이라서 더욱 그렇습니다. 장소부터 식당 선정까지, 모든 사람의 의향을 물어보지는 않지만 대여섯 분의 마음을 일치시키는 것조차 쉽지 않습니다. 두 사람만 해도 두 마음이 있을텐데요.


"너는 근데 퇴사한지 10년도 넘었으면서 뭐하러 그런 데를 나가냐?", "나가면 맨날 맛있는 것 얻어먹잖아.", "나 같으면 그냥 마음 편하게 내 돈 내고 사 먹겠다." 친구의 핀잔도 틀리지는 않습니다. 아니, 제가 사먹지 않더라도 그 친구에게 가면 늘 사 줄 거에요. 그럼에도 저는 이번에도 여러 통의 전화를 돌려가면서 그 모임을 열었습니다. 누군가는 반가워하고, 누군가는 코로나19로 찜찜해 하는 가운데 모두를 설득하면서요. 모임이 끝나면 모두들 저에게 말합니다. "고맙다, honest야. 항상 이렇게 자리 만들어 줘서.", "honest야, 나중에 회사 와. 우리끼리는 따로 밥 먹자. 수고했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누군가는 곤란한 일 떠맡기고 말 한두 마디로 공치사한다고 볼 수도 있겠죠. 실제로 그런 분도 계실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저는 10년 넘게 계속 모임을 이끌어 나가고 있습니다. 함께 모이는 분들 모두가 좋기도 하고, 실제로 그분들이 제게 고마움을 느끼며, 무엇보다 제가 진행을 해야만 모임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제가 없어도 시간이 지연될 뿐, 횟수가 줄어들 뿐 모임은 이어지겠죠. 그럼에도 저는 즐겁습니다. 저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저에게 고마워하는 사람들과, 안부와 마음을 나누어 나가서요.


군대에 입대하면서 저는 정말 농담이 아니라 한 말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군대가 힘들어서도 두려워서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져야 하고, 그들 곁에 제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은 너무 힘들어서 견딜 수가 없더군요. 하필 저는 우여곡절이 있어 입대 전 4개월의 꽤 많은 시간을 부모님과 보내야 했습니다. 지루하게 하루하루 시간을 보낸 덕분에 "그래, 이제는 군대 가야지."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았지만, 부모님과 떨어져 지내던 채로 갔다면 더 마음이 편했을 수도 있었을텐데, 오히려 부모님께 자식의 공백만 느끼게 해 드렸죠. 학교 옆에서 자취했던 덕분에 하루가 멀다 하고 같이 만나고,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던 친구들도 많았는데, 정말 얼토당토않은 이야기지만 저는 저보다도 그 친구들이 더 걱정됐습니다. "이제 나 없으면 너는 어떻게 하냐?" 정말 오지랖도 이런 오지랖이 없었네요.


힘든 군생활이었지만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았습니다. 저는 사람들의 저에 대한 기대치를 잘 알고 있었고, 늘 그것을 충족시켜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찌 보면 별로 힘든 일은 하지도 않았는데, 사람들은 늘 저를 인정해 주었고, 힘들지도 않은 저의 일을 치켜세워 주고 고마워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에게 있는 좋은 일도 제 덕분이라고 해 주었죠. 처음 군생활을 시작할 때는 부사관들과의 관계에서 걱정이 많았습니다. 아무래도 모든 장교는 그 점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그런데 군대를 떠날 때는 제가 떠난다는 사실에 눈물을 흘리는 부사관도 있었습니다. 그것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고, 3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훈장 하나 받지 못했지만(웃음) 그보다 더 값진 눈물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꿈을 쫓아 첫 직장을 그만두는 발걸음이 그렇게 불편할 수가 없었습니다. 팀장님, 파트장님, 사수, 맞선배, 그리고 다른 동료 직원들 모두 저를 너무 좋아하고 아껴 주었거든요. '팀장님의 아들'이라는 이야기도 숱하게 들었습니다. 처음 입사할 때부터 저는 따로 꿈이 있었기 때문에 직장생활은 한시적인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3개월만 생각하기도 했고, 그런데 너무 좋아서 9개월로 늘었다가, 그 뒤에도 도저히 싫어지지 않아서 마침내는 15개월을 채우고, 결국에는 거의 2년을 다닌 끝에야 그만두었죠. 그렇게 저를 믿고 아꼈던 팀장님과 파트장님, 사수와 맞선배, 그리고 저를 좋아하고 아껴주었던 회사의 다른 수많은 동료들을 배신하고요.


요즘도 저는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면,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그때 팀장님과 파트장님 가슴에 대못 박은 거 벌 받는 거야." 회사를 나온지 10년이 넘은 지금도 저는 팀장님과 파트장님을 가끔 만나고, 아직도 회사에 있는 파트장님의 회사생활을 걱정하며 파트장님의 대학 선배인 계열사 대표이사와 따로 저녁자리를 만들기도 하고 하여튼 온갖 오지랖은 다 떨고 있습니다. 제가 비록 회사에서는 그분들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지만, 인생에서는 그분들을 실망시키지 않겠다는 다짐에서요.


저는 당신이 무엇을 기대하든 그 이상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의 저를 변화시키고 움직이는 것은 돈도 아니고, 자리도 아니고, 명예도 아닙니다. 바로 사람입니다. 지난 제 인생은 어떤 사람을 만났느냐에 따라서 정말 크게 달라졌습니다. 저에게 많은 기대와 사랑을 보여주었던 사람들을 만났을 때 저는 크게 성장하고, 저의 잠재력을 꽃피웠던 반면, 냉소적이고 부정적인 사람들을 만났을 때는 그렇지 못했죠. 물론 후자의 경우는 별로 없었지만요.


당신이라는 사람만이 오직 저를 저답게 만들 수 있고, 제가 가진 능력 그 너머를 보일 수 있도록 할 수 있습니다. 그 무엇도 아닌, 당신이라는 사람만이. 어쩌면 지금 당장은 당신이 기대했던 만큼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기다려 주십시오. 아마도 머지않아, 혹시 시간이 더 걸린다면 저의 인생을 통틀어서 제가 반드시 당신에게 저의 진면목을 보여줄테니까요. 저는 아직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이라는 사람, 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도 분명히 그렇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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