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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nest Dec 01. 2023

아내가 찍은 이혼 도장을 보다

이혼도 쉽지 않습니다 2

이혼 이야기까지 오갈 정도의 다툼이 있은 후, 생일이 있었다. 한 달쯤 되었을까. 그때만 해도 아내와 다투기 전이라 아내는 생일선물로 무엇을 받고 싶은지 미리 이야기하라고 했었던 기억이 난다. 임박해서 얘기하지 말라며. 비록 다툼이 있긴 했지만, 생일이 뭔가 전환점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래도 생일은 일 년에 한 번밖에 없는 특별한 날이지 않나. 한편으로는 다툼이 있고 서로 적당한 거리를 두면서 지내는 게 편해져서 생일에 아무런 이벤트가 없어도 좋겠단 생각도 들었다. '그냥 이렇게 잔잔한 일상이 계속된다면 그것도 나쁘지는 않겠다'는 마음을 먹었던 것 같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혼 초부터 불만인 것이 하나 있었는데, 장인어른 생신과 내 생일이 사흘 차이라는 것이었다. 뭔가 내내 장인어른 생신에 곁다리로 내 생일까지 같이 지나가는 느낌이라서 이건 뭐 어쩔 수가 없는 일이지만 그럼에도 썩 좋진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일임을 안다고 해서 기분이 좋아지진 않는다.) 아무튼 그렇게 장인어른 생신 겸 내 생일 해서 처가에서 항상 1박 2일을 같이 보내곤 했는데 이번에 나는 가지 않았다. 사네 마네 하고 있는데 잔치에 가서 하하호호 웃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아내에게 가지 않는 게 어색해 보이진 않을까 물었는데, 이미 예전에도 우리가 다투고 내가 처가에 가지 않았던 일이 없었던 일은 아니라서 괜찮다고 했다. (그런 경우 아내도 나의 부모님댁과 가족행사에 불참했었다.)


그래도 궁금하긴 했다. 아내가 처가에 가서 '우리 갈라설 거에요' 이렇게 말할 리는 만무하니 뭔가 내 생일선물은 무얼까,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렇다고 아내에게 대놓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요즘 약속이 많지 않았던 난 생일 하루 전에 친구들과의 모임이 잡혔다. 오랜만에 상당히 늦은 시간에 집에 돌아왔던 것 같다. '왔어?' 하며 물어보는 아내를 뒤로 하고 외출에서 돌아와 정리하는데 냉장고를 열었더니 아내가 다음 날이 생일이라고 그래도 꽤 준비를 해 놓았다. 케이크며 소고기며 미역국이며. 이 와중에 생일을 챙겨 준다는 게 우습단 생각을 했고, 솔직히 난 미역국을 싫어하는 편이라서 미리 아내에게 생일에 아무것도 할 필요없다고 이야기할까 했었는데, 챙겨 줄 마음도 없는 사람에게 괜히 오버하는 것 같아서 그러지 못했다. 아내는 나름대로 이 와중에도 자신이 해야 할 도리는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생일을 맞아 제주도에 가는 것으로 몇 달 전부터 예약을 해 두었었다. 아내에게 휴가가 없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같이 가고 싶은 마음도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괜한 말로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고, 실제로 아내도 별로 가고 싶어 하지 않았다. 황금시간대 비행기라 아침에 크게 늦게 일어나지 않았는데, 아내가 아침부터 부산하게 아침 준비를 하고 있었다. 1년에 단 한 번 있는 일이다. 미역국을 끓이고, 소고기를 굽고, 케이크도 내놓았다. 밥도 새로 한 듯했다. 다른 방에 있었지만 아내가 그 정도 준비를 한다는 건 알 수 있어서 계획보다 더 일찍 일어났다. 그래도 차려 준 아침인데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먹어야 하지 않을까 싶었고 그러려면 준비시간을 한 30분은 더 잡아야 했기 때문에. 씻고 같이 아침을 먹었다. 얼마만이었을까. 아내의 생일축하 인사도 듣고, 케이크에 불도 껐다. 어색한 사이니 만큼 노래까지 부르지는 못했지만.


돌아보니 살면서 목이 메이는 밥을 먹어 본 경험이 별로 없다. 남자들은 군대에 입대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는 식사가 목이 메어서 다 먹지 못하고 남긴단 이야기를 많이 들었었는데, 그래서 나는 입대 전 마지막 식사를 하지 않고 그냥 굶고 들어갔던 기억이 난다. 입대하는 곳까지 동행해 준 친구들만 밥을 먹게 했던 것 같다. 그 마지막 식사가 내내 기억 날 거란 이야기도 선배들에게 들었었는데, 먹지 않았기 때문인가. 난 그 식당이 어렴풋이 중국집이었던 것 정도만 기억이 난다. 생일 아침은 정말 목이 메었다. 살면서 그렇게 목이 메이는 밥을 먹어 본 적이 정말 처음이 아니었을까. 눈물이 날 것 같은데 참느라 정말 고생을 했다. 짐을 다 챙기고 문을 나서려고 하는데 아내가 현관까지 배웅을 나왔다. 그때는 정말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서 아내에게 얼른 들어가라고 부추겼다. 기억만 돌이켜는 데도 눈물이 앞을 가려서 글을 계속 쓰기도 어려울 지경이다...


이번 제주 여행이 썩 신나지 못했던 건 아마도 출발할 때의 그 기분 때문이었을 것 같다. 원래는 내가 원체 제주도라는 공간을 좋아하기도 하고, 오랜만에 떠나는 여행에 기대가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 생일 아침상을 받고 나서 그 모든 기대와 설렘을 쓸쓸한 감정이 모두 에워싸 버렸다. 도착한 제주도에서 날씨라도 좋고 맑았다면 괜찮았을텐데 하필 또 날도 우중충하고 바람도 많이 불었다. 새로 만나게 된 사람도 없었고 뭐 하나 나를 신나게 해 줄 요소가 하나도 없었던 상황에서 우도에 갇히기까지 하는 바람에 고립감이 더 심해졌던 것 같다. 이 모든 게 아침의 생일상 때문이다...


굳이 오래전 여행 이야기를 여기 다시 적는 건, 여행에 돌아와서 처음으로 발견한 게 이혼신청서에 찍힌 아내의 도장이었던 까닭이다. 아내는 찍지 않을 줄 알았다. 처음 내가 도장을 찍었던 날, 인주가 없어 희미하게 찍혔던 탓인지 아내는 별말 없었는데 다음 날이 되자 '도장 찍었더라' 라며 먼저 말을 건넸었다. 자기는 당장은 도장을 못 찍겠다고 했었는데 내 생일로부터 제주도에서 돌아온 그 3박 4일 사이에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아내도 도장을 찍었다. 집을 비운 아내에게 언제 돌아오는지 같이 이야기 좀 할 수 있는지 물었고, 나는 헬스를 받으러 떠났다. 서울에 올라오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한라산까지 완주한 마당에 굳이 또 한 시간 PT를 받으러 가야 하나, 괜히 한다고 했다, 이런 생각이 들었었는데, 그 순간엔 진작에 헬스를 받기로 한 나 자신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요동치는 마음 속에 홀로 외로이 있었다면 그 시간이 더 힘들었을 것이다.


아내는 두 가지 생각을 했다고 했다. 하나는 내가 원하는 사랑을 줄 수 없을 것 같아서 우리의 다툼이 결국엔 영원히 반복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자신의 삶을 찾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날 우리는 두 시간 정도 또 오랜 대화를 나누었다. '너는 왜 이혼 도장을 찍었어?' 아내가 이런 질문을 던지기도 했고,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날도 무척 힘들었지만 그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계속 힘들었다. 한동안 냉랭해진 관계가 익숙해져서 괜찮다고 생각했었는데 착각이었다. 자극이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었다.




우리의 부부관계가 심각해진 것 같다는 생각은 든다. 결혼 초기엔 다툼이 있어도 절대 '이혼'이라는 단어는 입에 올리지 않으려고 했다. 내가 처음 '이혼'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게 된 건 아마도 결혼하고 만 3년 정도가 지난 때였던 것 같다. 그 후로 점점 '이혼'이라는 단어가 오르내리는 주기가 짧아졌다. 그뿐만이 아니다. 처음엔 아내와 그렇게 다투었어도 다른 사람들에게 이혼 이야기를 쉽게 하지 못했다. '요즘 이혼은 흠도 아니야', '이혼하는 사람 많대'라고 하지만 당사자에게 이것은 결코 아무 일도 아닌 일이 아니다. 주위에 이미 이혼한 선배들이 있어 몇몇에게는 그동안에도 결혼생활 중에 겪는 갈등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했었지만 정말 본격적으로 이야길 꺼내게 된 건 올 봄에서였다. 그래도 내가 이혼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상당히 제한된 상태였다. 그러던 것이 생일 전날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처음으로 이혼 이야기를 꺼냈다. 그만큼 부부관계가 심각해졌다는 뜻이다.


이미 결혼한 친구(그치만 나보다 5년 이상 늦게 했다.)도 있고, 하지 않은 친구도 있는데 이런저런 이야기를 전했고, 또 들었다. 그러나 머릿속으로 내린 결론과 마음이 내린 결론이 다르기도 하고, 머릿속에서도 또 여러 가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해 보는 데까지 해 봐야 한다며 더 노력할 것을 권유하는 사람도 있는 반면에 또 다른 사람은 그래 봤자 서로 밑바닥만 보게 될 뿐이라며 서로 좋게 끝낼 수 있을 때 끝내는 게 좋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결국 만인에겐 만 가지의 사정이 있고, 나는 또 남들과는 다른 나의 사정이 있으니 내가 결론을 내려서 진행하는 게 맞겠지. 어느 쪽이 정답일지는 잘 모르겠다.


이럴 때 나는 항상 나중에 후회를 덜하는 쪽으로 결론을 내리곤 했다. 그런데 그것도 쉽게 결론이 나지 않는다. 지금 이혼한다면, 물론 나중에 좋은 사람을 만나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게 된다면 지금의 결정에 쾌재를 부르며 왜 진작에 이혼하지 못했을지 아주 작은 후회를 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좋은 사람을 만나지 못한다면 나는 오늘의 이 선택을 얼마나 후회하게 될까. 난 크산티페라도 배우자가 없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반면 이혼하지 않았는데 관계가 잘 회복되고 서로 아껴주는 부부로 좋은 사이로 다시 지내게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얼마나 좋겠냐만 이혼하지 않았는데 나중에 다시 다투고 또 이혼하자는 이야기가 나오면 그때의 나는 오늘의 망설임을 또 얼마나 후회하게 될까. 어느 쪽도 모두 다 가정에 기반을 두고 있고, 내가 새로운 사람을 만날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이 없다 보니 쉽게 결론을 내릴 수가 없다.




대학 시절, 수업에서 한 교수님께서 한 작가를 비난하시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람이 항상 처음 만났을 때처럼, 신혼 때처럼 상대를 사랑해 줄 수는 없는 것인데 늘 그런 것을 바라니 결혼을 몇 차례 반복한단 비난이었다. 그때는 내가 어려서 잘 몰랐기 때문에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말았는데, 나이가 들어서 보니 내가 바로 그 작가 같은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 작가는 그 작가의 동년배들 가운데서도 외모가 괜찮은 편인데 아마 나도 외모와 조건에 자신감이 있었다면 그래서 진작에 헤어졌을지도 모른단 생각을 했다.


이 이야기를 왜 하는가 하면 내가 바라는 것은 바로 그렇게 서로 사랑과 관심과 돌봄을 주고받는 관계라는 것이다. 솔직하게 말하면 그 상대가 아내가 아니라고 해도 별 상관은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에겐 그 작가와 같은 외모도, 조건도, 경제적 여유도 없다. 객관적으로 날 보았을 때 아내와 헤어지고 내가 다시 누군가와 사랑에 빠져 결혼하게 되는, 아니 결혼까지는 아니더라도 열렬히 연애에 빠지는 일이 발생할 확률이 얼마나 될까. 그리 높지 않다고 본다. 특히 나이가 들면서 나에 대해 깨달아지는 것이 많아지니, 안 그래도 예민한데 사람을 보는데 더욱 예민해졌다. 나쁘게 말하면 작은 것조차 거슬린단 뜻이고.


물론 아내에게도 그렇게 거슬리고 신경 쓰이는 면이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아내와는 지난 6년 반을 같이 살면서, 7년 반을 만나면서 익숙해지고 편해진 부분이 없지 않아 있다. 새로 만난 사람이 그 익숙함을 뒤덮을 만큼 나와 잘 맞을 확률도 로또에 맞을 만큼 희박할텐데, 하물며 내가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사랑에 빠지게 될 확률(아니구나. 나는 있을 수도 있겠다. 그 사람도 같이 빠질 확률이라고 해야 옳겠네.)도 로또에 맞을 만큼 드물 것이라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나. 그나마 어떤 선배가 이야기해 준 것처럼 그래도 그 확률이 0은 아니니 그쪽이 더 확률이 높다는 쪽에 희망을 가져야 할까.


어제 집주인으로부터 집 계약을 어떻게 할 것이냐는 문자가 왔다. 그 연락을 받기 전까지는 결심을 조금 미룰 수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더 이상은 미룰 수가 없는 데에까지 온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정말 쉽지 않다.


결혼도 쉽지 않지만, 이혼은 정말 더욱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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