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에 위기가 찾아오면서 깨닫게 된 것이 정말 많다. 나는 책도 많이 읽고, 여행도 많이 다니고, 뭐 그동안 이런저런 경험도 했겠지만, 사람이 이런 계기가 없었다면 성장하지 못했을 것들에 대해 정말 많이 느끼고 있다. 이 위기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어쩌면 나는 무너져내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적으로는 많이 성숙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진작에 그랬더라면 이런 일을 겪지 않아도 되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어쩌겠는가. 사람은 겪지 않으면 깨닫지 못하는 것을. 그게 사람이고, 동물인 것을.
나쁜 점도 있다. 솔직히 말하면 엄청 오만해졌다. 아무래도 이제 연말연초 인사 시즌이다 보니 친구나 선배, 후배 등으로부터 인사 발령이나 승진 등에 대한 한탄이 쉬지 않고 도착한다. 예전에는 정말 성심성의껏 듣고 위로해 주고 했는데, 지금도 들어주는 시늉은 하지만 솔직한 마음으로는 '그게 대수냐?' 하는 생각을 많이 한다. 세상에 힘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고작 승진 한 번 누락한 것 정도로 이렇게 난리를 피우냐는 마음이 든다. 물론 그 사람들은 내 사정을 모른다. 알면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았을텐데, 그렇다고 또 그 사람들에게 '내 사정이 더 힘드니 당신은 가만히 좀 계쇼' 이렇게 말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저 세상엔 더 힘든 일도 많고 괴로운 일도 많으니 큰일 아니니 이겨 내라는 정도의 말밖에는 나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속으로는 지금 내가 이렇게 죽겠는데, 내 앞에서 고작 승진 타령이라니, 하는 생각이 울컥 치솟아오르는 것까지는 어쩔 수가 없다.
그런데, 그래서는 안 될 것 같다.
아무래도 같은 아픔을 겪은 사람들에게 자주 연락을 하게 된다. 그중의 한 형이 있는데 항상 정말 별로 대수롭지도 않은 듯이 이야기해서 가끔은 내가 오히려 상처를 입게 된다. 아마 그 형도 같은 과정을 겪는 동안에 정말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전혀 티를 내지 않았었다. 나는 그 형의 아픔을 전혀 몰랐었는데 (이상하다는 생각은 했었지만) 그래도 그나마 나의 이야기를 이렇게 들어주는 것에 고마운 마음을 늘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나에 비하면 넌 낫다', '뭐가 그렇게 힘들어' 하는 식의 생각엔 동의할 수가 없다. 가정에 같은 위기가 찾아왔다고 해도 자세히 살펴보면 각자의 사정은 모두 다르다. 헤어지고 싶었던 사람도 있는 반면, 절대 헤어지기 싫었던 사람도 있다. 그 형은 아이가 있었던 점은 조금 어려운 점이었지만 헤어지기 전에도 형수를 늘 '오랑캐'라고 불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가정이 붕괴되게 되니 힘들었겠지만 내 사정과는 조금 다르다. 나는 여전히 아내에게 깊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 깊은 마음을 품고 있었으면서 상황이 이렇게 되도록 뭘했냐고 묻는다면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겠지만.
지금 나는 살면서 가장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굴곡이 전혀 없었던 내 인생에서 이것보다 더 큰일을 겪어 본 적이 있나 싶고, 앞으로도 한동안은 없겠지 싶다. 그러나 또 모를 일이다. 아무 굴곡 없이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도 물론 있지만, 모두가 그렇지는 않다. 이제 40년밖에 살지 않았고 앞으로 살아갈 인생에서는 더 많은, 더 힘든 일이 기다리고 있을 수 있겠지.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때마다 '너에 비하면 내가 더 힘들다' 이런 생각은 가지면 안 될 것 같다.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상황은 각기 다르고, 혹여 기적처럼 아주 같은 상황이 주어졌다고 하더라도 그걸 받아들이는 사람은 결코 같을 수 없다. 큰병에 걸려도 담담한 사람도 있을 수 있는 반면에, 손에 가시만 박혀도 죽을 것 같은 사람도 있을 수 있는 셈이다.(그러고 보니 내가 이쪽인 것 같다.)
지난날의 나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좀 더 겸손해지고, 사람들에게 좀 더 진심으로 공감해 주어야겠다는 다짐을 해 본다. 아, 물론 이 말이 누군가의 감정쓰레기통이 되어야겠다는 말은 아니다. 감정쓰레기통은 사절한다.
겸손해지자. 내가 아는 것이 다가 아니고, 내가 경험한 것이 다가 아니며, 설령 그 사람과 내가 같은 경험을 했다손 치더라도 우린 다른 사람이니까. 진작 이렇게 살았다면 더 멋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