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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nest Jun 05. 2020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스물여덟의 나이에 처음으로 입사원서를 쓰고, 처음으로 입사한 회사는 국내 굴지의 건설회사였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만한 회사였지만, 그때만 해도 금융위기 직후이기도 했고 부동산은 끝났다는 분위기가 있어서 회사는 내리막길을 걷는 모양새였다. 나만의 착각인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상당히 인정받는 신입사원이었다. 내가 회사를 그만두겠다는 용기를 낼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사람들이 건네는 다음과 같은 말 때문이었다.


"너는 어떻게 이 회사를 왔냐?"(어쩌다가의 의미로)

"너야 뭐 여기보다 훨씬 더 좋은 회사 갈 수도 있을텐데, 그럼 뭐 그래도 축하해 줘야지."

"너는 S나 다른 S, 이런 델 갈 거였는데."

"얘가 인물입니다."


신입사원 연수에서 나는 본부장과의 메인 테이블에 초대받는 사원이었고, 장기자랑을 해도 주인공이었다.


처음부터 회사생활에 큰뜻이 없었던 나는 직장을 1년만 다녀볼 생각이었고, 처음 시범삼아 원서를 냈던 회사에 덜컥 합격했다.(그때는 가능했다.) 1년을 다니더라도 더 다니고 싶은 회사도 있긴 했지만, 그 회사는 나중에 내가 정말 회사를 다니고 싶을 때를 대비해서 남겨두고 싶었고, 무엇보다 합격했던 회사 또한 나쁘지 않았는데 당장 입사를 해야 했다. 동기들과 함께 입사했지만, 사실 나는 4대 보험에 한 달 늦게 가입했다. 군대에서 전역을 하기 전이었던 까닭이고, 회사에서 그렇게 배려해 주었기 때문에 그냥 그 회사를 다니기로 마음먹었다.(사족이지만 그러고 보니 입사일뿐만이 아니었다. 군인이었던 내게 면접, 인성검사, 적성검사 등등 회장이 직접 참여하는 최종면접일을 제외하고 회사에서는 모든 일정에 편의를 봐 주었다. 아마 그런 인간적인 미안함 때문도 있을 것이다. 그 회사에 입사하게 된 것에는.)


이후의 삶은 모두가 알다시피. 나는 서른에 회사를 그만두었고, 나의 원래 꿈을 찾아 1년 넘게 도전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그리고 이후 서른한 살이 되어 다시 취업을 준비했는데, 아니 이게 웬일인가. 최종면접까지 간 적도 몇 번 없거니와 원서를 넣는 족족 떨어지고 말았다. 이유가 뭐였을까. 나름대로 나는 중고신인(?)으로서 더욱 강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첫 회사를 2년 정도 다녔던 까닭에 어느 회사를 가더라도 바로 현업에 투입될 수 있는 능력치까지 갖추어 더 좋은 조건이라고 생각했는데,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결국 지금 나는 한 차례 이직을 거쳐 직원 서른 명 남짓의 작은 중소기업에 다니고 있는 중이다.


"왜 안 되는 거지? 너가 생각해도 예전에 내가 그 회사에 아깝지 않았냐?"

"아까웠지. 아까웠는데, 그때라면 너는 어느 회사를 써도 됐을 거야. 근데 지금은 아니지. 그때 너는 스물여덟 살에 이제 막 전역해서 첫 직장을 들어가는 사람이었고, 이제는 회사도 한 번 관둔 서른하나잖아. 지금은 아니지."


나는 내가 더 좋은 조건을 갖춘 줄 알았다. 스물여덟에는 회사를 한 번 그만둘 수 있는 호기를 부릴지도 몰랐지만, 이제는 서른하나가 되어 그렇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고, 스펙도 조금 더 쌓았고, 무엇보다 나에겐 다른 신입 경험자들에게 없는 2년의 현업 경험치가 있었다. 그런데 그 사이에 내가 잃은 것도 있었다. 이제 나는 신입으로 뽑기에는 누가 봐도 부담스러운 서른하나였다. 스물여덟이었다면 아마 입사가 되었을 회사였다. 그런데 "어? 한 번 그만뒀네?"의 시선이 있는 데다가, 서른하나가 된 나를 받아 줄 회사는 없었다.




동갑내기 친구 A에게는 오랫동안 결혼하고 싶었던 후배 B가 있었다. 고백했다가 차이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둘은 좋은 선후배로 관계를 이어 갔다. 우리가 막 서른넷이 되었을 때였던가. 친구 A는 호기롭게 말했다. 올해 B의 생일에 마지막으로 결혼하자고 다시 고백해 보겠다고. 이번에 안 되면 마지막이라는 생각이었다.


"연애도 안 하고 결혼을 하냐?"

"걔랑 연애는 못할 것 같애. 힘들어서. 근데 결혼은 가족이 되는 거니까 괜찮잖아."


그런데. 사람의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친구는 B에게 고백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봄에 예기치 않은 소개팅에서 지금의 부인 C를 만났다. 연애도 거의 못해 봤던 친구에게, 소개팅이 잘 될 거라는 기대도 전혀 없었는데 의외로 지금의 부인과 잘 되었고, 결국에는 다음 해에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B는 어떻게 되었느냐고. 사실 친구는 중간에 지금의 부인 C와 관계가 진전되면서 B에게 먼저 결혼하자는 이야기를 꺼냈다. 누구나 그렇듯 후배 B는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지만, 서로가 생각했던 그 시간의 길이는 달랐다. 후배도 A에 대해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자신에게 이렇게 지극정성으로 했던 남자도 없었고, 무엇보다 둘 사이에는 10년이 넘는 시간이 있었다. 그런데 10년 전에 후배가 필요로 했던 생각할 시간은 2주였는데, 이번에는 2달이 넘었다.


사람의 인생이란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어떻게 되는 것이다. 30대 중반의 두 연인에게 2달이란 엄청나게 긴 시간이었고, 2달 뒤에도 B가 명확하게 어떤 이야기를 했던 것은 아니어서 결국 A는 지금의 부인 C와 결혼하고 말았다.


"나중에 미련이 남지 않겠냐."

"근데 내가 지금 걔랑 다시 잘해 보려고 한다고 해서 잘 된다는 보장도 없잖아."


그렇게 친구는 서른다섯에 결혼했다. 그런데 그 결혼은 어정쩡한(?) 결혼이었다. 친구는 B에게 깨끗하게 고백해 보고 차인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 내가 조금만 더 기다렸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버리지 못한다. 물론 지금의 부인과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은 아니다. 두 사람도 잘 살고 있다. 그러나 그 속마음에는 다른 미련이 남아 있다.


한 번은 A가 부인과 조금 다투었을 때, 그런 뉘앙스를 내비친 적도 있었다.


"그 친구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A야. B에게 고백을 할 거라고 자신에 차 있던 너와 나는 서른넷이었다. 그때 너의 말처럼 혹시 지금의 부인이 아니었더라도 넌 아마 결혼할 수 있었을 거야. 우리는 아직 젊었고, 결혼도 하기 전이었으니까.


그런데 A야. 그때는 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결혼하지 않은 서른네 살이 아니야. 너에게 미련이 남아 있을 수도 있지만, 네가 B를 다시 만나고 싶다고 해도, 너는 이제 서른여덟이고 한 번 결혼도 한 사람이잖아.


나는, 10년 전에 비슷한 착각 속에 한 번 실패를 경험해 봤어. 이제 와서야 깨닫는다. 그때의 우리는 할 수 있었지만, 지금의 우리는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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