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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nest Feb 24. 2021

권리는 잠자는 자를 보호하지 않는다

아파트 커뮤니티 기본요금 부과에 부쳐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새 아파트로 이사오고 나서 한동안은 헬스장이라든가 커뮤니티 시설이 모두 문을 닫은 채로 있었다. 재건축 아파트이기 때문에 등기 문제도 있었을 것이고, 무엇보다 지난해에는 코로나19 때문에 공동 시설을 함부로 열 수 없었던 것이다. 여전히 확진자는 400명씩 나오고 있다. 그러나 나도 이해한다. 코로나19 때문에 일상이 1년을 멈추었다. 아마 계속 문을 닫은 채로 지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얼마전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에서 갑자기 커뮤니티 시설 운영과 기본요금 부과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입주자대표회의에서 제시한 안은 기본요금 1만 5천 원에 가구당 일 2회 무료 이용이었다.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고 한다면 뭐가 나쁘겠느냐만은 기본요금이 1만 5천 원이나 된다는 게 문제다. 매일같이 헬스장과 사우나를 이용하는데 기본요금이 1만 5천 원으로 운영이 가능할 리 없다. 이것은 결국 이용하지 않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을 것이라는 전제하에 기본요금이 1만 5천 원으로 책정된 셈이다. 우리 단지는 1800가구 정도가 된다. 이 가운데 1/3인 600가구 정도만 이용한다고 치면, 1200가구는 기본요금만 꼬박꼬박 내는 것이 되고, 600가구는 결국 4만 5천 원 상당의 서비스를 누리는 셈이 된다. 현재의 구조가 그렇다.


일단 나는 기본요금 부과 자체에 반대한다. 그래서 입주자카페 등등에 글을 올리고, 심지어 오늘은 입주자대표회의 참관도 신청했다. 논의가 어떻게 되는지, 그리고 액수를 얼마로 정하는지 등등을 직접 지켜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 의견에 동의하는 사람들도 꽤 있다. 일단 이용하지 않을 사람이라고 치면, 기본요금 부과는 당연히 부당하다고 느끼게 마련이고, 결정적으로 경제적으로도 손해다. 그런데 논의가 이상하게 돌아간다. 기본요금 부과에 찬성하는 사람들도 상당수다. 어쩌면 반대하는 사람들보다 더 많은지도 모르겠다. 일단 내가 커뮤니티 시설을 이용할 계획이라면 당연히 기본요금을 부과하는 쪽이 좋다. 그래야 내가 낼 돈이 줄어드는 셈이니까. 이용하지 않을 사람이라고 치더라도 아파트 소유주의 경우 찬성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고, 적극적으로 내게 항변하고 있다. 커뮤니티 시설이 잘 돼야 아파트 가치 제고에도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내가 이용하지 않아도 내 자식, 내 손자들이 이용할 아파트라나. 건강보험과 대중교통 요금을 비교로 드는 데에서는 정말 빵터졌다. 이 단지 사람들이 수준이 낮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정도라니.


입주자카페에도 글을 썼지만 나는 이건 다수결로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용할 계획인 사람이 더 많다면, 거기에 아파트 소유자까지 더한다면, 당연히 기본요금 부과가 통과되고 만다. 극단적인 예시지만 한 사람의 부자가 있고 그의 재산을 빼앗아 999명에게 나눠 주겠다는 약속을 했을 때, 다수결로 결정하면 그 부자는 재산을 빼앗길 확률이 높다. 그러나 이것이 정의인가. 그리고 공정인가. 또 합리적인가. 그러나 현재 돌아가는 논의를 보니 결국 다수결로 기본요금 부과가 진행될 것 같다. 내가 기본요금 부과를 막으려면 법원에 소송을 걸든 다른 방법을 사용해야 할 것이다. 그 방법도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런데 나는 깜짝 놀랐다. 기본요금 부과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꽤 있지만, 내가 생각했던 반응에 훨씬 못 미쳤다. 무엇보다 어제 입주자대표회의 참관 신청을 갔다가 깜짝 놀랐다. 신청자가 나 한 명뿐이었다. 하루 전까지 신청해야 참관할 수 있기 때문에, 아마도 나밖에 없을 것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귀찮다', '내라고 하면 그냥 내지 뭐' 이렇게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다가 혹시 나처럼 적극적인 사람이 있으면 기본요금을 안 내거나 줄이면 좋은 거고, 내게 되면 할 수 없는 거다. 그 사람들은 자기 에너지를 아낄 수 있다. 실은 나도 에너지 소모가 너무 심하다. 특히 세입자 운운하며 공격하는 사람들, 기본요금 부과가 건강보험이나 대중교통 보조와 같다는 사람들을 대하면 실소를 금할 수 없다. 아파트 소유주들 같은 경우에는 이게 아파트값의 성패를 좌우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지금 근처의 아파트 단지들 가운데 이 단지가 가장 가격이 싸다. 큰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니지만. 전철역으로부터의 거리가 가장 멀기 때문이다. 내가 이 단지를 선택한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다. 조금 멀지만 전철역은 운동한다 치고 좀 많이 걸으면 되고, 대신 가격이 훨씬 메리트가 있었다.


무척 씁쓸하다. "권리는 잠자는 자를 보호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내가 입주자카페에 쓴 글에도 올린 말이다. 그렇구나. 아파트 소유주들, 그리고 커뮤니티 이용 계획이 있는 사람들은 아주 적극적으로 인신공격까지 해 가면서 기본요금을 부과해야 한다는 논리를 펼치고 있다. 그런데 세입자들 그리고 이용 계획이 없는 사람 중에 나처럼 적극적으로 나서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자신의 재산을 적극적으로 지키려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묘하게도 그런 태도가 지금 그 사람들의 자산 형성 수준까지 일러 준다. '아, 이래서 저 사람들은 부자가 되었고, 이래서 저 사람들은 부자가 되지 못했구나.' 부자가 되지 못한 사람 치고 나의 적극적인 반응은 사실 아주 특별한 것이다. 나도 알고 있다. 이게 이렇게까지 에너지를 들일 일이 아니라는 것을. 그러나 내 경우에는 가만히 앉아 있다가 고지서에 그 금액이 청구된 것을 보면 더 화가 날 것 같다.




아파트 한 채가 거의 자신의 재산의 전부인 경우가 많이 있다. 서울은 특히 심할 거다. 그런데 이 단지는 전철역도 멀고 옆 단지가 오르면 그만큼 따라오르기는 하겠지만, 항상 꼴찌 위치를 피할 수 없다. 그래서 지금 다들 이렇게 커뮤니티 운영에 목을 매고 있다. 한 달에 1만 5천 원이면 1년이면 18만 원인데, 재산이 오르는 가치에 비하면 소액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 아파트에 아무런 지분이 없다. 아파트값이 오르면 나는 오히려 손해인데? 내가 왜 내 돈을 들여가면서 내게 손해인 일까지 해야 하나. 물론 만약 내가 커뮤니티를 적극적으로 이용할 계획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그런데 그럴 계획이 전혀 없다. 또 모른다. 지금처럼 기본요금이 부과된다면 아까워서라도 한두 번이라도 이용을 안 할 수가 없겠지.


새 아파트로 이사오면서는 비록 내 집은 아니지만 뭔가 적극적으로 내 주변 환경과 세상을 바꾸어 보고 싶었다. 좀 더 정의롭고 좀 더 공정하고 좀 더 합리적인 곳으로. 그러나 세입자에게는 주어지는 발언권 자체가 적거나 없었고, 무엇보다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은 훨씬 무관심했다. '어차피 몇 년 있으면 떠날 곳인데 뭐...' 그렇다. 실은 나도 그렇다. 나도 여기에 집을 가지고 있었으면 상황이 달랐을지도 모른다. 커뮤니티라도 있어서 집값이 올랐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이용하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삥을 듣는 이런 구조는 아니다. 커뮤니티 프로그램을 잘 만들고 운용을 잘한다면 기본요금을 걷지 않아도 충분히 잘할 수 있을텐데. 물론 그러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어쩌면 그런 노력이 번다하고 힘들어서 편한 길을 택한 것일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기본요금을 부과하면 인당 1만 원씩 걷어서 소액 소송이라도 시작해 보려 했었다. 이용하지 않는 가구가 400가구만 된다 쳐도 400만 원이면 웬만한 수임료는 될 수 있을 것이다. 사안이 복잡하지도 않고. 그런데 사람들의 반응을 보니 400가구에서 400만 원을 모으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그 과정을 겪으려면 나도 지칠테고. 이제 나도 이 집에 살 수 있는 기한이 3년 정도밖에는 남지 않았다. 한 달에 1만 5천 원씩 3년이면 54만 원. 어찌 보면 없으면 없다고 해도 될 돈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없는 세입자들이 돈을 모아서 있는 아파트 소유주들의 자산 가치 상승에 도움을 주어야 하는 현실이라니. 뭔가 너무 대한민국의 축소판 같지 않은가. 그러면서도 자신들이 부당하다고 목소리 내지 않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너무 서글프다. 처음부터 이 땅에 태어나길 잘못했다. 대한민국은 아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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