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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nest Jan 23. 2022

역지사지라는 말을 아십니까

지난 12월의 일이다. 첫 직장에서 가장 가까이 지냈던 선배가 지난해에 이어 이번에도 승진에서 물을 먹었다. 한 번은 그렇다 치겠지만 두 번 연속이라니. 나라도 기분이 나쁠 일이다. 승진 발표를 앞두고 꾸준하게 전화를 해서 여러 푸념을 늘어놓고는 했었는데, 막상 물을 먹고 나니 마음이 많이 상했는가 보다. 승진자 발표가 나고 며칠 뒤에 또 전화를 해서는 이번에는 막말을 쏟아 냈다.


그 사람의 속상한 마음을 짐작한다 하더라도 다른 이의 막말을 듣는 것이 기분이 좋을 리 없다. 내가 승진을 누락시킨 것도 아니고, 하물며 그래도 대기업에 다니고 있으니 승진에 누락되었다고 해도 나보다도 급여가 훨씬 많을 터다. 아마 선배가 내뱉은 막말은 내가 아니라 그동안 자신에게 좋지 않은 평정을 주었던 팀장들과 이번에 승진자를 결정한 인사권자들을 향한 말일테지만, 좌우당간 그 막말은 내가 듣고 있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기분이 팍 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승진에 물 먹은 당사자에게 그것을 티를 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지만.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자. 다른 사람에게 푸념하기로 치면 나는 한국이 아니라 전 세계에서도 1등이다. 내가 만나는 그 수많은 사람. 친구며 선배, 후배에 이르기까지 사실 대개는 거의가 다 우리가 만나는 시간 동안 내 푸념을 듣고 있다고 해야 옳다. 물론 내가 그 시간 내내 막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도 다른 사람의 푸념을 듣는 일이 그렇게 힘 나는 일은 아닐 것이다.


늘상 나는 나와 교제하는 사람들에게 깊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 왔고, 또 표현하기도 했다. 내가 성격도, 생각도 그렇게 아름답지만은 않아서 아름다운 사람이 아니라면 나를 감당할 수 없고 내 곁에 있지 못하다고 생각했었는데, 막연한 그런 생각이 아니라 선배에게 전화 너머로 그렇게 막말을 듣고 있다 보니 좀 더 직접적으로 느껴졌다. 그동안 내가 푸념하고 또 아주 가끔은 막말을 할 때, 내 얘기를 듣는 사람들도 그렇게 신나고 즐겁지는 않았겠구나 하는. 그러면서 고마운 마음이 더욱 깊어졌다.




역지사지라를 말이 있다. 타인지석이라는 말도 있다. 우리는 예화를 통해서, 그리고 그 말들 자체가 좋은 말이니까 늘 뭔가를 깨닫고 배우기는 하지만, 역시 이렇게 직접 경험해 보아야 더 깊이 깨달을 수 있다. 실은 역지사지라는 말 자체가 그런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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