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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nest Jul 12. 2020

게으른 삶으로 인한 대가

어제는 아침 6시에 일어났다. 전날 오랜만에 대학원 사람들을 만났던 터라 자정도 훨씬 넘어서 잠에 들었는데, 아침 6시에 일어나려니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후유증은 오늘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하루 일찍 일어난 까닭에 주말이 내내 피곤하다. 어제는 국가공무원 시험이 있었다. 한 번쯤 시험감독을 해 보고 싶었는데, 다행히도 선정되어 길을 나섰다. 6시에 일어나 7시도 되기 전에 준비하고 출발했다. 지하철에서 보니 적지 않은 사람이 이날 시험을 보는지 아침 일찍부터 다들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이었다.


공무원의 장점에 대해서는 다들 알고 있을텐데 불현듯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도 시험이나 칠 걸 그랬나?" 이제 적지 않은 나이에 지금 시작해서 시험에 합격하는 것도 쉽지 않겠지만, 합격한다고 해도 문제였다.(이런 김칫국이라니) 출발이 너무 늦은 터다. '어휴, 합격한다고 해도 문제다. 나보다 더 모자란 상사들로 가득 차 있을텐데 그런 답답함과 또 불합리를 어떻게 견딘담.' 보름쯤 전에 고등학교 친구를 만났다. 친구는 같은 동기인 A의 서기관 승진 소식을 들려 주었다. A가 행정고시에 합격한 게 벌써 10년 전. 아주 유력한 부서에 있진 않아서 오히려 승진이 더 빨랐을 것이다. A의 승진을 가지고 나는 다른 친구들과 오히려 이런 한심한 대화를 나눴다. "공부는 내가 더 잘했는데 말이야. A가 시험에 붙었다는 건 난 진짜 놀랐어." 그런데 만약 내가 지금에서야 어제 치른 공무원시험을 본다면 당장 내년에 합격한다고 해도, A보다 한참 아래가 된다. 심지어 A의 직급까지 승진하는 일조차도 불가능할 것이다.




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나는 지금의 삶에 불만이 상당히 많다. 실은 이 날도 그랬다. 시험감독은 수당도 주고, 내가 경험하고 싶었던 일임에도 불구하고 친구 B는 내게 그런 반응을 보였다. "그 돈을 벌자고 그 아침에 거길 간다고?" 아마 1년에 억대의 돈을 벌 그 친구에게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을 것이다. 순간 새삼 내 삶의 현실이 떠올라서 무척이나 비참하다고 느꼈던 터였다.


그런데 시험감독을 가다 말고 지난 수십 년간 미처 깨닫지 못했던 사실을 자각하였다. 그랬구나. 지금의 내 삶이 비참하다고 느끼는 것은 지난날 내가 게을리 시간을 보내고, 잘못된 길에 들며(비뚤어졌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허송세월한 탓이었다. 그 시간 동안 A는 꾸준하고 열심히 공부를 해서 어려운 시험에 합격했다. 그리고 내가 앞으로 어떤 일을 하게 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공직사회 안에서는 내가 A를 지도하는 일이란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다. 비단 A뿐만이 아니다. 시험장에 가는 동안 만약 내가 이 시험을 본다면, 그리고 합격한다면 어떤 상사들을 맞게 될지 생각해 보았다.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그저 나의 자뻑일 수도 있겠지만, 나와 어느 정도의 대화가 되는 상사를 만날 일조차 너무 드물 것 같았다. 그런데 이 모든 현실은 그 누구의 탓도 아니었다. 바로 지난 세월을 내가 게으르게 살았던 삶에 대한 대가였다.


법조계에서 일하는 친구들을 보다 말고 '나도 그 시험을 준비했으면 붙었을지도 모르는데'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그런데 내가 한가로이 책을 읽고 여행을 다니며 노는 동안 그 친구들은 책상 앞에서 열심히 공부를 했다. 대학에 진학할 때 나는 과학탐구 성적이 좋았기 때문에 교차지원으로 상위 몇 개의 대학을 제외하면 나머지 의대는 모두 갈 수 있었다. 그런데 의사 친구들이 밤을 새워 가면서 시험 준비를 하는 동안 나는 세상 공부를 한답시고 사람들을 만나고 놀러 다니며 주말이면 한가로이 낮잠이나 자고 있었다. 후일에 회사를 그만두고 다시 대학원 생활을 시작했을 때는 어떤가. 내가 공부하는 원칙을 교수님께 양보하지 못해서 대학원을 떠나게 된 것도 없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냉정하게 평가할 때 내가 죽어라 공부했느냐고 물어본다면 솔직히 그렇게 답할 수 없다. 그 바람에 이제 숱한 친구들이 대학교수로 나가고 있는 동안, 나는 이렇게 작은 중소기업에서 찌끄레기 같은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나에게 비참함을 안겨 주었단 친구 B 또한 마찬가지다. B는 지금 그만큼의 지위에 오르고 능력을 인정받기 위해서 10년이라는 세월 동안 그 업계에서 참고 견뎠다.


직장상사의 갑질에 시달릴 때, 나는 그것이 내 잘못이라고 느끼지 않았다. 그는 그저 나보다 더 일찍 태어났고, 이 회사에 더 일찍 들어왔기 때문에 나의 상사일 뿐인 것이고, 그것은 내 잘못이 아니었다. 내가 20년 더 일찍 태어났다면 달랐을 수도 있겠지만, 20년 늦게 태어난 것이 내 죄는 아니므로. 그런데 대학교수들에게 갑질을 당할 때면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열심히 했다면, 그리고 그래서 교수가 되었다면 이런 일을 겪지 않아도 되었을텐데.' 물론 나는 끝없이 합리화하고는 했다. 내가 열심히 했어도, 교수가 되는 건 쉽지 않았을 거라고. 그리고 아무런 세상 공부 없이 그냥 쉽게 교수가 되었을 때, 분명 나는 지금 내가 혐오하는 저런 교수의 모습일 거라고. 그래서 인간적으로 나는 더 완성된 지금의 내 모습이 좋다는 말도 안 되는 자기위안을.


그런데 삶은 단순히 교수가 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든 결국 내가 열심히 노력하지 않은 삶에 대한 대가를 이렇게 돌려받게 되는 것이었다. 지난주에 나는 노동조합에서 탈퇴했다. 청년 일자리도 부족한 가운데, 불의하게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자신의 일자리만 보전하는 어떤 직장 선배의 모습을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내 잘못이 아니었다. 나는 이 회사에 들어온지 몇 년 되지도 않았고, 그 직장 선배만큼의 정치력을 보일 새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노동조합의 탈퇴를 말리면서 위원장은 그런 말을 했다. "다음 번엔 선생님께서 지도부가 되어서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고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방향으로 나갈 수도 있잖아요." 그러나 나는 또 다시 '게으른 선택'을 하겠다고 했다. 수많은 사람을 설득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고, 내가 왜 이 조직에서 그런 노력을 해야 하냐고. 이제 나는 그 미래를 알게 되었다. 결국 나는 그 게으른 선택의 대가로 나의 가치와는 다른 조직의 모습을, 그리고 나의 생각보다 더 어리석은 사람들의 지배를 계속 받게 될 것이다. 다음에 또 이와 비슷한 일이 있다면, 그때는 나의 잘못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나는 게으른 조직 생활로 그런 결과를 선택한 셈이다.




게으른 삶이 꼭 나쁘지만은 않다. 나는 알고 있다. 사법고시를 열심히 준비했지만 여전히 합격하지 못한 친구를. 교수가 되기 위해 애쓰고 있지만 여전히 되지 않고 있는 선배를. 심지어 개중에는 재주를 갖추었으면서 늘 열심히, 성실하게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객관적인 사회적 지위가 별로 높아지지 않은 친구도 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친구는 늘 자신의 자리에 만족하며 그 친구보다 덜 떨어진 상사들을 대단한 사람처럼 모신다. 이렇게 따져 보면, 대단한 결과를 바라지 않고 게으르게 살았던 내 삶도 그렇게 손해라고만 볼 수는 없는 것 아닌지.


그런데 이제 마흔이 멀지 않은 시점에서 비로소 나는 깨달았다. 그동안 나는 늘 분개했다. 내가 왜 저런 멍청이의 지도를 받아야 하는 건지. 이런 부당한 갑질을 당할 수밖에 없는 건지. 가끔은 그런 분노가 맞을 때도 있다. 단지 내가 늦게 태어났기 때문에, 늦게 시작했기 때문에 그래야 하는 경우도 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사회적 지위와 직책 같은 것과 무관하게 사람은 서로 존중하고 이해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 당연한 교과서적인 이야기니까.(물론 현실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나는 이런 글을 쓰고 있는 것이지만) 그러나 나도 머지 않아 마흔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앞으로의 내 삶에서 내가 지도를 받게 되는 것은, 지배당하게 되는 것은 내가 늦게 태어났기 때문에 아니라, 늦게 시작했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게을렀기 때문에 그렇게 될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결국 그 누구도 아닌 나의 책임으로.


사람은 마흔이 넘으면 자신의 삶에 책임을 져야 한다. 이 말은 링컨이 한 말이 아니다. 앞으로 honest라는 사람이 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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