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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nest Oct 23. 2022

사량도 트레킹 완전 정복

통영일기: 열사흘째.

여담으로 글을 시작하면 '트레킹'의 표준 표기는 '트래킹'이 아니라 '트레킹'이다. 나도 일상에서 혼재해서 쓰는 경우가 많았는데 발음기호를 확인하지 않고는 정확히 알 수 없다고 여겼었다. 발음기호를 확인해 보니 '트레킹'이 맞구나. '트래킹'이라는 표기가 국어사전에 없는 것은 아닌데 이 경우 영어 단어는 tracking이어서 차이가 있다. '열사흘째' 일기를 올리려니 얼마전 '사흘'이 4일인 줄 알았다고 기자를 욕했다는 인터넷기사가 떠오른다. 열사흘째는 13일째를 말한다. 나도 아주 어렸을 때는 사흘이 4일 아닌가 생각했던 적이 있었던 것도 같은데(아마도 두 자릿수 나이가 되기 전) 설마 그 정도의 어린아이가 댓글을 썼을리는 만무하지 싶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아이들이 또 몇이나 된다고 그걸 이슈화시키는 건가 싶기도 하고. 아무튼 서두가 길었다. 사량도 트레킹에 관한 이번 일기는 주제가 명확한 만큼 좀 더 열심히 정리해 보려고 그런다. 생각보다 아주 긴 길이 되지 싶다. 이제, 시작한다.




예매, 꼭 해야 할까?!


배편은 목요일에 사량수산업협동조합을 통해서 예약했다. 이런 경로는 흔한 경로는 아니었나 보다. 예매한 표를 찾을 때 오히려 수산업협동조합 예매자 리스트를 따로 확인하고 나에게 표를 내주는 모습을 보았다. 사량도가 모든 등산인들의 꿈이라는 홍보 문구를 곳곳에서 보았지만 아직 그 정도까지는 아닌 듯하다. 표는 굳이 예매할 필요는 없다. 배가 충분히 크고 사람은 그만큼 많이 타지 않기 때문에 당일 현장에 와서 표를 사도 충분하다. 다만 차를 싣고 간다면 예매가 필요할 수도 있다. 갈 때는 차를 실을 공간이 많이 남아 있었는데, 올 때는 꽉 차서 왔다. 예매하지 않았다면 차를 싣지 못했을 것이다.(내가 차를 싣고 갔다는 뜻은 아니다.;;;)


회사를 쉬고 나서 7시대에 일어나기는 처음이었다. 배편을 예매한 홈페이지에서는 40분 전에는 도착할 것을, 그리고 10분 전에는 승선 마감을 권유하고 있다. 40분 전은 조금 지나치다고 생각했지만 10분 전에 탑승 마감은 해야겠다 싶었다. 머무는 곳에서 여객선터미널까지는 대략 25분 정도 걸린다. 주차까지 포함해서 40분 전쯤에 출발하면 맞겠다 생각했다. 알람은 10분 간격으로 두 번을 맞춰 놓았는데, 첫 번째 알람이 울리고 뭉그적대는 사이에 바로 또 알람이 울렸다. 세상에서 가장 빨리 가는 시간은 아침에 게으름 피울 때의 시간이 아닐까. 이때부터는 바로 일어나서 준비를 했는데 가면서 조금 초조함을 느꼈다. 역시 10분 전 알람이 울렸을 때 바로 일어났어야 했는데. 전날 컵라면은 준비해 놓았기 때문에 아침에 물을 끓이고 근처 편의점에 가서 삼각김밥을 사 왔다. 삼각김밥도 전날 미리 준비해 놓고 싶었지만 밤 10시가 넘어야 들어온다고 해서 어쩔 수가 없었다. 그렇게 출발한 시간은 8시 10분이 조금 지난 시간이었다. 길도우미는 40분쯤 도착을 한다고 안내했는데 의외로 신호등이 많았다.


처음에는 주로 해변가 도로로 다녔는데 교차로는 많지만 신호등은 별로 없다. 내 생각엔 이 길이 훨씬 빠를 것 같고, 실제로도 경험상 더 빠른데 길도우미는 항상 바로 큰길로 나가는 쪽으로 안내한다. 이 날 신호등이 너무 많아서 개수를 세 보았다. 해변가 도로로 달리면 한 번의 신호등만 있는데 반해 길도우미의 안내를 따르면 6개의 신호를 받아야 한다. 인공지능은 아직도 멀었다. 그러고 보면 길도우미는 신호, 막히는 길 이런 경로에서 추가로 소요되는 시간을 명확하게 계산하지 못한다. 아직 사람이 할 일이, 재량이 많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몇 분 전에 도착해야 하나


출발 시간 20분쯤 전에 터미널 근처에 도착했다. 이미 차가 빼곡하게 들어서 있어서 당황했다. 어디에 주차를 해야 하지. 이건 통영에 건의를 해야 할 것 같은데 처음에는 나도 대중교통으로 가는 것을 생각했는데 버스 시간이 그렇게 좋지 못하다. 여객선 출발시간에 맞추어 버스 편 시간을 조정한다면 좋을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40분 전에 매표하라고 권유하고 있으니 그것에 맞춘 시간일 수도 있겠다. 그래도 40분은 좀... 당황해서 주차할 곳을 찾다가 길가에 불법으로 차를 세웠는데 주차 구역에서 한 대가 나가는 것을 보고는 바로 옮겨 대었다. 점점 마음이 급했다. 여객선터미널에 도착했을 때는 출발 15분 전. 줄을 서기 전에 눈치껏 승선정보를 작성하고 짧아 보이는 쪽에 줄을 섰다. 생각보다 줄은 엄청 천천히 빠진다. 아마도 모두가 나와 비슷한 시간에 도착하기 때문에 더 그럴 수도 있다. 터미널 안의 안내문에는 5분 전에 탑승하지 않으면 태워주지 않는다고 쓰여 있어서 마음이 더 급했다. 결과적으로 5분 정도 전에 배에 탈 수 있었다. 그러나 너무 급하게 마음먹지는 말자. 중간에 매니징하시는 분이 한 분 계셨는데 그분께서 지금부터는 시간이 없어서 가는 표만 발권할테니 오는 표는 사량도에서 사라고 하시며, 여러분 다 태워야 출발하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실제로도 배는 정각을 넘겨 출발했다. 몰랐는데 금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사량도 옥녀봉 축제가 있어서 이 날 배에는 사람이 많았고 여객선 3층에서는 큰소리로 노래까지 틀어놓고 있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여객선사에서 안내하는 대로 40분 정도 전에 도착해서 표를 사는 게 최선이겠지만 이게 너무 이르다 싶다면 나는 차라리 15분에서 10분 전에 도착할 것을 권하겠다. 처음에는 주차할 곳이 없어서 무척 당황했는데, 사량도에서 나오는 배가 도착하고 나니 주차장에서 차를 빼 가지고 떠나는 분들이 적지 않았다. 배는 40분이 지나야 도착한다. 나처럼 혼자 가는 사람은 거의 없을테니 15분 정도 일찍 도착해서 한 사람이 신분증을 받아 미리 표를 사는 쪽으로 가고, 다른 한 사람은 빠지는 구역에 차를 대면 충분할 것이다.


예매는 굳이 필요 없지만 당일날 여객선터미널에 갔는데 배가 뜨지 않으면 낭패일 수 있으니 하는 것이 꼭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다. 예매할 때 적어둔 전화번호로 혹시 기상 등의 상황으로 배가 뜨지 못한다면 안내를 미리해 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예매를 하면 승선정보를 작성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그걸 모르고 있다가 눈치껏 승선정보부터 작성했었다. 단, 신분증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는 세월호 사고를 겪은 국가이기 때문에 승선 인원의 인적사항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확인하는 것 같다.


가오치 여객선 터미널. 현재 통영에서 사량도로 들어가는 배는 이곳에서만 출발한다. 아마도 코로나의 여파인 것 같은데 통영여객선터미널에서 출발하는 배는 더 이상 운항하지 않는다. 단, 고성, 사천 쪽에서 출항하는 배도 있다. 저 앞의 빈 주차 구역은 주차장이 아니라 배에 실을 차들이 대기하는 장소다. 착각하지 말자.




버스에 꼭 앉아 가고 싶다면


사량도는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다. 출항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찍은 사진으로 멀리 사량대교가 보인다. 오른쪽에 선명하게 보이는 작은 섬은 팥섬이다.


왼쪽부터 사량도 하도 전경. 가운데에 있는 사랑 표시가 사량도 입도를 환영해 준다. 이때까지만 해도 저길 걸어서 방문하게 될 줄은 몰랐다. 오른쪽은 사량도 항구 뒤로 보이는 옥녀봉이지 싶다.


대개 사량도 트레킹은 상도의 서쪽 끝 수우도 전망대에서 시작하는데 배가 도착하면 그곳으로 가는 버스가 있다. 터미널을 정면에서 바라보고 왼쪽에 시내버스 정류장이 있는데 미리 찾아봤을 때 꼭 앉아 가라고 되어 있어서 배에서 내려서부터 서둘러 뛰었다. 결과적으로 뛸 필요까지는 없는 것 같다.(;;;) 배 승객 인원을 감안했을 때 상당한 인원이 버스를 탈 것 같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그래도 수우도 전망대까지는 시간도 좀 걸리고 섬 환경상 길이 잘 뚫려 있다고는 할 수 없기 때문에 앉아 갈 수 있으면 앉아 가는 것이 좋다. 이후에 등산에 걸리는 시간을 고려해도 그렇고. 내가 굳이 뛰어가면서까지 앉으려고 했던 것에는 꼭 뒤쪽에 앉으려던 까닭이 있었다. 부끄럽지만 앞쪽에 앉았다가 어르신들이 타시면 자리를 양보해 드려야 하지 않는가. 제일 뒤에 앉으면 어르신들도 그곳까지 오시기 힘들기 때문에 자리를 양보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점(?)이 있다. 대학교 4학년 때 철학수업이 생각났다. 버스 뒤에 앉는 속마음은 바로 저와 같았지만 겉으로 내색은 안 하고 있었는데 선생님께서도 뒤에 앉으신다며 그럼 자리 양보를 안 해도 되지 않느냐고 말씀하셔서 내심을 들킨 듯했다. 수강생 모두 웃고 말았지만.


수우도 전망대에서 바로본 수우도. 오른쪽 사진은 멀리 삼천포를 찍은 것이다. 사진이라 잘 보일지 모르겠지만 이 날 오전은 구름이 꽤 있었음에도 삼천포대교까지 보였다.


수우도 전망대 쪽 등산로 입구의 안내도. 섬의 중앙을 가로질러 일주를 하게 된다.


9시에 배를 타고, 9시 40분쯤 섬에 내려 10시 반은 넘어야 산행을 시작하게 될 줄 알았는데 전망대에서 충분히 경치도 감상하고 쉬었음에도 10시 10분쯤엔 산행을 시작할 수 있었다. 돌아오는 표를 5시로 끊었는데 시간이 너무 넉넉해서 4시로 끊었어야 했는데 잘못한 건 아닌가 잠시 생각했다. 초반 등산로는 그리 힘들지 않았다. 급경사여서 정상까지 금세 오를 수 있었고 주변 풍광이 너무 수려해서 오르는 내내 행복하다는 느낌을 받으며 산에 올랐다.


오전에는 햇볕을 받으면 바다가 저렇게 금빛으로 빛난다. 바다 건너로 고성군이 보인다. 하일면과 하이면 공룡 유적지 쪽. 경치를 보던 어떤 등산객이 다른 지명을 얘기하길래 '저쪽은 고성이에요' 하고 얘기해 주었다. 사진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실제로 산 위에 올라 보면 고성 공룡박물관의 공룡 조형물이 잘 보인다. 아마 이미 다녀온 덕분에 알고 있어서 보이지 않았나 싶다.


11시 10분이 안 되어 지리산 정상에 도착했다.




성자암 가는 길은 주의!!!


이 날의 코스는 이렇다. 수우도 전망대에서 지리산 정상을 거쳐, 촛대봉, 달바위, 가마봉, 옥녀봉을 거쳐 하산한다. 거의 모든 사람이 이렇게 같은 길을 걸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내게 시간이 너무 많았다는 것에 있었다. 조사해 본 것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이 9시 배를 타고 들어와서 4시 배를 타고 나가는 듯했다. 그런데 나는 5시 배를 예약했고 따라서 시간 여유가 넘쳤다. 등산에도 남들보다 자신이 있는 편이었다. 그래서 지도에 나오는 성자암에도 들러야겠다고 생각했다. 지리산 정상을 찍고 촛대봉 쪽으로 가다 보면 다음과 같은 갈래길이 나온다.


이 표지판에 속지 말자. 아마 저 길 안내가 틀린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우리가 유의해야 할 건 저기 적혀 있는 길이 등산로상 최단 경로는 아닐 것이라는 점이다. 물론 성자암에만 들렀다 옥동으로 하산하겠다면 말이 다르겠지만...


지리산 정상을 찍고 충분히 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저 표지판을 보고 나는 성자암 쪽 길로 향했다. 중간에 촛대봉 정상을 찍어야 했지만 험한 길을 일부 돌아오기도 했던 까닭에 촛대봉은 지나쳤나 싶었다. 그런데 성자암으로 가는 길이 더 험했다. 지도상에서는 200m라고 되어 있었는데 산길이 일반 보행로와는 거리감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감안해도 너무 오래 걸렸고 길도 안 좋았다. 그 길목의 끝에는 거대한 바위 암반이 밖으로 노출되어 있었는데 그 바위에서는 성자암이 아주 잘 보였다.


산의 중턱에 보이는 것이 성자암이다.


결국, 나는 길을 잘못 들었던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온 길을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무성한 수풀을 헤쳐 가면서. 다시 저 길목을 지나서 한참을 걷다 보니 비로소 그제서야 촛대봉이 나왔다. 촛대봉을 지나친 게 아니었던 것이다.


대략 언덕의 꼭대기에 있긴 한데, 정말 이게 촛대봉의 다일까?


촛대봉을 지나면 정말 성자암과 내지, 옥동으로 가는 갈림길을 마주할 수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시원한 생수와 커피, 아이스크림, 맥주, 막걸리를 파는 아저씨를 만나게 된다. 아이스크림은 1개에 2천 원이었다. 아직 등산을 시작한지 오래되지 않아서 크게 시원한 것이 고픈 형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것도 추억인데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있나. 아이스크림을 1개 사 먹었다. 아이스크림은 제과점에서 파는 아이스캔디 형태였는데 2천 원이면 아주 비싼 가격도 아니다. 여기에서도 원가를 따지고 있는 내가 웃기지만, 제과점에서도 1천 원은 한다.


여기에서 성자암은 정말 2백 미터밖에 되지 않고, 길도 잘 닦여 있는 편이다. 시간이 넉넉했던 까닭에 다시 성자암까지 갔지만 성자암은 꼭 들러야 할 곳은 아닌 듯하다. 특별할 것은 없었다.


성자암 전경


다만, 성자암까지는 차를 가져올 수 있다. 재미있는 생각인데 이곳 아이스크림 아저씨는 그렇게 힘들지 않겠단 생각을 잠깐 했다. 나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 성자암까지는 차를 가져올 수 있고, 성자암에서부터만 짐을 들고 올라오면 되는데 200미터 정도의 거리에 길도 잘 되어 있다. 이거 아주 괜찮은 장사인데? 주말에 서울 근교 산을 다니다 보면 청계산이나 하남 검단산 등에도 막걸리나 아이스크림을 파는 노점이 있다. 한 번은 청계산에서 지게에 그 많은 짐을 지고 올라가는 분을 본 적이 있었는데 판매하는 가격과 비교해 너무 힘이 들어 보였다. 반면 이곳은 정반대였다.


성자암을 찍고 다시 올라서 달바위로 향했다. 달바위로 가는 길은 예상 외로 무척 험했다. 돌아갈 수 있는 길도 마련되어 있긴 했지만 그렇게 되면 달바위 정상에 도달할 수가 없다. 사람들로부터 위험하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주위의 안전바가 양쪽으로 되어 있다면 크게 불안하지 않겠거니 싶었는데 이곳의 안전바는 한쪽으로만 심어져 있다.


달바위 정상과 달바위 가는 길에 절벽 북쪽으로 단풍을 찍은 사진. 달바위 가는 길로는 무서워서 사진을 많이 찍을 수가 없었다.


높이로만 따지면 달바위가 사량도 상도에서 가장 높다. 지리산 정상을 최고점으로 여기지만 실제로는 달바위가 1m 정도 더 높다. 이때는 몰랐다. 달바위만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후로도 계속 고비의 연속이었다. 왜 사량도 트레킹이 등산인들의 꿈이라고 하는지 조금 이해도 될 것 같다. 높이는 높지 않고, 시간도 아주 많이 들지는 않지만 다양한 코스를 모두 경험할 수 있고, 너무 험해서 못 갈 정도는 아니지만 높이에 비해 상당히 험해서 꽤 높은 난이도를 가지고 있다. 사량도 트레킹을 하면서 내내 한라산과 비교해 보았는데 만약 상대가 등산 초보라면 나는 사량도 트레킹보다 한라산 백록담 코스를 권하겠다. 나도 그렇게 하고 싶고. 이쪽이 더 무섭고 더 힘들다.




점심으로 먹은 컵라면 이야기


달바위 다음은 가마봉이다. 달바위를 지나서 가마봉으로 가는 길에 평상에서 삼각김밥과 컵라면으로 점심을 먹었다. 제주도에서 가장 맛있는 식당은 원래 진달래밭 대피소에서 파는 컵라면이었다. 지금은 문을 닫았지만. 특히 비 오는 날 그곳에서 파는 컵라면은 제주도의 어느 식당에도 비할 수 없는 최고의 음식이었다. 국립공원 대피소에서 더 이상 음식을 판매하지 않으면서 이제는 컵라면과 보온병을 준비해 오르고는 하는데 아무래도 현지에서 펄펄 끓인 물을 충분히 넣어 주는 그때의 맛과는 비교하기 어렵다. 하물며 내가 요즘 등산하면서 준비하는 컵라면은 농심 육개장이 아니라 오뚜기 육개장인 다음에야.


몰랐는데 큰사발이 아니고 보통 컵라면이지만, 농심 육개장에 비해 오뚜기 육개장은 물이 더 많이 필요하다. 지난 여름 제주도 윗새오름 대피소에서 처음으로 오뚜기 육개장을 먹었는데 끓는 물을 붓고 나서 물이 부족해서 무척 당황했다. 물론 내 보온병 크기에는 변함이 없어서 이번에도 그런 결과는 마찬가지일텐데... 그래서 이번에는 생수를 미리 조금 부었다. 그리고 보온병의 물을 모두 부으면 지난번보다는 조금 낫지 않을까 싶었다. 아마 조금은 나았던 것 같다, 조금은.


내 보온병은 용량이 300ml라 조금 작은 편이다. 등산하면서 컵라면을 맛있게 먹고 싶다면 최소 400ml 이상의 보온병을 가지고 오를 것을 권한다. 내게도 그런 보온병이 없는 게 아니다. 다만 너무 보온병이 많아서 이것저것 뜯고 싶지 않아 그냥 있는 걸 가지고 쓰려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 어차피 아껴 봤자 똥 될텐데...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기도 하다.


이 날 처음으로 좀 오래 앉아서 푹 쉬었다. 평상이 달바위 다음 가마봉 가는 길에 있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가마봉과 옥녀봉으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훨씬 더 험하다. 여기에서 쉬면서 체력도 보충하고 마음을 다부지게 먹고 가야 한다. 산은 높이가 다가 아니다.




후덜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가마봉 정상. 오른쪽 사진에서 저 멀리 달바위가 보인다. 400m 높이의 깎아지른 달바위 정상에서 급경사로 내려와 다시 가마봉까지 급경사로 올라야 한다.


달바위를 오르고 내리면서 정말 무섭고 힘들었지만 가마봉을 오르면서 그래도 이제 끝이겠거니 생각했다. 등산하면서 나무 계단을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 자연과 소통한다는 느낌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나무 계단을 만든 건 자연 훼손을 최소화하고 안전을 보장하려는 측면도 있는 만큼 나는 꼭 부정적이지만은 않다. 가마봉을 오르면서는 나무 계단을 만나면 반가웠다. 네 발로 산을 오르고 내리는 것에 비해서는 훨씬 쉬웠던 까닭. 그러나 등산로의 좌우측으로 나무 지지대가 있다고 해서 모두가 계단인 것은 아니었다. 저 안전 지지대 사이로 네 발로 기어서 내려가거나 올라간 곳도 꽤 된다.


가마봉에서 옥녀봉 쪽을 바라본 풍경. 멀리 사량대교도 보이고 바닷물도 정말 깨끗하고 아름답지만 그저 두려움이 온몸을 지배할 뿐이었다.


마지막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 옥녀봉을 가는 길이 이 날 등산로 중에 가장 험했다. 사진으로 설명을 대체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실은 사진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무서워서 차마 사진을 찍을 수가 없었던 곳도 많았기 때문.


위쪽에서는 계단이 잘 보이지도 않는다. 무서워서 사진을 찍을 수도 없었다. 가운데는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 본 것이고, 제일 왼쪽 사진은 더 내려와서 각도가 보일 때 찍은 사진이다. 차라리 올라가라고 하면 낫겠는데 저걸 내려왔다. 지리산을 오르면서 이쪽으로 내려오면 오르는 것보다 훨씬 힘들겠다 생각했는데, 옥녀봉을 가면서 그 생각이 바뀌었다. 가장 우측 사진은 많이 내려와서 가마봉에서 내려오는 길을 촬영한 것이다. 어차피 다시 저만큼 올라가야 할텐데...


지리산을 지나 촛대봉을 거쳐 달바위로 향할 때까지만 해도 좋았다. 충분히 트레킹이 즐거워서 '다다음 주에 사량도 하도도 트레킹하러 또 올까?' 하는 생각을 잠깐 했었는데 점점 부정적으로 생각이 바뀌어 갔다. 이때부터는 등산을 즐긴다기보다는 어서 과제를 마무리하고 빨리 내려가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통영의 슬로건 가운데 하나가 '바다의 땅'인가 보던데 마찬가지로 인간도 '육지의 사람'이다. 우리는 날개도 없고 하늘을 날 수가 없다. 눈 앞으로 나비와 잠자리가 나를 놀리듯이 여유롭게 절벽에서 날아다니며 자신의 삶을 즐기고 있었지만 나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사람은 대지에 두 발을 디디고 서야 하는 동물이었기 때문이다.


힘들게 가다 보면 또 이런 출렁다리가 두 개나 나온다. 그나마 내 경우에는 운이 좋아서 일행도 없었고, 다른 사람도 없었다. 나 혼자만 조심해서 출렁다리를 건너면 되었던 셈이다. 출렁다리의 좌우로 보이는 풍경도 상당한 절경이었을 것 같은데 무서워서 제대로 감상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두 번째 출렁다리를 건널 때는 첫 번째 다리를 건널 때보다는 훨씬 여유를 가지고 성큼성큼 건넜다.


이렇게 힘든 길을 모두 걷고 나면 비로소 옥녀봉 정상에 다다를 수 있다.



옥녀봉에도 아이스크림을 파는 아저씨가 또 계셨다. 물어보니 갈림길에서 아이스크림을 파는 분은 동생이라고 한다. 옥녀봉은 갈림길만큼 올라오기가 쉽지 않아서 그런지 맥주와 막걸리는 판매하지 않는다.


나는 산에 오를 때 물을 최소한만큼만 싸서 다닌다. 하루 정도는 목 말라도 참아도 된다는 이상한 소신에 근거한 것인데 이 날도 가마봉부터는 무척 목이 말랐다. 아무래도 산행을 하면서 수분 소비가 많았던 데다가 점심으로 나트륨이 많은 라면을 먹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일부러 스프를 다 넣지 않았지만 보온병에 물이 부족했던 걸 생각하면 수분은 더 모자랐겠지. 아이스크림 아저씨에게 물어보니 생수는 3천 원, 커피는 5천 원, 아이스크림은 2천 원이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여기에서도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다. 이런 상황에서 원가 계산을 하는 게 웃기지만 5백 원에 파는 생수를 3천 원에 사 먹자니 영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조금만 더 참자' 싶었다. 아마도 아이스크림, 생수, 커피 가격은 이런 사람들의 선호도와 절박함 등을 모두 고려한 가격 책정이 아닐까 싶다. 이곳에서도 자본주의는 통용된다.


옥녀봉 정상에 도착한 시간은 2시 반이 조금 안 되었을 때였다. 내가 4시에 배를 타고 돌아간다면 무난한 일정이었겠지만, 5시 배를 예약한 상황이다. 옥녀봉 우측으로 고우산이라는 산이 하나 더 있다. 언제 다시 또 사량도에 올지 알 수 없는 일인데 남은 시간에 차라리 고우산까지 들렀다 간다면 어떨까. 이미 체력은 거의 바닥 난 상태였지만. 능선으로 갈 수 있다면 고우산 정상까지 들렀다 가고 싶었는데, 아이스크림 아저씨의 말로는 고우산은 산을 모두 내려가서 다시 올라야 한다고 한다. 여담으로 주말에만 장사하시느냐고 여쭈니 그렇다고. 평일엔 아예 사람이 없단다. 한편으로는 아저씨의 이야기에 다행스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마 몸이 지쳤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능선으로 오를 수 있다고 했다면 갔을텐데, 아예 하산했다 가야 한다니 그 핑계로 가지 말아야겠다 생각했다. 사람 마음이 이렇게 간사하다.




고우산 둘레길을 돌아서


사량도 여객선 리플렛은 고우산 둘레길을 안내한다. 섬의 북동쪽 대항해수욕장에서부터 여객선터미널까지 1시간 30분 정도 걸린다고 소개되어 있다. 고우산 정상까지 등반하기에는 힘들었지만 고우산 둘레길을 돌 시간은 충분하다 생각했다. 옥녀봉에서 하산하면서 바로 사량면사무소 쪽으로 가지 않고 갈림길에서 대항해수욕장 쪽으로 길을 택했다.


둘레길은 처음 조성되었을 당시에는 상당히 잘 되어 있었을 듯하다. 그렇다고 지금 상태가 좋지 않다는 뜻은 아닌데 아무래도 찾는 사람도 많지 않고 하니 관리가 조금 잘 되어 있지 않은 느낌이다. 곳곳에 비치 의자까지 있어 놀라운 생각이 들었지만 녹 슬고 이끼가 낀 까닭에 흔쾌히 눕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주말이고 단풍철이고, 마침 사량도 옥녀봉 축제까지 있어서 산행 내내 사람을 끊임없이 볼 수 있었지만 고우산 둘레길에서는 달랐다. 대항해수욕장을 통해 둘레길에 접어들 때부터 사량대교 입구로 나올 때까지 한 명의 사람도 보지 못했다. 밤이라면 조금 무서웠을 것 같지만, 훤한 대낮이었던 덕분에 온전히 내게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아니었나 한다.


물도 하늘도 정말 깨끗하고 맑았다.


둘레길을 걷다 보면 약수터가 나온다. 목이 말랐지만 실은 이것만 바라보고 버텼다고 해야 옳다. 둘레길을 걸으면서 '혹시 약수터가 폐쇄되었으면 어쩌나?', '잘 보이지 않아서 혹시 지나친 건 아닐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무사히 잘 만날 수 있었다. 다만 '음용은 불가합니다'라고 안내판에 쓰여 있었다. 목 말라 죽겠는데 그런 게 어딨나. 약숫물이 나오는 PVC관을 보면 이끼가 끼어 있다. 그걸 보면 마시지 않는 게 맞을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내가 목 마른 게 우선이라 어쩔 수가 없었다. 작은 PT병으로 2/3 이상은 담아서 마셨던 듯한데 머리까지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하루종일 산을 오르락내리락 하느라 무척 힘들었지만 한결 나았다.


둘레길을 돌아 나오다 보니 4시 배가 출항해서 통영으로 가는 소리가 들렸다. 아침 9시에 내가 탔던 그 배다. 많은 관광객이 그 배를 타고 돌아가는지 음악소리가 아주 떠들썩했다. 아침보다 오히려 더 커진 듯했다. 하루종일 먹고, 놀고, 마시며 신나진 까닭에 볼륨이 더 커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닐런지.


둘레길 끝으로 나오면 사량대교 입구가 있다. 둘레길을 걷다 보면 처음 입도하면서 보았던 사량도의 저 조형물을 볼 수 있다. 확인해 보지 않았지만 야간에는 조명이 켜지지 않을까? 사량대교 입구를 지나서 내려오다가 찍은 사량면 읍내 전경.


비록 고우산 정상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해서 수우도 전망대에서 고우산 둘레길까지 사량도 상도의 서쪽 끝에서부터 동쪽 끝까지 모두 가로지른 셈이 되었다. 이렇게 모든 코스를 마치고 여객선 터미널 쪽으로 내려오니 시간은 4시 20분경이었다.




혼자서 한 생각들


둘레길을 돌고 내려오다가 이 표지석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아마도 2015년 추석 때에 다리가 개통된 듯한데, 그럼 2015년까지 사량도 상도와 하도 사이를 배로 오고 갔어야 했단 말인가.


오랜 예전에는 아무것도 없었을 것이다. 비로소 사람에 의해 문명이라는 것이 생기고 나서야 이동수단도, 다리도 생겨났을 것이다. 사량도 읍내에서 버스를 타고 수우도 전망대로 가다 보면 '연륙교 건설을 희망합니다'라는 많은 현수막을 볼 수 있었다. 연륙교가 생기면 도서 지역은 다리로 육지와 바로 연결되니 생활의 편의성이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이 증대된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섬을 다리로 연결할 수는 없겠지만 섬 사람들의 바람이 이해가 되지 않는 바는 아니었다. 그래도 사량도에는 사량대교가 있어 상도와 하도가 연결되어 사람들이 한 생활권으로 드나들며 편하게 생활할 수 있겠다 싶었는데 표지석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2015년 개통이라니. 아니 그럼 그 전까지는 하도에 사는 아이들은 학교를 어떻게 다녔단 말인가. 보아 하니 초등학교며 중학교 모두 읍내에 1개교씩만 있는 것 같던데.


사량도를 떠나며 사량대교를 찍었다. 해가 서남쪽에 있어서 우측의 하도쪽 교량은 그늘이 져 있다.


제주도조차도 섬이라고 택배를 보낼 때면 돈을 더 내야 하고 보내는 데 날짜도 더 걸린다. 하물며 사량도 같은 작은 섬에서야. 둘레길을 돌고 나서 수협마트에서 이온음료를 한 병 사 마시고도 모자라서 편의점에서 생수도 한 병 샀는데 육지보다 가격이 더 비쌌다. 모두 같은 가격으로 파는 줄 알았는데 운송비에 차이가 있으니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나만의 생각이다. 나만의 소신이고. 모든 섬에 다리를 놓아 줄 수는 없겠지만 가격까지 다르게 해서는 안 되지 않을까. 택배회사가 개인 소유라면 어쩔 수 없겠지만 우체국은 공공 서비스이다. 전국 모든 지역에서 같은 가격을 내도록 해야 하는 것이 맞지 않을지. 섬에 사는 것이 그 사람의 잘못은 아니지 않은가. 서울 집중을 해결하고 지방 소멸을 염려하지만 실제로는 어쩌면 임대료를 제외하면 지방에 사는 게 비용이 더 들지도 모른다. 당장 사량도 같은 섬에 산다면 그것이 눈으로 보인다. 우편요금은 전국 어디에서나 똑같다. 마찬가지로 이제는 택배도 생활 필수 서비스라면 그렇게 해야 하지 않을까. 작은 것이지만 이런 것부터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른쪽 사진에 입도하면서 보았던 팥섬의 뒤로 지는 해가 보인다.


정말 축복받은 일정이었다. 긴 산행에 많이 피로했지만 바다가 정말 잔잔해서 배에서 어떤 흔들림도 느낄 수가 없었다. 배멀미 때문에 울릉도에 다시 가는 것을 꺼리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이렇게 평온한 바다를 건너 사량도에 다녀올 수 있다는 것은 정말 큰 행운이었다. 다만 코스는 결코 쉽지 않았다. 그래서 왜 사람들이 이곳을 오고 싶어하는지 알게 되기도 했고.


내릴 때가 되니 배에서 보이는 여객선터미널 앞의 주차장이 모두 휑했다. 다들 아침에 사량도에 들어가서 산행을 끝내고 저녁 때는 나오는가 보다. 그렇게 통영에서의 열사흘째가 저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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