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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nest Oct 24. 2022

통영일기: 열나흘째.

어느 먹을 복 터진 날

커튼으로 창문을 꼭꼭 닫아건 뒤에야 잤다. 사량도 트레킹은 정말 힘들었다. 잠에도 일찍 들었나 보다. 전날 워낙 일찍 잠든 까닭에 아침에 일찍 눈이 떠졌지만 그럼에도 계속 게으름을 피웠다. 더 쉬어야 했다. 천천히 일어나서는 사량도 트레킹을 정리하는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던 까닭에 모든 이야기를 다 하지 못했음에도 시간이 빠른 속도로 흘렀다. 어느 정도 선에서 끊고, 11시가 조금 넘어서는 외출할 준비를 시작했다. 조금 늦었다 싶었다. 맛있는 식당을 가려면 문 여는 시간에 맞추어야 하는데.



금요일 저녁에 친구가 이야기해 준 식당과 카페의 목록은 아마도 스무 곳이 넘는 듯 싶다. 하루에 세 군데씩 다닌다면 다 못 갈 것도 없겠지만 그 사이에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른다. 당장 오늘도 생각지도 못한 변수가 있었던 하루였다. 천천히 하나씩 갈 수 있는 곳부터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디를 갈까. 지도와 목록을 보면서 식당을 골랐다. 그렇게 식당으로 출발한 시간은 거의 12시가 다 되어서였다.




냉면계의 정돈을 만나다


스스로에게 조금 짜증이 났다. 어차피 밖으로 점심을 먹으러 갈 거라면 조금 일찍 나왔어도 되지 않는가 하는. 아침에 이불 속에서 게으름을 피우며 보낸 시간이 짧지 않았다. 식당을 여는 시간에 맞추어서 나왔다면 좋았을텐데. 갔는데 줄이 길어서 오래 대기를 해야 하면 어쩌나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12시가 넘어서 도착한 한 식당은 대기가 있었다. 다행히도 안의 좌석이 남아 있어서 네 사람이 대기하고 있다고 쳐도 그렇게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러나 뭐 다음에 또 와도 되니깐. 다른 식당도 대기가 길다면 이곳에 와서 줄을 서고, 아니라면 다른 식당을 가도 될 것 같았다. 그렇게 차분한 걸음으로 친구가 알려준 [백서냉면]으로 향했다.



친구는 이 집 냉면을 극찬했다. 자신이 태어나서 먹었던 어떤 냉면보다도 맛있었다고. 그리고 이곳에서 파는 메뉴는 전부 다 맛있어서 모두 먹어 보는 걸 추천한다고도 했다. 친구의 칭찬이 너무나도 엄청나서 대기가 길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가득 있었다. 다행히도 내가 식당을 가는 중에 바로 나오는 일행이 있었다. 휴- 밖으로 대기가 없으니 일단 저 정도 일행이 나왔다면 최소한 내가 자리는 잡을 수 있겠다 싶었다.


물냉면 하나와 만두 한 접시를 시켰다. 내가 이곳에 올 기회가 많지 않을테니 한 번에 두 개의 메뉴를 맛보려는 생각. 그리고 이 날의 첫 끼니이기도 했다. 냉면 하나로는 부족하지 않을까 싶었다. 사장님께 친구의 극찬을 전하면서 이곳 냉면을 꼭 먹어 보고 싶었다고 하니 사장님께서 만두는 먹지 말라고 하셨다. 만두는 이곳의 오리지널 메뉴는 아닌가 보다. 대신 냉면을 넉넉하게 해 주겠다고 하셨다. 먼저 나온 육수는 속을 풀어 주었고, 아주 따뜻했다. 맛있었다. 그리고 냉면이 나왔다.



천천히 냉면 육수부터 맛을 보았다. 달걀을 먼저 먹으라는 식당의 안내에 따라 다소 특이하다고는 생각했지만 달걀도 육수에 적셔서 먼저 맛을 보았다. 어차피 빈 속이니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면에도 조금 간이 되어 있다고 했다. 냉면에 식초를 뿌리기보다는 면을 풀어 보고 좀 더 간을 하려면 냉면김치(무)를 풀어서 먹는 것도 좋겠다고 했다.


처음 냉면을 먹고 나서는 조금 당황했다. 어느 순간부터 나도 평양냉면에 무척 익숙해져서 이곳에서도 당연히 면이 쉽게 툭- 잘릴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아, 모든 면을 메밀로 하는 것은 아니지!' 내가 어린 시절에 다녔던 고향의 유명한 냉면집도 면이 무척 질기다. 이곳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순메밀면은 아니었다. 한 입을 먹고 나서야 면을 가위로 자르고 먹기 시작했다.


흠. 사람마다 입맛은 모두 다르지만 태어나서 먹어 본 냉면 중에 가장 맛있는 냉면이라는 친구의 평가에는 선뜻 손을 들어주기가 쉽지 않았다. 아마도 면이 순메밀이 아니어서 조금 놀랐던 측면이 있지 싶다. 그래도 무척 시원하고 맛있었다. 특히 그 어떤 냉면집에서도 맛보지 못한 이 집의 고기 고명은 정말 최고였다. 내 경우에는 냉면에 올라가는 고기 고명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육수를 낸 고기여서 그런지 맛이 좀 빠지기도 했다 싶고, 질기고 어떤 경우에는 조금 비릿하단 느낌을 받을 때도 있다. 가장 좋아하는 봉피양 순면을 먹을 때도 고기 고명만은 썩 내키지 않아서 남기느니 먹는다는 쪽이다. 그런데 백서냉면은 달랐다. 이 집의 고기 고명은 정말 최고다. 앞에서 언급한 단점들이 한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다. 이건 정말이다. 고기 고명을 정말 잘 만들었고, 먹으면서 느끼기로는 '훈제를 한 건가?' 싶기도 했다. 냉면김치와도 아주 잘 어울렸고, 고기 고명이 좀 더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나 또한 마흔 평생 살면서 처음으로 한 생각이었다.


이 물냉면 한 그릇이 단돈 9천 원이다. 아주 슴슴한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육수가 맛이 있어서 별로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나는 평양냉면 중에서도 봉피양이 조미료 맛에 가장 가까워서 좋아하는 쪽이라서 이 냉면의 육수는 전혀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육수도 아주 좋았고 무엇보다 고기 고명이 최고였다. 고기뿐만 아니라 고명은 이 집을 따라갈 집이 없다는 생각이다. 오이도 배도 그리고 달걀도 그야말로 아주 적당하다. 내가 신맛이 나서 좋아하지 않는 냉면김치 또한 젓가락이 계속 갈 정도다. 이제 서울의 평양냉면집들은 너무 자본주의화 되어서 냉면 고명을 이 정도로 균질하게 만들지 못할 것 같단 생각이 든다. 친구가 어떤 점에서 이 집 냉면을 최고라고 평했는지 이해도 갈 것 같다.


아무튼 우리가 9천 원이 아니라 몇십만 원, 몇만 원을 낸다면 이보다 더 맛 좋은 냉면을 먹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9천 원을 내고 백서냉면을 먹는 쪽을 택할 것 같다. 전국에 1만 원 이하로 파는 냉면 가운데는 이곳이 단연 최고라고 평할 수 있지 않을까. 그야말로 돈까스에 정돈이 있다면, 냉면계에는 백서냉면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냉면계의 정돈이다.




백서냉면은 통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골목 가운데 하나인 봉수골 근처에 있다. 냉면을 먹고 나서는 천천히 봉수골을 둘러보면서 용화사까지 올라가 보았다. 전날 사량도를 다녀온 까닭에 계속해서 허벅지와 종아리가 당겼지만 그래도 조금씩 움직여야 풀리지 않을까 싶었다. 봉수골 골목을 설명하는 그림 지도를 보면서 햇볕을 받으며 용화사로 올라가는데 아침에 게으름을 피웠다며 스스로에게 화가 났던 것은 모두 잊혀지고 그저 평화와 여유가 가득 했다. 아니다, 한편으로는 조바심도 났다. 이 많은 집을 언제 다 가 보지 싶었던 것이다.


용화사로 오르는 길에 쭉쭉 뻗은 아름드리 나무들


통영에서 지금 머무는 곳도 좋지만 막상 봉수골을 걷고 있자니 봉수골에 머무를 걸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의외로 이곳에도 임대하는 방이 많았고, 심지어 하루만 머물 수 있다고 쓰인 곳도 있었다. 한 달 살기를 한다면 준비가 가장 중요하다. 나도 아무 준비 없이 통영에 왔다고 할 수는 없지만 미리 와서 아니면 도착한 뒤에 둘러보면서 방도 직접 알아보고 그렇게 정한다면 좀 더 만족스러운 한 달 살이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언제 또 내게 그런 기회가 올지는 모르겠지만 그때는 그렇게 해야겠다.



용화사를 한 바퀴 돌고 내려오면서 부엔이라는 카페에서 창밖을 보며 여유를 즐겼다. 정말 평화로운 오후였다. 생각해 보니 통영에서 처음 맞는 주말 같았다. 지난주에도 토요일 아침까지 통영에 있기는 했지만 아내를 떠나보내고 대구로 향하느라 여유가 없었다. 어제가 토요일이라 첫 주말이었다 생각할 수 있지만, 어제는 사량도를 가야 해서 또 뒤를 돌아볼 새가 없었고. 이곳에서 맞는 주말도 평화로워서 너무 행복했다.


'띠리리리링~'


그런데 이때 생각지도 않았는데 후배에게 전화가 왔다. 며칠 전에 통영에 오지 못할 것 같다고 이야기했던 후배였는데 광주에서 결혼식이 끝났다며 통영으로 가려고 하는데 괜찮겠냐고 물어왔다. '아니, 당연히 안 괜찮지' 나는 이미 혼자서 여유에 젖어 있는데 갑자기 통영을 오겠다니. 막상 반갑기보다는 당황스러웠다. 광주에서 통영이 얼마나 먼지, 오늘 하루 와서 자고 내일 바로 서울로 간다면 그 사이에 얼마나 오랜 운전을 해야 하는지, 광주 근처엔 갈 만한 곳이 또 얼마나 많은지 후배에게 상세하게 설명했지만 그래도 오겠단다. 그럼, 그럼 와야지. 또 오겠다는 사람을 말릴 수도 없는 것 아닌가. 대략 후배의 이야기를 들으니 저녁 6시에서 6시 반이면 도착하겠구나 싶었다.


카페의 여유를 뒤로 하고 방으로 돌아와서는 방도 조금 치우고 아침에 완성하지 못한 사량도 트레킹 일기도 마저 썼다. 후배를 데리고 갈 만한 식당도 천천히 찾아보았다. 차라리 잘 되었다. 친구가 이야기했던 식당 중에 혼자서는 차마 갈 수 없는 곳도 꽤 있었는데 후배가 와 있는 동안 가면 되겠다 싶었다.




서울에서 온 손님과 함께한 저녁


이 날 저녁은 [회운정]이라는 곳에서 굴 코스를 먹었다. 나는 패류를 좋아한다. 굴도 당연히 좋아하는데 회운정은 굴 돌솥밥은 1인도 파는 것 같았지만, 더 많은 요리가 나오는 굴 코스는 2인 이상이어야 주문이 가능하다. 사장님께서 인상이 정말 좋으시고 모든 굴 요리가 다 맛있다. 안타깝게도 사진은 후배의 카메라로만 찍어서 남기지 못했다.


회운정에서 저녁을 먹고는 남망산의 디피랑 카페에 가서 통영 시내를 내려다 보며 차를 마셨다. 남망산은 낮에도 가 보았는데 친구가 꼭 저녁에 가라고 했다. 저녁에는 빛과 조명을 활용해 여러 가지 전시를 하고 있는 게 눈에 보였고, 조각공원도 조명 색깔에 따라 낮에는 보이지 않았던 색다른 매력을 보여 주었다. 통영에 와서 해가 지면 주로 거의 방에만 있었다. 후배가 온 덕분에 저녁에도 이렇게 통영 시내를 조망하고 색다른 체험을 할 수 있었다. 멀리서 온 손님이다. 여기까지 나를 보러. 처음에는 번거롭단 생각도 들었지만 덕분에 또 다른 장소에서 이렇게 만날 수 있어서 고마운 마음이었다.


숙소 근처 편의점에서 통영 맥주와 과자를 사서 들어오는데 그러고 보니 후배와 같이 이렇게 한 방에서 잠을 자는 건 지난 20년 동안 처음이지 싶었다. 동아리 엠티나 행사 때 같이 밤 샌 적이 있지 않았냐고 후배가 묻기도 했지만 나는 동아리 엠티는 내가 1학년 때 이후로는 거의 가서 자고 온 적이 없다. 아, 그러고 보니 두 번인가 있구나. 그런데 그때는 얘가 없었던 것 같고. 나중에 천천히 생각해 보니 내가 대학 졸업반일 때 군대 가는 후배 한 명과 다른 학교 후배들과 학교 근처에서 밤새 식당과 술집을 옮겨 가며 하룻밤을 보냈던 적도 있었던 것 같긴 하다. 그게 벌써 16년 전인가. ㅎㅎ 그러나 그때는 같이 밤을 샜던 것이지 이렇게 잠을 잤던 건 아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밤에 잠 든 건 새벽 1시가 지나서였다. 이렇게 늦게 잠들기도 정말 오랜만이다. 아침에 게으름을 피우며 오래 푹 잤던 것이 다행이지 싶었다. 그렇구나. 삶은 꼭 우리가 예측한 대로 되지 않는다. 잘못한 것 같아 보였던 것이 도리어 좋을 때도 있고 그렇다. 오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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