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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nest Oct 25. 2022

통영일기: 보름째.

사람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금세 안다

# 필라테스 닷새째


전날 1시까지 깨어 있었던 까닭에 힘든 아침 일정이 예상됐지만 오히려 다른 사람이 방에서 자고 있다는 게 의식이 되어서였는지 나는 더 일찍 일어났다. 다시 잠을 청하려고 했지만 전날 오래 잔 탓인지 잠도 더 오지 않았고 아침에 깨어서는 오래도록 조용히 있었다. 후배가 너무 잘 자고 있었던 까닭이다. 조금 지나면 일어나겠지, 조금 지나면 일어나겠지 생각했는데 후배는 오래도록 잘 잤다. 전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녀석이 얼마나 열심히 살고 있는지 들었던 터라 이 날 하루만이라도 늦게까지 푹 잘 수 있도록 깨우지 않고 그냥 두었다. 그렇게 9시도 지나고, 10시도 지났다. 마침내는 11시도 지났고. 12시에는 깨워야지 싶었는데 11시 반을 넘어 잠투정을 할 때 그냥 깨웠다. 그래도 거의 12시가 다 된 시간이었다. 이곳에 와서 이렇게 늦게 일어났던 적도 늦게 활동을 시작했던 적도 없다.


전날은 아침에 일출을 보자던 후배였는데 알람을 맞추냐고 하니 일어나게 되면 보고 무리하지는 말자고 했었다. 그런데 햇볕을 받으면서도 12시까지 잘만 자더라. 내 경우엔 아무리 피곤해도 햇볕을 오래 받으면 결국엔 일어나게 되던데. 원래는 아침에 케이블카를 타고 점심을 먹으러 갈 생각이었는데 후배가 깊이 푹 잔 덕분에 바로 점심을 먹으로 가게 됐다. 친구가 추천해 준 식당 3탄이다.


중앙시장에 있는 [원조밀물식당]으로 향했다. 후배는 멍게비빔밥을 나는 드디어 개시한 굴국밥을 시켰다. 아무래도 난 고향이 내륙이어서 그런지 멍게, 해삼 이런 음식들과 익숙하지가 않다. 바다회도 대학에 간 뒤에야 처음 먹었으니 말 다했다. 실은 나는 스무 살까지 회는 민물회를 의미하는줄 알았다. 지역에 내려와서 새삼 깨닫게 된 것이 음식값과 반찬이다. 멍게비빔밥과 굴국밥이 서울에서 먹던 것과 비교해 엄청나게 빼어나다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음식값이 일단 싸고, 반찬의 가짓수가 훨씬 많다. 반찬이라는 것도 그냥 밑반찬이라고 볼 수 있는 정도가 아니다. 전갱이구이에 회무침까지 나오는데 이 정도의 회무침이면 서울에서는 돈을 주고 사 먹어야 한다. 통영에 내려온 첫 주에 먹었던 물회나 회덮밥이 생각난다. 둘 다 내가 그렇게 선호하는 음식은 아닌데 해산물의 질을 차이 때문이었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여기에서 먹으니 물회와 회덮밥도 그렇게 신선하고 맛있을 수가 없다. 이 날 먹은 굴국밥도 그랬다. 서울보다 굴이 많이 들어갔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알의 크기가 훨씬 크고 실하다. 아, 이래서였구나. 후배와 나 모두 흡족해 하며 식사를 마쳤다.


점심을 먹고는 미륵도 케이블카를 타러 갔는데... 아뿔싸! 월요일은 쉬는 날인 줄 미처 몰랐다. 아니 길도우미를 켰을 때, 길도우미도 같은 경로로 10명 이상이 지금 가고 있다고 안내했었는데. 휴일이 있긴 있겠지? 하고 생각했지만 일주일에 하루씩 규칙적으로 쉴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내심 '도대체 언제 쉬려나?' 이렇게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 휴일이 월요일이었다. 문 닫은 케이블카의 아쉬움을 뒤로 하고 후배가 서울로 사 갈 꿀빵을 사러 다시 시내에 들렀다. 아까 샀어도 됐을텐데 왜 미처 그 생각을 못했을까. 사람이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더니. 꿀빵을 사고는 숙소 근처로 와서 바다가 보이는 커피숍에서 차를 마시며 작별을 준비했다. 후배는 커피숍의 바다 뷰가 엄청 마음에 드는 모양인지 연신 사진을 찍어댔다. 그리고 바다 주위를 잠시 산책하고는 4시 반쯤 서울로 출발했다. 가능하면 야간운전은 지양하고 싶다고 했지만 그러려면 거의 2시에 출발했어야 했다. 늦게 일어난 탓이라 별 수가 없었다.




사람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더니


막상 후배가 온다고 할 때는 혼자 여유를 즐기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 번거롭다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그런데 도리어 후배가 서울로 출발하고 나자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극심한 외로움이 온 몸을 휩싸 안았다. 사람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더니. 덕분에 혼자서 먹기 어려웠던 메뉴들도 많이 먹었고 구경도 더 잘했다. 생각해 보니 이곳 통영에 내려와서 해가 진 뒤에는 거의 숙소에만 있었다. 아까운 시간이다. 야간에도 구경할 거리가 많을텐데. 그런데 후배가 일요일 저녁에야 도착한 덕분에 저녁을 먹으러 시내에 나가서는 거의 11시까지 있다가 돌아왔다. 보름여를 보내는 동안 처음 있었던 일이다. 그간 뭐했지? 하는 생각도 잠시.


후배가 떠나고나자 바로 극심한 피로가 몰려 왔다. 아무래도 전날 오래 자지 못했던 건 후배를 안내하고 살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던 듯하다. 한 달 살이를 하면서 낮잠은 절대 자지 않겠다고 다짐했고 실제로도 자지 않고 잘 버티고 있었는데 이 날만은 하루 예외를 두었다.


이렇게 통영에서의 보름째가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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