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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nest Nov 04. 2022

통영일기: 스물엿새째.

통영, 안녕.

# 필라테스도 마지막날


어제 저녁부터는 기분이 계속 안 좋았다. 지난주에 서울에 다녀올 때와는 다르게 급한 마음은 없었다. 내일 일정이 오후 3시부터 있는 까닭에 천천히 방을 비워도 되므로. 그러나 이제는 모든 것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마음이 너무 헛헛하다. 어제 마지막 승마를 경험한 다음부터 끝이라는 생각이 온몸을 휘감고 있다. 아침에 눈을 떴더니 바로 오늘의 마지막 일정이 또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필라테스도 오늘이 마지막날이다. 이렇게 다 하나씩 끝이 나는구나.


4:1 그룹 수업을 들었기 때문에(이게 제일 저렴하므로) 그간 선생님과 사담을 할 기회가 별로 없었다. 한 분에게 열 번의 강습을 모두 들은 게 아니기도 하고. 처음 등록을 받아주셨던 분이 주로 오전 수업을 담당했는데 지난번에 한 번 다른 수강생이 결석을 하는 바람에 나 혼자 수업을 들었던 적이 있다. 그때 한 달 살러 오는 사람은 많이 있냐,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됐냐 등등 몇 마디 사담을 한 번 나누었던 적이 있고 오늘은 마지막 수업인 걸 알고 있어서 몇 마디 이야기를 더했다. 승마장에서와 같지는 않았지만 가서도 운동을 계속 하실 거냐, 언제 떠나시냐 같은 가벼운 이야기들. 이쪽이 승마보다 전신을 써서 더 피곤하기 때문에 운동을 하러 갈 때는 서운한 마음이었지만 막상 운동을 끝냈을 때는 지쳐서 많은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오늘은 또 마침 통영에 있는 동기형과 점심 약속이 있기도 했고. 방으로 돌아와 옷을 갈아 입고 빨래를 돌려 놓고는 형과 점심을 먹으러 갔다.




오늘은 점심으로 고성에서 물회를 먹었다. 통영에 한 달 살이를 내려오기 전까지 난 물회를 좋아하는 편이 못 되었다. 신혼 초반에 아내와 속초로 1박 2일 여행을 갔던 적이 있는데 그때 유명한 물회집에서 물회를 먹었던 기억이 난다. 내가 썩 좋아하지 않아서 아내가 영 불편해 했던 것도. 10년쯤 전에 살았던 동네에도 가까이에 물회를 잘하는 집이 있어서 후배가 데리고 간 적이 있는데 그렇게 맛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아마도 거의 '이걸 왜 먹지?' 라는 쪽에 더 가까웠던 듯 싶다. 그랬던 기억이 지난 한 달 사이에 완전히 달라졌다. 물회가 나의 최애 음식 뭐 이렇게는 이야기할 수 없겠지만 여기에서 먹는 물회는 정말 맛있었다. 아무래도 이쪽 동네에는 물회에도 훨씬 신선한 생선이 들어가는 것 같다. 그리고 생선만으로는 맛이 이렇게 달라질 수 없겠지. 동네에 따른 조리법 차이도 있지 않을까 싶다. 오늘 아침부터는 남쪽도 바람이 불 때면 조금 쌀쌀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시원하게 물회를 먹었다. 게다가 식당에서 찌개로 매운탕도 나왔다. 이런 곁다리음식(사이드디시, 매운탕을 곁다리음식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들이 남쪽 지방 최고의 매력이다. 그러고 보니 내가 10년 전에 서울에서 사 먹었던 물회 가격과 지금 이곳에서 먹은 물회 가격이 똑같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형이 지난번보다 더 좋은 카페를 준비해 놨다고 가자고 했다. 친구도 나에게 추천했던 집이다. 지난번과는 또 다른 멋이 있는 곳이었다.



바람이 조금 불었지만 햇살이 너무 따뜻해서 형은 반팔만 입고 있었는데도 아마 전혀 춥지 않았을 것이다. 나 또한 하나도 춥지 않았으니까. 그야말로 천국이 따로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형과 이쪽 동네에서의 생활에 대해서 이야기 나누다가 기약 없는 이별을 했다. 지난번에 형과 처음 같이 식사했을 때도 적었지만 형과 같이 단둘이 식사를 해 본 건 여기 통영에 와서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앞으로 또 이런 기회가 있을까. 물론 회사 동기들의 조사에서는 함께 만나게 되겠지만.(이제 경사는 거의 지나갔다. 자녀 혼사라면 또 모르겠네.)


형과 헤어지고 난 뒤의 일정은 하나도 준비한 게 없었다. 일단은 먼저 지난 일요일에 방전되었던 배터리를 교체하기로 마음먹었다. 월요일에 주문해 둔 배터리 패드도 대리점에서 받아 둔 상태여서 이제는 가서 바로 교환만 하면 되었다. 월요일에 세 곳에 전화를 해 보았다. 한 곳은 8만 원을, 두 곳은 7만 5천 원을 달라고 했다.(현금가 기준) 그중 한 곳은 통영사랑상품권도 받는다고 했고 네이버 지도에도 그렇게 적혀 있었다.(의외로 제로페이 사용에 대한 네이버의 정보는 정확하지 않다.) 7만 5천 원에 통영사랑상품권으로 결제할 수 있으면 이게 최선이었다.(실제로는 6만 7천5백 원에 결제하는 셈이 되므로.) 전화상으로는 제로페이 모바일상품권은 잘 모르시는 것 같았지만 이왕 교체하기로 한 김에 안 되더라도 그쪽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금세 도착했다. 낮에는 차가 하나도 막히지 않으므로.


차를 사고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배터리 교환을 통영에서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갈 때가 되긴 했지만. 혼자서 우스개로 그런 생각도 잠시 해 보았다. '아, 이제 내 차에는 통영의 기운이 함께하겠구나!' 배터리 교환은 금방 끝났다. 아쉽게도 제로페이 상품권 사용은 되지 않았다. 안 그래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현금가와 상품권가는 같을 수가 없는데 상품권을 받을 경우 매출이 잡히지 않겠는가. 사장님께서 종이상품권은 자기가 받아서 다시 다른 가게에서 써도 되기 때문에 그냥 해 준다고 하셨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럴 수가 있었구나. 그래도 배터리 교체 전에 미리 검색으로 조금 알아보았는데, 7만 5천 원이면 그렇게 비싼 가격은 아닌 것 같다. 최저가는 아니겠지만. 서울에서야 내가 아니어도 가게에서 팔 사람이 널렸으니 상관없는데(여기도 뭐 그렇겠지만) 이왕이면 지역경제 활성화에 도움을 주는 게 조금 낫지 않을까 싶다. 쓸데없는 소리를 한마디 덧붙이면 나는 기름도 가능하면 서울 아닌 곳에서 넣는다. 서울은 어렵다 어렵다 해도 우리나라에서 경제가 가장 활성화된 곳이다.


자, 이제는 정말 뭘 해야 하나.


마지막은 봉수길에 발자국을 남기고 싶었다. 봄날의책방에도 한 번 더 가 보고, 봉수길의 한적함을 다시 한번 느껴 보고 싶어 그쪽으로 향했다. 아직 금요일 낮이라서 손님이 없는 봄날의책방 점원과도 이야기를 좀 해 보고, 미륵산 입구까지 봉수길을 한 번 더 산책했다. 보름 전쯤 후배가 갑자기 통영에 찾아왔던 날, 그날도 낮에는 봉수길에 있었다. 그때는 처음 걷는 길이라 훨씬 더 길게 느껴졌었는데 그렇게 길지는 않구나... 익숙해지면 뭐든 짧게 느껴진다. 좌우로 식당도 참 많았다. 하나씩 하나씩 모두 가 보고 싶었는데 몇 곳 가 보지 못했다. 오늘은 드디어 세 번째만에 [내성적사롱 호심] 방문에 성공했다. 일요일에도, 평일에도 모두 문을 닫았었는데 오늘은 열려 있었다. 손님은 아무도 없었지만.


점심 때는 아침바람이 조금 쌀쌀했기 때문에 따뜻한 커피를 마셨다. 햇살이 너무 따사로웠던 까닭에 오후에 내성적사롱 호심에서는 오미자 셔벗을 주문했는데 차갑고 뜨거운 순서가 뒤바뀌었어야 했다. 4시 전후로는 금세 쌀쌀해지기 때문에 나중에는 먹으면서 너무 추웠다.


한때는 이곳에 내려와서 통영도 너무 좋고, 함안의 승마장도 너무 좋아서 기회가 있으면 언제고 다시 또 여기에 와서 이렇게 한 달을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다음에 한 달 살이 할 기회가 있으면 어디에 살지? 하고 떠올려 보다가 아직 내가 우리나라에 가 보지 못한 곳이 너무나도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평생을 달마다 거처를 옮기며 산다면 그중 몇 번은 또 통영에 와서 살아도 좋겠지만, 지난 8년간 아니 훨씬 전에 내가 사회생활을 시작했을 때부터 십수 년 동안 이렇게 한 달 살이 할 기회를 얻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는 데에 생각이 닿고 나니 다음 번에는 또 가 보지 못한 다른 곳을 가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깨달음에 다다랐다. 그 생각을 해서일까. 이후로는 이곳에서 보내는 하루하루가 너무 소중하고 통영을 떠난다는 생각에 무척이나 쓸쓸해진다. 다시 또 언제 이곳을 올 수 있을지 기약이 없어서. 추위 덕분에 약간 뿌옇던 안개도 모두 사라지고 청명하기 이를 데 없는 푸른하늘조차도 외롭고 서운하게 느껴졌다. 사람이 아니라 지역과의 헤어짐도 또한 그렇구나. 하긴, 통영이 아주 가까운 도시도 아니다. 강원도는 그래도 비교적 서울에서 가까운 편이라 언제고 편하게 다시 갈 수 있는 편인데 통영은 정말 멀다. 다음에 이쪽까지 올 정도의 결심이 선다면 아마 가 보지 못한 또 다른 곳을 가는 쪽으로 계획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출장으로라도 오고 싶다. 이곳에 다시.


봉수로에서 돌아올 때는 미륵도를 밖으로 한 바퀴 돌았듯 도천동에서 명정동을 서쪽 해변을 끼고 천천히 한 바퀴 돌아왔다. 여기에 와서 그쪽을 돌기는 처음이었다. 통영은 제주와 달라서 아직 발견되지 않은 명소, 개발되지 않은 땅이 많다. 제주는 섬을 돌다 보면 그럴 듯한 장소에는 어김없이 카페나 다른 가게들이 들어서 있는데 통영은 해안선은 긴 반면에 아직 제주만큼 사람이 많지 않고 관광객도 그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인 것 같다. 특히 여전히 시내 관광이 사람들로부터 주목받고 있어서 그런 면도 있을 듯하고. 서쪽으로 한 바퀴 도는 길은 또 색다른 느낌을 주었다.



점심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또 내성적사롱 호심에서 셔벗까지 먹은 상태라 저녁은 크게 생각이 없었는데 내일 참치회를 미리 예약하러 갔던 식당에 들어서니 괜히 또 한 가지 음식이라도 더 먹고 싶은 마음이 동해서 지난 화요일에 먹지 못했던 생참치덮밥을 시켰다. 친구가 강하게 추천한 집이다. 우리나라에서 직접 참치를 양식한다고. 사진으로도 보이지만 덮밥이 정말 실하다. 회가 아주 많이 들어 있다. 신기한 것은 회 아래에 밥이 간이 되어 약간 볶아져 있다고 해야 하나? 그냥 흰쌀밥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니다. 처음에는 회만 따로 먹고, 그다음엔 다른 것들과 같이 먹다가, 김에 싸 먹기도 하고, 마지막엔 밥에 비벼서 먹었다. 회는 조금 비싼 편인데 물론 덮밥도 저렴한 것은 아니지만 못 먹을 가격은 아니어서 더 일찍 알았다면 더 일찍 와 봤으면 좋았겠다 싶다.


내일도 거의 저녁 전까지는 통영에 머무르겠지만 어쨌든 오늘이 통영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이다. 다음에 내가 또 이런 말미를 얼마나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고 그때는 또 기회가 있다면 다른 지역에서 한 번 살아봐야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저녁을 먹고도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주차장으로 가는 길에 남피랑산이 저녁을 맞아 디피랑으로 변신해 있었는데 입장하진 않았지만(입장권이 무려 1만 5천 원이다) 천천히 불이 켜진 조각공원과 남망산을 아래로 둘러 보았다. 통영 시내의 아경과 멀리 케이블카 옆으로 보이는 루지 타는 등도 보고. 이곳에 도착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한 달이 지났다니.


회사를 두 달 쉬게 되었을 때에는 처음 보름은 서울에서 여유를 만끽하고 그 뒤 한 달을 지역에 내려와서 한 달 살이 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보름을 다시 서울에서 마무리하고. 여러 가지 변수로 막판 한 달을 지역에 내려와서 사는 쪽으로 바뀌었는데 역시 처음 계획이 좋았다는 쪽으로 생각이 기운다. 회사 복귀도 우울한데 통영을 떠나는 것도 마찬가지로 우울하다. 그 둘이 겹쳐 오지 않게끔 했어야 했는데 미처 그 생각을 못했지 싶다. 하긴, 계획한 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이지. 여기에 와서 배터리를 갈 게 될 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이렇게 통영의 마지막 밤이 저물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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