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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nest Sep 13. 2023

믿을 수 없는 일들

모르는 번호다. 이야, 기특하네. 스팸 전화일 확률이 높은데 휴대전화 번호까지 도용하고 있다니. 기특하단 생각을 하면서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저 최다비입니다.' 최다비? 최다비라니. 이름을 듣는 순간 모를 수가 없었다. 90년대 후반 큰 인기를 끌었던 혼성그룹 비쥬의 여성보컬 최다비. 내가 비쥬의 팬은 아니었지만 중학교 3학년 때 친구 중의 한 명이 비쥬의 완전 광팬이었다. 어떻게 해서 내가 비쥬의 여성보컬 최다비 씨로부터 전화를 받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하려면 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지난 2015년 12월 회사에서 행사가 있었다. 그 자리에 최다비 씨의 남편이 참석했다. 사람들은 잘 모르는 것 같았지만 난 첫눈에 최다비 씨를 알아봤다.(저에게는 안면과다인식장애가 있습니다. 신문에서 증명사진 한 번만 나왔던 사람도 다 알아봄) 물론 비쥬가 유명했던 건 거의 15년 전이기 때문에 나도 확신할 수는 없었다. 행사가 끝나고 저녁까지 먹은 다음에 헤어지기 직전에야 겨우 용기를 내어 물어볼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때까지도 '최다비'라는 이름도 잊고 있었다. 다만 '비쥬'라는 그룹명은 나의 청소년 시절과 함께였기에 잊지 않고 있었다. '저기, 혹시, 실례지만...' 그 남편분이 더 반가워했다. 아마 알아보는 사람이 없어서 말은 안 해도 서운하지 않았을까. '괜찮으시다면 실례지만 사진 한 장...' 남편분께서는 적극 사진 한 장 같이 찍으라고 했는데 최다비 씨 본인이 사양하였다. 그게 벌써 8년 전의 일이다.


너무도 신기했다. 그 옛날 텔레비전에서나 볼 수 있었던 사람을 내가 이렇게 직접 만나다니. 그리고 그 사람이 내 바로 앞에 있고, 아까 같이 술잔을 마주쳤다니. 생각해 보면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다.




첫 회사에 취직해 부산으로 출장을 갔을 때였다. 세상에, 세상에! 거기에서 축구선수 이상윤 씨를 만났다. 요즘 애들에게 이상윤이라고 하면 아마 누군지도 모를 것이다. 그런데 비쥬도 마찬가지이지만 내 세대는 다르다. 1997년 프랑스월드컵 최종예선 2차전에서 우리나라는 이상윤의 결승골로 우즈베키스탄에 2대 1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우와. 그때 그렇게 전 국민이 바라보던 사람을 내가 단둘이서 만나다니. 아마 지금도 어딘가에 그때 이상윤 씨에게 받은 명함이 있을 것이다. 어안이 벙벙했다. 이상윤 씨가 우즈베키스탄 전에서 결승골을 넣은 게 14년 전이었다. 선수로는 은퇴를 하고 코치로 지낼 때였는데 한때 전 국민의 슈퍼스타가 내 앞에 나와 단둘이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지경이었다.


대통령을 바로 앞에서 본 적도 있고 십 몇 년 전에는 콘서트장에 갔다가 손석희 씨에게 인사했던 경험도 있다. 재작년이었나, 그보다 1, 2년 쯤 전인가는 클래식 공연을 들으러 갔다가 박지만 씨도 보았다.(이게 다 안면과다인식장애로...) 아, 그러고 보니 어제, 그제는 이틀 연속으로 전 국민적 영웅인 정은경 전 질병관리청장님을 만나 인사도 드렸구나. 마스크를 쓰고 계셨는데 눈빛만 보고도 바로 알아보았다. 다만 이런 경우는 다 스치는 인연일 뿐이다.


그저 나는 내 할 일을 했을 뿐인데... 내 할 일을 하러 갔을 뿐인데... 한때의 국민적 축구선수 이상윤 씨를 만나고, 비쥬의 최다비 씨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20년 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너무 신기해서 믿을 수가 없다. 그러고 보니 내가 직접 만난 건 아니지만 정말 신기했던 기억이 또 있다.


최다비 씨가 한참 활동하던 당시, 남자 중학교의 빅2는 사실 S.E.S.와 핑클이었다. 단언컨대 나는 두 걸그룹에 단 한 푼도 쓰지 않았지만 친구들은 필통이며 등등을 걸그룹으로 도배하기 바빴다. S.E.S.에서는 유진과 슈가 인기의 선두를 다투었는데, 그때만 해도 요정이라고 불리던 걸그룹이라 과연 나중에 얘들은 누구와 결혼을 할까, 결혼은 하긴 할까, 그런 행운아는 누구일까 상상의 나래를 펼쳤던 예전이 기억 난다. 그런데 군대에 있던 어느 날 깜짝 놀랄 소식을 접했다. 내가 슈파는 아니긴 했지만(나는 슈보단 유진) 슈가 학교 선배와 결혼한다는 것 아닌가. 세상에. 그럼 슈의 시댁은 동네 사람인 거야? 믿을 수가 없었다. 세상에, 세상에, 이런 일이 생긴다니. 누군가에게는 그런 기적이 일어나는구나 싶었던 생각이 난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대학 시절 좋아했던 한 친구의 생일이다. 그때는 참 오래 많이도 좋아했었는데 결국엔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때 한 선배가 '너가 정말 오래 기다릴 수 있으면 아마도 잘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했었는데 그 친구로부터 나에게 호감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기까지 11년이 있어야 했다. 그랬구나. 이상윤 선수를 만나듯, 최다비 씨로부터 전화를 받듯 뭔가 오랜 시간이 있으면 그렇게 나에게도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이었는데, 안타깝게도 나는 11년을 기다리지 못했다. '이 친구와 결혼해야겠다' 싶었던 친구도 있었다. 결혼까지 생각했기에 한두 해 정도는 기다릴 수 있었는데 그나마 그 친구가 나에게 곁을 내어 주었던 건 거의 10년이 지나서였다. 그렇구나. 기적은 온다. 다만 시간이 오래 걸릴 뿐. 그리고 나는 그 오랜 시간을 기다리지 못했다.


하루하루 더 살아갈수록 세상은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의 연속이다. 나이가 들어도 신기한 일은 끊이지가 않네. 어쩌면 그래서 살아갈 만한 세상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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