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니가 좋아하는 대표적인 두 가지. 밥, 산책. 아침 공복 산책 후, 그리고 저녁 식사 전 산책 후 밥을 준다. "바니. 이제 무슨 시간~?" 하면 얼른 달라고 말하는 듯한 특유의 귀여운 소리와 신난 표정과 몸짓으로 집안 사방을 뛰어다녔다. 그런데 바니가 밥을 남겼다. 사료를 놀이처럼 바닥에 몇 알씩 던져주니 하나씩 먹으며 결국 밥그릇에 담긴 것도 다 먹었지만 그 다음날엔 밥그릇을 외면했다. 입양 후 초반에만 잠시 낯선 환경에 적응하느라 밥을 먹지 않았지만 규칙적인 산책과 하루 두 번 일정한 식사로 밥시간에 대한 기대감이 높던 아이였는데, 오랜만에 찾아온 이례적인 날이었다. 뭐가 문제일까, 건강검진 결과도 모두 정상이었고 이사 후 체중도 7.8kg 에서 8.6kg으로 늘었다. 기호성 때문도 아니고 도담이를 데려온 후로 바니에게 관심을 덜 준것도 아니기에 원인이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줄어든 산책시간
오전 6시 알람이 울리자마자 씻고 근무복으로 미리 갈아입은 후 7시에 산책을 나간다. 30분 산책 후 강아지 두 마리의 아침밥을 챙기고 나도 아침을 간단하게 먹는다. 9시까지 출근이지만 진료 시작 전에 처리해야 할 일들을 해치우기 위해 8시 15분에 집을 나서고 8시 30분에 도착하도록 한다. 점심시간은 1시부터 2시까지지만 칼같이 지켜지지 않는 날도 있다. 부랴부랴 신발만 갈아 신고 차에 시동을 건다. 왜 이 동네는 사거리가 이렇게 많은지 길고 긴 신호에 짜증을 내며 집에 도착한다.
현관문에 두 앞발을 짚고 나를 반겨주는 바니를 잠시 쓰다듬고 도담이의 배변패드를 확인한다. 똥이 보이면 치우고 도담이를 잠시 쓰다듬는다. 그리고 서둘러 바니에게 하네스를 채워 나가지만 주어진 시간은 길어봤자 10분. 집 주변 한 바퀴만 짧게 돌고 와서 전자레인지에 2분이면 되는 인스턴트 주먹밥을 순식간에 먹어치우고 다시 집을 나선다. 그리고 퇴근하자마자 저녁을 먹고 바니와 산책을 간다. 매일은 아니지만 내가 점심시간에 집에 오는 날은 이렇다. 그래도 다행히 교대근무를 하는 남자친구 덕분에 점심시간에 식사를 할 수 있는 날들이 많아졌다.
그리고 퇴근 후 옷을 갈아입고 도담이가 잘 있는지 확인 후 저녁을 먹는다. M이 함께 있을 땐 푸짐한 한 상을 차려먹는데 밥을 차리고 먹고 치우는데만 한참 걸린다. 소화가 되기도 전에 무조건 7시 반이 되면 바니와 산책을 나간다. 저녁 식전에는 30분. 산책 후 두 마리의 저녁밥을 챙기고 잠시 쉬는 시간을 가진다.
좀 쉬다 보면 벌써 10시가 넘어버린다. 아직 배울 게 많은 신입이라 늘 긴장한 탓에 집에 오면 모든 게 귀찮아져 버린다. '오늘은 30분만 할까, 아니면 옥상에 정원만 잠시 가서 소변만 보게 하고 들어올까, 일찍 자고 싶은데...' 이런 생각이 들어 산책시간이 점점 짧아졌던 것이다.
입양 초기부터 이사 후 취업 전까지를 돌이켜보면 산책 횟수는 매일 5번, 최소 30분에서 최대 2시간까지 매일 3시간 이상의 산책 시간을 지켰다. 그리고 취업 후 4번으로 줄었고 매회 간격도 1~2시간 늘었다. 출근 전 30분, 점심시간에 M이 집에 없을 땐 최대 10분, 퇴근 후 30분, 자기 전 10분~30분.
활동량이 줄어서 산책을 다녀와도 낑낑거리고 밥을 안 먹는 것 같아서 자기 전 산책을 1시간 반으로 늘려보았다. 다음 날 아침밥을 주자마자 며칠 굶은 것처럼 코를 박고 먹어 치웠다. 아침에도 조금 더 일찍 일어나 1시간 정도의 산책을 갔다 오니 낑낑거림이 줄어들었다.
가장 힘들 때는 매달 내가 마법게 걸리는 주간이다. 운동을 해도 몸이 무겁고 참아왔던 게으름이 폭발하면서 악마의 속삭임이 시작된다.
아침: "아직 6시야. 조금만 더 자고 머리는 어제저녁에 감았으니까 씻지 말고 그냥 7시 반에 바니 산책만 갔다 와서 옷만 갈아입고 출근하자."
저녁: "바니 아까 30분 나갔다 왔으면 됐잖아. 이따 자기 전에는 5분만 해도 돼. 영하 13도에 1시간을 어떻게 갔다 올래? 손 시리게. 너도 쉬어야지."
마치 조종을 당하는 것처럼 알람을 끄고 다시 잠에 들었다가 산책 시간이 부족해지기도 하고, 저녁 먹고 잠시 쉬려고 누웠다가 그대로 아침까지 잠든 적도 있다. 마음 같아선 일찍 잠들고 일찍 일어나고 싶지만 자기 전 산책과 아침 산책 사이의 간격, 그리고 아침 산책과 점심시간 사이의 간격이 너무 길어지지 않게 하려고 강박적으로 시간을 정해놓았다. 그래도 다음날이 쉬는 날이면 밤산책을 2시간을 다녀와도 마음이 편하다.
직장에 다니기 전 지원자 시절을 회상하며 현재 고정수입이 있다는 게 마음은 편하지만 바니와 예전처럼 같이 시간을 많이 보낼 수 없게 되었고, 도담이를 데려온 후 두 마리를 키우는 게 처음이라 그런지 더 여유가 없어졌다. 집안일도 돌아서면 밀려있다. 할 일은 산더미가 되고, 꾸준히 하던 독서를 매일 30분이라도 다시 해보려고 앉아서 책을 펼쳐도 정신은 끝내지 못한 일들에 향해있다. 며칠 전 중성화 수술을 한 도담이가 실밥을 제거하는 날에 1차 접종을 하기로 했고 5차 접종이 끝나면 바니와 개별적으로 산책을 시킬 예정이다. 그땐 아마 내가 좋아하는 커피 한 잔의 여유조차 사라지겠지. 피곤한 날엔 불평이 많아진다. 오늘이 그런 날이다.
그럼에도 불평이 고개를 들 때마다 내가 가진 것들을 세어본다.
집에서 가까운 직장 덕분에 적은 월급이지만 고정수입이 있고 점심시간에 바니를 챙길 수 있다. 그리고 쉬는 날에 정말 휴식이 필요할 땐 교대 근무를 하는 M덕분에 근무 스케줄에 따라 강아지들을 나 대신 돌봐줄 수 있다. 유기견이었던 바니와 파양을 네 번 당하며 학대를 당했던 도담이에게 따뜻한 집과 음식을 제공해 주며 건강하게 키울 수 있고, 에너지가 넘치는 실외배변 고집쟁이 바니 덕분에 나는 하루도 고강도의 유산소 운동을 거르지 않게 되어 매일 25000보를 넘게 걸어도 거뜬한 체력을 유지하고 있다.
첫 출근 이후 벌써 한 달이 되었다. 내가 뭘 해야 하는지 도저히 감이 오지 않았던 날들은 지나가고 어느 정도 적응 되어 자연스럽게 업무 동선에 스며들었다. 퇴근 후 여전히 긴장이 풀려 늘어지지만, 게으름을 퇴치하기 위해 15분가량의 근력운동을 저녁 루틴에 추가하고, 하루의 마지막 산책 전 30분이라도 읽고 싶은 책을 꺼내 몇 페이지라도 읽는다.
깨끗하게 비워진 바니와 도담이의 밥그릇과 곤히 잠든 두 마리의 숨소리를 들으며 다시금 다짐한다. 나의 일상이 단단해지는 만큼, 이 아이들의 세계도 더 넓고 따뜻해질 것이라고. 비록 예전처럼 온종일 함께할 수는 없어도, 퇴근길 나를 반기는 꼬리짓과 함께 있는 순간들이 나를 버티게 한다. 완벽하지는 않아도 충분히 사랑스러운, 우리 네 식구만의 새로운 계절이 그렇게 시작되고 있다. 오늘도 고된 하루였지만 기분 좋은 피로감 속에 하루를 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