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라는 울타리 밖으로 아이들을 내보낼 준비를 하며
고등학교 3학년 담임을 맡으며 의식적으로 쓰지 않는 표현이 있다.
'대학을 보낸다.'
이 짧은 한 구절 속에도 우리나라 교육의 문제점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 학교는 서울대를 몇 명 보냈대?"
"올해는 우리학교도 서울대를 좀 보내야 할텐데."
"대학 보내기가 이렇게 어려워서야..."
위 문장들 어느 것에도 주어로 '학생'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
학교나 교사, 부모가 그 자리를 대신할 뿐.
아이들은 자신이 진학할 대학과 학과를 고르는 것이 여간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럴 수밖에. 온전히 진로에 대해 고민하기도 버거운 시간에, 대학은 '잘' 가야 하는 것까지 신경써야 하니.
'잘'이라는 부사어 속에는
'서울에 있는 4년제, 누구나 들었을 때 이름과 위치가 금세 떠오르는 대학'이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누가 그곳들이 누구나의 삶에나 가치가 있다고 증명을 한 것도 아닌데, 하나같이 이유는 알려고 하지도 않은 채 모두 대학을 '잘' 보내고 싶어 한다.
나역시 대학에 '보내졌다'.
대학에 원서를 쓸 때까지도,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잘 할 수 있는지
단 한번도 진지하게 고민해보지 않았다.
마지막에 전공을 선택한 이유도 단순히 그 과가 모집 정원이 조금 더 많았기 때문이었다.
대학에 보내진 내가 이제는 어디를 향해 어떻게 가야할지를 스스로 정하는 데만 족히 10년은 걸린 것 같다. 수많은 갈림길에서 난 언제나 우연히, 쉽게 얻어걸린 길들을 택했고 그 길을 걸으면서도 그 길이 맞나를 고민하며 방황했다.
무엇보다 내가 나의 삶에 대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믿음이 없었다.
그랬기에 늘 학기 초에 아이들과 학부모에게 이야기한다.
대학은 보내지는, 혹은 보내는 곳이 아니라고.
아이들 입장에서 대학에 보내지는 순간
그것이 원하는 결과였다면 이후에도 수년을 자신보다 자신을 대학에 보낸 이의 판단을 믿으며 의존할 것이고
원하는 결과가 아니었다면 대학을 보내려고 했던 이들을 원망하느라 세월을 보낼 것이다.
진학 지도를 하며
아이들의 응답에
"그건 누구의 생각이니?"를 계속해서 물어보는 이유이다.
대학은 보내지지도, 보내지도 말자.
대학을 갈 수 있게끔 아이들의 고민을 존중해주고, 결정을 지지해주자.
그 속에서 아이들은 드디어 학교라는 울타리 밖을 벗어날 채비를 마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