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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송 Nov 06. 2020

하필이면, 그래도 다행히  

  며칠 전의 일이다.

올봄 졸업했던 아이들 몇 명이 학교에 놀러오겠다고 연락이 왔다. 워낙 착실했던 애들이라, 별 생각없이 오라고 했고, 그 중 한 아이는 아르바이트 하는 카페에서 자기가 번 돈으로 직접 산 거라며 작은 케이크를 두 개 들고 왔다. 뜯지 말고 그대로 가져가서 나보고 다 먹으라는데, 맛있는 걸 사주지는 못할 망정 케이크나 냅다 챙기고 싶지는 않아서 한 조각은 여기서 같이 먹고 한 조각은 내가 가져가겠노라고 얘기했다.

 그렇게 케이크를 먹으며 담소를 나누던 중 아이가 갑자기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며 서둘러 나갔고, 무슨 일인지 모르겠는데 엄마가 당장 집으로 오라고 했다며 죄송하단 인사를 남기고 떠났다.

잠시 후 나에게 온 메시지.

 '선생님, 저희 가족 중에 확진자가 나와서 지금 검사 받고 돌아가는 길이에요. 결과 나오면 바로 알려드릴게요. 죄송합니다.'


일단 확진자의 밀접 접촉자였던 아이가 음성 판정을 받기 전까지는 출근하지 말라는 보건 선생님의 권고를 받고 집에 도착해 방에 틀어박혀 있는 동안 계속 생각은 꼬리를 물었다.


 나는 사실 학교 내에서도 코로나 방역에 꽤 신경을 쓰는 축에 속한다고 자부해 왔다. 매일 교실에 들어가서 여기저기 닦아대고, 마스크 안 쓴애들에겐 수시로 잔소리를 하고, 가끔 방역에 별 신경을 쓰지 않아 보이는 교사가 있으면 뒤에서 흉도 봤다.

 그런데, 하필 그런 내가 이 일의 당사자가 되다니, 하필이면 작년에 제일 신뢰했던 아이가 케이크를 들고 나타났고, 퇴근 시간 전이라 하필 학교 안으로 아이들이 들어왔고, 평소에 케이크는 입에도 안대던 내가 하필 케이크를 먹자며 마스크를 벗었다. 그리고 나는 하필이면 고3 담임 교사이기까지 하니. 하필 걔는 왜 가족 모임에 갔고, 하필이면, 하필이면...


큰 실수에는 늘 '하필'이라는 말이 따라붙는다. 하필이면 일을 그르칠 수밖에 없는 여러 조건들이 층층이 겹쳐 있고, 거기에 '괜찮겠지'가 더해지는 순간, 작은 방심은 큰 실수가 되어 빵 터지고 만다. '실수'와 '책임'의 간격을 조금이라도 더 띄어놓기 위해 '하필'이라는 단어를 그 사이에 집어 넣는 순간, 내 '책임'은 '하필'의 대상에게 전가되는 기분이 들고, 그럴수록 '하필'로 이어지는 생각은 꼬리를 문다. 어느 지점에 가서는 '하필이면 왜 나를 낳아가지고' 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되지 않을까.


 '하필'의 꼬리를 끊어주었던 것은 '다행히'였다.

 다행히 아이들이 왔을 때 엘리베이터가 붐벼서 나와 아이들은 계단으로 올라갔고, 다행히 아이들이 원래 학교에 오기로 한 시간보다 약간 늦게 도착한 덕에 재학생들의 하교 직후라 재학생과 졸업생 아이들의 동선이 겹치지 않았다.  다행히 아이들이 교무실에는 들르지 않았고, 다행히 그날따라 같은 교무실을 쓰는 선생님들도 일찍 퇴근하셔서 그 아이가 온 이후 나와 마주친 선생님이 없었고,

 '하필'로 시작하는 문장의 나락에 빠져 있다가 마치 '다행히'라는 동앗줄을 붙잡은 심정이랄까.


그리고  다행히 그 졸업생과 다른 가족 모두 음성으로 판정이 났다는 연락이 오며 하룻밤 넘게 계속된 '하필'과 '다행히'의 줄다리기는 다행히 '다행히'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교감 선생님은 민망한 마음에 어쩔 줄을 모르는 나에 수능을 앞두고 방역에 더 신경을 쓰는 계기가 되었다며 오히려 다행이라는 인사를 건네셨다.


 조회를 하러 들어가 보니 매일 돌부처처럼 자기 자리에 앉아 공부만 하던 아이가 책상에 엎드린 채 깊이 잠이 들어있다. 올해 입시를 마주한 아이들이야말로 '하필'이라는 말을 듣거나 내뱉어야 하는 일이 너무나 많았던 한 해였다. '하필'로 시작되어 '다행히'로 마무리 지은 코로나 (간접)경험담을 이야기하며 입시가 마무리될 때까지 개인 위생에 신경 써주기를 당부하고 교실을 나오면서,  시간이 지나고 나서 이 아이들의 인생 속에 2020년이 '다행스러운' 해가 될 수 있기를, 잠시 기도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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