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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송 Nov 07. 2020

관계에서의 작용과 반작용

  S교사에 대해 좋은 말을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와 관련한 여러가지 에피소드들이 근거가 되어, 뒤에서 수많은 험담들이 나돌았다. 누군가의 흉을 보는 것은, 이래도 될까 싶은 모래알만큼의 자책감과, 바위 만큼의 쾌감을 선사하기에 나역시 "어머, 진짜?, 미쳤다." 등의 말들로 대응을 해가며 S 흉보기에 동참하곤 했었다. 어른들의 세계에서 사용하기엔 유치한 단어라 아무도 대놓고 표현은 하지 않지만 S는 교무실의 은따였던 것이다.

  그러다 몇 년 전 S와 업무를 같이 할 일이 있었다. 일을 시작하기도 전, 학교에서 누군가를 마주치기만 하면 죄다 "에구, 고생이겠네.", "애쓴다, 조금만 참아." 등등의 이야기를 해댔고, S와 비교가 되며 나는 뭘 한 게 없는데도  절로 우월감을 느끼는 지경이 되었다. 하지만 막상 S와 일을 함께 해 보니 그간 내 생각과 너무 다른 거다. S는  본인이 맡은 일은 기한 전에 꼼꼼하고 완벽하게 처리를 했고, 기한을 못 맞추거나 실수를 하는 것은 늘 나였다. S는 본인의 일이 끝나면 내가 했던 것을 살펴보며 실수를 잡아  수정해 주기도 했고, 내가 실수에 대해 사과하면 "아유, 나도 그냥 시간이 나서 잠깐 훑어 보다 우연히 발견한 건데요 뭐. 이 정도 실수 안 하는 사람도 어딨나요."하며 날 다독였다.


 뿐만 아니라 S는 동식물에 대해서도 박식했다. 내가 교무실에 앉아 졸고 있을 때, 밖에서 지저귀는 새 소리를 듣고 "직박구리가 우네."라든지, "학교에 피어 있는 00꽃 봤어요?"라며 머리털 나고 처음 들어보는 꽃 이름을 알려준다든지, 그간 무심코 지나쳤던 학교 안의 풍경들에 대해서도 종종 들려주며 산책하다 찍은 사진을 보여주곤 했다.

 아침에 잠이 부족해 다크서클을 늘어뜨린 채 앉아 있으면, 집에서 직접 볶은 원두로 내린 커피라며 책상 위에 슬쩍 커피를 놓고 가기도 했고, 아이가 병치레를 하느라 갑자기 입원을 하게 되어 학교에 못 가게 되자 아이를 위해서 기도해 주겠다며 이름을 물어 오기도 했다.


 S는 교사들 사이에서 '절대 지갑을 열 줄 모르는 구두쇠'라는 소문도 있었는데,  내가 "같이 밥 먹으러 가요."라고 말을 건네자 식사를 하고 이 근처 제일 비싼 커피 가게가 어디냐며 같이 가자고 하더니 이 집에서 제일 비싼 음료를 시키라며 닫혀 있기로 유명했던 지갑을  너무나 가뿐히 열기도 했다. 최근 몇 년간 같이 밥 먹으러 가자고 이야기를 들은 게 처음이었다며.  


 S와 함께 일을 하며, 결국엔 사람 관계도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교사들의 못된 습성 중의 하나는 다른 이들에 대해 평가의 잣대를 들이댄다는 것이다. 말 한 마디, 행동 하나를 가지고 그 사람은 이래서 좋은 사람, 그 사람은 저래서 나쁜 사람이라는 채점표를 만들어 버린다. 채점표가 한번 굳어져버리면, 쉽게 바뀌지도 않는다. 그저 모든 언행이 채점의 근거가 되도록 뒤에서 수근덕거리며 끼워 맞출 일만 남았을 뿐.


 그러나 사실, 내가 누군가에게 0점을 매겼다면, 내가 그를 0점의 태도를 보였던 것일 수도, 누군가가 나에게 100점인 사람이었다면 거꾸로 내가 그를 100점의 태도로 대했다고 평하는 것이 더 맞지 않을까. 사람의 모습이라는 것도, 원래부터 그러한 영역도 있겠지만 상황과 그를 대하는 다른 이들의 태도 속에서 역동적으로 변화해 가는 것이 아닌지. 그러니 어떤 사람도 누구에게라도 '저 사람은 ~~ 한 사람이야.'라는 단정을 하는 것이, 얼마나 오만한 생각인지.



 누군가에게서 흠을 찾아내기는 참 쉽다. 흠이 없는 사람은 없다. 누군가의 단점을 찾는 것은 쉬울 뿐만 아니라 재미도 있다. 그 기저에는 '나는 안 그런데' 하는 심리도 깔려 있어서 더 그렇다.

 거꾸로 얘기하면, 누구에게나 장점은 있다. 그러나 누군가의 장점을 알아채기 위해서는 나에게 없는 것들, 내가 잘 못하는 것들을 먼저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하기에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나를 냉정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관성으로 굴러가는 날 깨워 일으켜야 한다.


장점에 눈을 닫고 단점만을 바라볼 때 나도 단점투성이의 인간이 되는 것이고, 다른 이들의 장점을 찾아보려고 노력할 때, 나도 그것을 닮아가게 된다.



 그것이 곧 배움의 태도가 되지 않을런지. 결국에는 배움도 작용과 반작용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것은 아닐까. 그 어느 곳보다 학교는, 그 어느 누구보다 교사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작용하는 관계 속에서 배우고 깨쳐야 한다.


어린 시절 한문 학원에서 들입다 외우기만 했던 논어 한 구절의 의미를 이제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겠다.


'하상사(何常師) 어찌 정해진 스승이 있겠는가. 모두에게서 배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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