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의 주체가 스스로 행하는 동작을 '주동', 남에게 동작이나 행동을 하게 하는 것을 '사동'이라고 한다.
주동사를 사동사로 만들기 위해 사동접사를 써서 단어를 파생할 수가 있다. 그런데, 주동사와 사동사 사이에 묘한 관계가 성립하는 말이 있다.
'속다'와 '속이다'
'먹다/먹이다, 숨다/숨기다'처럼 다른 동사들은 두 개가 의미상 꼭 짝을 이룰 필요는 없다. 누가 먹이지 않아도 먹을 수 있고, 누군가 숨기지 않아도 숨을 수 있다. 그러나 무엇에 속는다는 것은, 누군가를 속이는 이가 있을 때 성립한다.
'속다'는 문법적으로 본다면 주체가 스스로 행하는 동작이라 볼 수 있지만, 의미상으로 본다면 속는 것을 스스로 행한다고 해석하면 이상하다. 주체의 의지보다는 '속이는 사람'의 계략이 더 많이 작용하기 때문에 그러할 것이다.
내가 처음 제대로 속았던 것은 대학교 2학년 때였다. 강남역 부근의 영어 학원을 다니고 있던 터라 학원 수업을 마치고 역으로 걸어가고 있는데, 후줄그레하게 옷을 입은 남자 두 명이 접근했다.
"저기요, 제가 부산에 사는데, 회사 면접이 있어서 서울에 왔거든요. 그런데, 지갑을 잃어버려서 오늘 집에 가야 하는데 버스표를 살 돈이 없네요. 혹시 돈을 빌려주실 수 있으면 제가 꼭 계좌로 넣어드릴게요."
어찌나 절절하게 눈물까지 글썽여가며 얘길 하는지, 나는 차마 해서는 안될 말을 하고 말았다.
"얼마면 될까요?"
남자들은 15만원을 요구했다. 나는 지갑에 현금이 없으니 근처 편의점에 있는 ATM기기에서 인출해 주겠노라고 했다. 편의점까지 따라 오던 남자들은 "괜찮으시다면 20만원은 안될까요?"라고 물었다.
집에서 막 한 달 용돈으로 30만원이 날아왔던 터, 20만원을 건네고 내 통장에는 10만원이 남았다.
자취방에 돌아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남자들이 건넨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연결이 될 턱이 있나.
버스 타는 중이라 못 받나. 싶은 마음에 한참 뒤에 몇 번 전화를 해 봐도 역시 전화 연결은 되지 않았고, 나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속. 았. 다."
그제서야 그들이 '사기꾼'일 수밖에 없던 온갖 정황들이 머리를 스쳤다. 부산에서 올라왔다고 해놓고 경상도 사투리를 쓰지도 않았고, 지금 시세로도 버스표 2장의 가격은 15만원을 한참 밑도는데, 마지막 순간 나는 거기에 5만원을 더 얹어서 준 꼴이었다. 없어진 돈보다 이렇게 허술한 사기에 쉽사리 넘어가는 날 보며 그들은 속으로 얼마나 쾌재를 부르며 비웃었을까를 생각하니 눈물이 핑 돌았다.
당시 남자 친구였던 남편은, 그런 바보가 어딨냐며 놀라더니, 곧 날 놀렸고, 아버지는 이야기를 듣더니 호탕하게 웃으며 몸 안 다친 것만도 다행이라고 다음부턴 조심하라고 하셨다. (이게 남과 가족의 차이인가)
그 와중에 둘이 공통적으로 했던 말은 "수업료 냈다 치자."였다.
수업료라니. 세상은 속고 속이는 곳이고, 모르는 이는 늘 경계해야 하고, 상대방의 선의를 악용하려는 이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게 수업이라면, 그 수업 참 별로다.
십여 년전 내가 담임을 했던 O는 학교에서 야무지고 밝은 아이였다. 학교에 어머니가 한번 찾아오셨었는데, 내가 O를 칭찬하면, "아유, 선생님이 잘못 보신 거에요. 걔 집에서는 엉망진창이에요. 호호호."라며 웃으시는 모습이 참 유쾌하게 느껴졌었다. 진급을 하고 학교에서 마주칠 때도 늘 깔깔대고 누구보다 즐거워보였다. 그래서 O가 졸업을 할 무렵, O의 동생을 담임한 동료 교사에게 듣게 된 소식은 충격적이었다. 가족 전체가 누군가에게 사기를 당했고, 전재산이 통째로 사라졌단다. 학교 인근에서 제일 비쌌던 아파트에 살던 O는 졸지에 근처 재래시장 옆에 있던 단칸방으로 이사를 했고, 고가의 외제차를 몰고 학교에 오셔 모두의 눈길을 끌었던 그 아이의 어머니는 식당 일을 나가시다 허리를 다치셔 누워 계신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O는 학교에서 명랑하게 지냈다. 뭐라도 도움이 될 수 있는 게 없을까 싶어 조심스레 내색을 할라치면 "저 괜찮아요 선생님, 히히."하며 웃어 넘겼고, 난 속으로 막연히 어린 O의 의연함을 대단하다 여겼었다.
이제서야 생각해 보니, O는 그 사건 이후 누구도 믿지 않았던 건 아닐까 싶다. 자신을 향한 도움의 손길마저 차단하려고 스스로 벽을 쌓아 올린 것 같다. 너무나 어린 나이에, 너무나 큰 '수업료'를 지불하고, 세상과 담을 만들어버렸다. 졸업을 한 이후에도 여전히 연락을 주고 받고 가끔 만나기도 하지만, 예전의 밝은 미소는 O에게서 사라져버린 것 같다.
누군가를 속인다는 것은 참 잔인한 행위다. 그동안 '믿음'으로 쌓아왔던 관계나 세상에 균열을 만들고, '의심'으로 그것들을 이어 붙이게 한다. 신뢰나, 호의에 처절한 대가를 치르게 만들고 만다. 속고 속이는 게임으로 돌아가는 사회는 너무나 불행하다.
얼마 전 중고 물품 판매 어플에서 근처 동네 사람에게 물건 하나를 구입했다. 겉으로 말짱해 보였던 게 사용하려고 보니 약간 고장이 난 것 같았다. 고장이 난 걸 알고 판 걸까, 몰랐을까, 돈을 돌려주라고 요청을 해볼까, 전화를 걸어 화를 내 볼까, 한참을 고민하다 '~~를 사용하려고 하니 고장이 난 것 같네요. 혹시 근처에 수리를 맡길만한 곳이 있을까요?"라고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결과는 묵묵부답.
아, 나 또 속았나. 역시 아무나 믿으면 안 되는 건가. 항의성 문자를 보낼까 했다가, 신경 쓰고 있는 것 자체도 피곤해서 마음을 접었다.
그러다 며칠 뒤 날아 온 문자
'어머, 죄송해요. 문자 메시지를 지금에서야 확인했네요. 제가 꼼꼼하게 확인을 했어야 했는데. 제가 사시는 곳하고 가장 가까운 수리점을 찾아봤어요.'
그래, 그래도 아직은 '속다'와 '속이다'의 쌍이 내 삶을 차지하진 않았구나. 그렇게 감동까지 받을 일은 아닌 것 같은데 혼자 대단한 행운이라도 얻은 양 문자를 받으니 신이 났다. 또다른 의심으로 채워질 뻔한 내 차가운 시선이 녹아내렸다.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도 부디 계속 이래야 할텐데.
(참, 나에게 바보냐고 핀잔을 주었던 남편이나 날 위로했던 아버지마저 그 이후 나보다 훨씬 더 고액의 '수업료'를 지불했다. 나는 '속고 속이는 세상' 속에서 소액을 지불하고 큰 깨달음(?)을 얻은 나름 엘리트였던 것. 씁쓸하지만. 후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