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데리고 집앞 놀이터에 나갔는데, 멀리서부터 재잘대는 여자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놀이터에 도착하니 초등학교 고학년쯤 되어 보이는 아이들의 소리들이 놀이터를 가득 메우고 있었는데, 재잘댐이라기보다 성토 대회라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이야기들이었다.
"야, 그 할머니 진짜 이상하지 않냐. 자기 손자를 데리고 와서 '우리 애가 타고 싶어 하니까 좀 비켜 줄래?' 라고 하면, 우리가 비켜줘야 해? 놀이터는 공공 시설 아니야? 늦게 왔으면 기다려야지."
"맞아 맞아. 우리가 그네를 오래 탔는지, 조금 탔는지 어떻게 알아? 그리고 더 웃긴 게 뭔지 아냐? 기껏 비켜줬더니 그 손자가 그네에 잠깐 앉아 있다가 싫다고 바로 내렸잖아. 타고 싶긴 뭘 타고 싶어해."
이 두 마디에 성토 대회가 열리게 된 전말이 파악되었다. 아이들은 연신 날카로운 목소리로 각자의 분노를 표출했다.
"그리고, 응?아니 거기서 왜 우리 엄마 아빠를 들먹여? 너네는 엄마, 아빠한테도 이렇게 얘기하냐?라니."
"그니까. 진짜 어이가 없어서. 그리고 우리가 얘기한 게 뭐가 어때서. 텔레비전 보니까 금쪽같은 내새끼에서 오은영 박사가 말대꾸하지 말라고 하면 안된대. 말은 대답하라고 있는 거래. 그래서 우리가 대답한 건데 왜 그래?"
이쯤 듣고 보니 초딩과 할머니 사이에서 무슨 말들이 어떤 톤으로 오갔을지도 대충 그려졌다.
사실 아이들이 이야기하던 말 중에서는 딱 틀렸다고 꼬집어 얘기할 수 있는 부분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나였다. 아이들의 앙칼진 목소리를 들으며, 자꾸 마음 속으로 할머니 편에 서게 되는 것이다. 교사인 티라도 내는 것처럼, 날카로운 문장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뭐라도 한 마디 해주고 싶은 충동이 가슴팍까지 올라왔다. 아, 이것이 세대차이인 것인가.
요즘 '90년대생'이 화두가 되고 있다. '90년대생'으로만 검색어를 쳐봐도, 그들에 대한 책들과 기사들이 주르륵 쏟아진다. 남편도 회사 연수에서 강사에게 들었던 말이 인상적이었다며 내게 전해 준 적이 있다.
"그 강사가 그러는데, 90년대생은 그냥 교포라고 생각하라던데. 한국말 잘하는 교포라고 생각하래. 1인당 국민 소득이 3백 달러였던 시대를 살아 본 세대가 국민 소득 3만달러 시대를 사는 사람들을 어떻게 이해하냐는 거지. 그냥 교포 대하듯, 일 해야 될 게 있으면 정확히 딱 무엇 무엇을 하라고 이야기해 줘야지, 대충 이야기해놓고 알아서 하겠지. 그러고 있으면 안된대."
이미 남편의 회사에서도 남편 또래의 직원과 이제 갓 입사한 직원 사이의 갈등이 불거지고, 옷을 살 때도 아저씨 브랜드는 극구 거부하던 남편마저도 요즘 '젊은 사람'들은 참 다른 것 같다며, 그들과 선을 그은지 한참 되었다.
사회에선 '90년대생들이 오고'있는데, 학교에는 이미 2000년대 생들이 와 있다. 한때는 아이들이 '88올림픽' 때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사실이 놀라웠는데, 불교식 세계관을 빌려 표현하자면 '2002 한일월드컵'을 전생에서나 지켜봤을 애들이 학교에 함께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내가 어릴 적 동네 어른들도 종종 '6.25도 안 겪어본 세대가-'하며 말을 꺼내곤 했었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다.
이제 학교는 태어났더니 대통령이 이승만이었던 세대들과, 노무현이었던 세대들이 공존하는 공간이 되었다. 두 대통령의 간극처럼, 이들의 사이도 좀체 좁혀지지 않을 것만 같다.
더군다나 '90년대생'이니, '꼰대'니 하는 말들은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의 개별적 차이를 무시한 채, 특성을 일반화하고 집단화하여 각각의 세대들이 절대 가까워질 수 없는 사이로 만들어버리곤 한다. 꼰대라는 소리가 듣기 싫어 '90년대생' 앞에서 입을 닫아 버리고, 자기들 마음에 안 드는 상황에서 '꼰대'카드를 꺼대드는 관계에서는 늘 서로 불편하다.
지금은 퇴직하신 한 선생님은 "내 소원은 김정은이를 죽을 때까지 바늘로 찌르는 거야."라고 입버릇처럼 이야기하곤 하셨다. 한창 남북 관계가 좋아지던 무렵이라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이드신 티를 내는 건가. 왜 저러실까.' 생각했는데, 어느 날 대화를 하다 선생님의 가족들이 6.25때 공산군들에게 고초를 당했던 구구절절한 사연을 듣고서야 선생님의 말이 이해가 됐다.
사람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그 사람을 둘러싼 삶의 맥락을 함께 알아야 한다. 나이가 든 이들은 공정의 가치와 인권에 대하여 더 선명하게 학습해 온 이들의 말을 새겨 들으며 배워야 하고, 나이가 어린 사람들은 삶에서 많은 시간을 권위와 복종에 더 익숙한 채 살아내야 했던 이들의 한계를 함께 끌어 안아야 한다.
이를 배우는 데 온갖 연령의 교사와 학생이 뒤섞인 학교만큼 좋은 곳이 어디있겠나. 어쩌면 이것이 지금 학교에서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교육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