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아이의 담임 선생님이 '잡지나 신문에서 세모, 네모, 동그라미 모양을 찾아 오려오기' 과제를 내주었다. 일주일 전부터 고지가 된 과제였는데, 쉽게 할 수 있겠지 하는 생각에 미루고 미루다 과제를 제출하기 이틀 전날 남편에게 잡지를 두어 권 구해 달라고 했다.
"맨날 네모밖에 없네."
성미가 급하신 엄마는 손녀딸이 방바닥에 등대고 누워 뒹굴대는 시간을 못 견디시고 아이 대신 이미 가위를 들고 과제에 돌입하셨다. 그런데 아무리 잡지를 뒤적여봐도, 정말 '세모'는 눈을 씻고 봐도 안 보인다는 것이다.
"에이, 빨리 하려고 하시니까 그런거겠죠. 설마 세모가 없겠어요?"
나도 가위를 집어 들었다. 그런데, 어라, 진짜 없다. 잡지를 세 번이나 통독을 했는데도 세모가 보이지 않는다.
그 다음날 나도 학교에서 굴러다니던 일간지를 들고 오고, 남편도 회사 폐지함을 뒤져 과월호 잡지와 신문 몇 부를 들고 왔다. 이젠 있겠지. 하며 가위를 들었건만, 없다.
몇 달 전 부록이 욕심나서 사놓고 읽지도 않은 채 옷장에 처박아 놓은 잡지 생각이 나서 꺼내왔다. 그 잡지가 창간된 이래, 나보다 더 열심히 본('읽은'이 아님!) 독자가 있었을까 싶게, 눈알을 부라리며 보는데도 세모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잡지를 네 번쯤 뒤적일 무렵에야 한 귀퉁이에 있던 작은 삼각 팬티 사진이 있어 그거라도 오려주었다. (그런데 오리다 보니 사실은 '삼각' 팬티마저도 실상은 '사각'모양이었다는 새로운 사실도 알게 되었다.)
세모, 네모, 동그라미. 흔하게 붙어 다니는 도형의 쌍들 중 '세모'가 이리 귀하신 몸이라는 걸 처음 알았다. 아마 과제를 내 주신 선생님도 당연히 쉽게 찾으리라 생각하고 가볍게 내 준 숙제가 아니었을까.
당연하게 어디라도 있는 줄 알았지만, 찾아보니 없었던 것들이 어디 이뿐일까.
얼마 전 '마스크를 쓰긴 썼습니다'라는 헤드라인 밑에 얼굴이 온통 까만 먼지로 뒤덮인 노동자의 사진이 실렸던 기사가 화제가 되었다.
"분진이 계속 날리는 곳에서 마스크 한 장으로 버텨야 하고 대기(혹은 휴식)하는 공간 바로 옆에도 분진 배출 시설이 있다. 전주 공장에 정규직 친구가 있는데, 공장 안에 이런 곳이 있다고 했더니 못 믿겠다고 하더라."
사진 속 인물은 한 대기업의 하청 노동자였다.
나는 그들의 삶을 알지 못한다. 정수기와 각종 차들이 탕비실에 비치되어 있고, 잠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푹신한 의자가 근처에 있고, 책상 앞에서 키보드나 두들기며 일을 하는 나는, 사람들의 '안전'이 없는 직장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22살 전태일이 온몸을 불사른 지 몇십 년이 지난 후 24살 김용균이 기계 안에서 온몸이 찢겨 나갔다. 두 죽음 사이에 있어야 하지만 없었던 '노동자의 권리'를 알지 못했다. 그들의 죽음이 떠들썩하게 보도된 후에도, 여전히 수많은 곳에서 그들의 '생명'과 '안전', '건강'의 가치들이 놓여야 할 자리에 있지 못하고, 그 자리를 '돈'이 채우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당연히 있을 줄 알았던 것들이, 아직도 우리 사회엔 없다.
무엇이 없다는 사실은 찾아보려고 하기 전에는 절대 알 수 없다. 사람들이 당연히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들이 없는 곳의 삶들은 그래서 더 외롭다. 처절한 죽음 앞에서야 조금씩 눈을 돌리지만, 왜 있어야 할 것이 없었는지, 누가 없앴는지, 왜 여전히 없는지 묻고 답하지 않는다. 그래서 여전히 오늘도 어떤 이들이 돈을 벌기 위해 죽음과 맞닿은 자리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많은 이들은 눈을 감는다.
사진 속 노동자가 얼굴에 먼지를 뒤집어 쓰게 만든 것도 우리지만, 그 먼지를 걷어내야 할 것도 우리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