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정리를 잘 못했다. 어려서부터 책상은 늘 책상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물건과 책이 빼곡하게 쌓여 있었고, 옷장도 곱게 걸려 있던 옷들이 하나 둘,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바닥에 흩어지다 곧 옷 무더기를 만들기 일쑤였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 사이에서만 공감하는 게 있다. 어지러운 물건들 속에서도 나름의 규칙이 있어, 어다른 사람이 정리를 해 버리면 물건을 찾기가 훨씬 더 번거로워진다. 그래서 타인이 내미는 정리의 손길은 철저히 거부한다. 한동안 천재들의 책상이라며 너저분한 아인슈타인 책상 사진이 인터넷에 돌아, 나와 비슷한 수많은 '정리 못하는 둔재'들이 자신의 천재성을 의심(?) 하던 순간도 있었다. 아빠가 쓰시던 책상도, 오빠 책상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았던 걸 보면 신기하게 이런 것도 닮긴 닮나 보다. 버리기에 집착하는 엄마는 늘 나머지 세 가족의 '방 꼬라지'에 격노를 하시곤 했다. 사춘기적 나와도 말다툼을 할 때면, 엄마가 화를 더 이상 참지 못하거나 불리한 순간이다 싶을 땐 늘 나의 '방 꼬라지'를 뜬금없이 들고 나오셨다.
내가 위 문장들을 과거 형으로 쓰고 있는 까닭은 현재 진행 형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은 정리를 잘 한다고는 할 수 없지만, 더 이상 어지르는 인간형이 속하지도 않는다. 이유는 단순하다. 두 아이도 어지르기 때문. 좁은 집에서 아이들의 물건이 이리저리 발로 채이는 판에, 나까지 정리를 안 하면 답이 없었던 거다. 내 물건이라도 정리를 하고 나니 깔끔하진 않아도, 난장판의 수준은 면할 수 있게 되었다.
지난 세월 내가 '정리'에 관하여 주변 사람들, 특히 엄마에게 들었던 잔소리를 합해 보면 몇 만 마디는 족히 넘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정말 귓등으로 흘려 들었다. 엄마한테는 미안하지만 말 중 어느 하나도 내가 습관을 고치는 것에 도움을 주지 못했다. 불과 몇 년 새 내 습관이 바뀌게 된 것은 순전히 그것이 필요하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성공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동기부여다. 만약 성공할 동기를 충분히 가지고 있다면 성공하지 못하도록 가로막기란 아주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교육에서도 마찬가지다. 학생이 무언가를 배우길 간절히 원한다면, 나쁜 부모에 형편없는 교사와 학교가 가세하더라도 배우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 이게 아이들이 노래 가사를 줄줄 외우면서도 5분 전에 배운 수학 공식은 까먹는 이유다. 비디오 게임에 나오는 캐릭터가 내는 복잡한 문제를 풀 때는 비판적 사고 능력을 사용하면서도 서술형 수학 문제 앞에서는 그 능력을 활용하지 못하는 이유다. 또 프로 선수를 꿈꾸는 남자 아이들이 매일 몇 시간이고 농구를 할 시간이 있으면서 수학 숙제를 할 시간은 없는 이유다. .... 아이가 무언가를 배우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면, 대개 학습 능력이 떨어져서가 아니라 그것이 배울만한 가치가 있는지 스스로 납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존 카우치와 제이슨 타운이 쓴 '교실이 없는 시대가 온다(원제: Rewriting Education)'에서는 학습의 동기를 부여하는 것을 교육의 첫 걸음으로 제시한다.
원격 수업이 시작되면서, 아이들과도 내 수업과도 한 발짝 거리를 두며 무엇을 왜 가르쳐야 하는지라는 질문으로 돌아오고 나니, 정말이지 '대입을 위한 내신 성적 산출'말고는 도저히 그럴듯한 내용과 이유를 생각해 낼 수가 없었다. 내가 필요성을 납득하지 않고 가르치는데, 아이들은 내 수업에서 무엇을 느끼고 배울 수 있었을까.
12년 공교육의 귀결점에는 여전히 '대입'이라는 화두가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보니, 아이들의 학습 동기는 학년이 올라갈수록 점차 희미해지고 만다. 구체적인 문제를 들고 와서 질문을 하면 답해주기가 수월한데 "도대체 이런 거 왜 배워요?", "이런 거 배워서 어따 써먹어요?"라는 질문에선 나도 말문이 콱 막혀버린다.
코로나 시대가 시작되고, 학습 격차가 더 벌어졌다고들 한다. 우리 학교만해도 1학기 중간 고사에서 80점 이상의 아이들과 40점 이하의 아이들 수가 대폭 늘었고, 그 중간에 해당하는 아이들이 죄다 사라졌다. 학교 공부에 대한 학습 동기를 그 누구도 부여받지 못한 상황에서 학교라는 시스템의 강제성을 돈이나 부모다 대체 할 수 있는 아이들은 오지선다형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받았을 터이고 그렇지 않은 아이들은 학교 공부와는 점점 더 멀어진 탓이다. 학력 격차가 커졌다며 아이들 옷자락을 끌어 당겨 어떻게든 수업이 진행되는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히는 방법을 고민할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자발적으로 학교 수업에 참여할 수 있도록 무엇을, 왜 가르쳐야 하는지 생각해야 하는 시점이 아닐지.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데, 나는 삼십 살에, 단 일년 만에 버릇이 바뀌었다. 학교 다닐 때 지각을 상습적으로 하던 아이들도, 내가 아침마다 남발하다시피한 숱한 독설들이 무색하게, 직장 생활을 너무나 건실하게 해나가는 모습을 자주 본다. 결국 누군가를 변화하게 하는 것은 변화 해야 한다는 '필요성'밖에 없다.
교육도 마찬가지이다. 스스로 하지 않은 것들은, 아무런 배움도 성장도 이루어내지 못한다.
아이들의 성장을 위해 필요한 교육을 하고, 그것이 왜 필요한지부터 시작하는 수업을 해야만, 학교와 부쩍 멀어진 아이들 곁에 다시 다가설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