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3 아이들의 얼굴을 본 지 한 달이 다 되어 간다. 수능을 앞두고 전면적으로 원격 수업을 시작한데다가 수험표 나눠 줄 때 잠시나마 볼 수 있을까 했더니, 감독관 확보 문제 때문에 감독관으로 차출된 교사들에겐 재택 근무 지침이 내려져 단톡방을 통해 응원과 당부의 메시지나 전할 수 있었다. 보통은 수능 이후 허탈해 하는 아이들의 마음을 달래주는 게 담임의 주된 일인데, 수능 이후에도 등교를 하지를 않으니, 도무지 다들 무엇을 생각하며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아이들이 혼자 있고 싶은 건지, 누구라도 말을 걸어주길 바라는 건지조차 파악할 수 없기에 답답한 마음에 우리반에서 제일 성격 좋은 Y에게 연락을 시도해 보았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잘 지내고 있니?"
"네. 그냥저냥 지내요."
"뭐하고 지내니?"
"미드랑 일드 번갈아 보고 있어요. 다른 걸 해볼려고 해도 뭘 해야 좋을지도 모르겠고, 손에도 잘 안 잡혀요."
"코딩 공부할래?"
나의 즉흥적인 제안에 갑자기 시작된 우리반 프로젝트.
일명, '나는 마음이 심란할 때 코딩을 공부하지!'
올해 수업의 상당 부분이 컴퓨터를 사용한 원격 수업이 되며 새롭게 알고 느낀 점들이 꽤 많다. 그 중 하나는 아이들이 생각보다 컴퓨터에 대해 너무 모른다는 것. 태어난 지 얼마되지 않아 스마트폰이 보편화되었고, 학교에도 태블릿이나 노트북을 자연스럽게 들고 다니니, 대학교 1학년 때 '홈페이지에 과제를 올리라'는 교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당황해 하던 나보다는 아이들이 컴퓨터와 친숙하고 컴퓨터의 활용도도 높으리라 생각해 왔다. 그러나 모두가 컴퓨터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보니 그게 아니었다. 아이들은 컴퓨터를 사용하는 시간은 많지만 대부분 기존에 만들어진 콘텐츠들의 수동적인 소비자의 역할에만 충실했지, 컴퓨터를 주도적으로 조작하고 자신의 목적에 맞게 사용하는 역량 자체는 너무나 부족했다. 이제는 무엇을 하든 컴퓨터는 기본이라는데, 나도 뭘 좀 알아야 애들에게 한 마디라도 해 줄 수 있을 것 같아 부랴부랴 코딩 공부를 시작했다. 어떤 유명한 사람이 개발자는 타고 나야 된다고 했던 인터뷰를 본 것 같은데, 나는 선천적인 능력은 부족해 늘 초반에만 열심히 듣고 신기해하다 후반부로 갈 수록 미궁에 빠지곤 했지만, 그렇게라도 맛본 이 세계는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일단, 주관적이고 자의적인 감정을 배재한, 철저하게 논리적인 사고의 흐름 속에에 프로그램이 짜이고, 이유없는 오류가 없다. 어딘가에서 점 하나라도 잘못 찍은 내 탓이다. 완벽하게 논리적이고 결점이 없는 명령을 건네었을 때만 컴퓨터는 나의 의도대로 작업을 수행한다. 나와 컴퓨터는 인간 관계와 달리 아주 차가우면서도, 정확한 명령만 준다면 컴퓨터는 나에게 철저히 순응하고 복종한다. 그렇다고 사람이 낄 곳이 없이 기계어만 남발되는 분야도 아니다. 누가 보더라도 프로그램을 만든 이의 사고 과정을 알 수 있도록 변수에 이름을 붙여야 하고, 주석을 달아야 한다.
무엇보다 여러 감정선들이 겹쳐 혼란스러울 때 코딩 강의를 듣고 따라하다 보면, 단순하면서도 쉽지 않은 또 다른 세계로 잠시 피해 있는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함께 코딩 공부를 하자고 제안했다. 앞으로 이렇게 여유를 부리며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쉽게 오지 않을 터인데 싱숭생숭 해 있을 아이들이 복잡한 생각 없이도 집중할 수 있고, 그러면서 성취감도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덩달아 나도 아이들과 함께 서로 자극을 주고 받으며 공부를 하면 좋겠다 싶기도 했다. 출근하자마자 안내문을 만들고 체크 시트를 만들어 학급 단톡방에 공유하고 희망자를 모집했다. 그동안 공부하란 소리가 지겨웠을텐데 또 뭔가 하라는 소리를 잔소리로 여기지나 않을까, 아무 것도 하기 싫을 수도 있는데 몇 명이나 할까 내심 걱정도 되었다. 그런데 하나, 둘 신청을 하더니 시트에 절반이 넘는 아이들이 이름을 올렸다. 원격 수업 시간을 떼우느라 의미없는 영상만 제시하고, 아이들도 성의없는 답변만 해대서 아이들이 참 무력하다 여기기도 했는데, 그들도 어떻게든 성장해 가고픈 욕구가 있었구나 하는 생각에, 이런 아이들의 본모습을 여태껏 몰알아 본 게 미안해지기도 했다.
당장 내일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계획이 성공하냐 실패하냐를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잣대 중 하나가 '시작 시기'일 것이다. '월요일부터', '월초부터', '내년부터'라고 유예기간을 놓고 결심하면, 실패 확률이 높다. 내일은 '목요일'이어서 '시작'과 뭔가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지만, 그래도 하기로 했다. 휴일이든, 크리스마스든, 연말이든 조건을 달지 말고 꾸준히 하자고도 했다. 며칠 하다가 지지부진하게 끝이 날지, 한 두 명의 아이들이라도 재미를 붙여 몇 년 후엔 실력자가 되어 나타날지 모르겠지만, 나 스스로의 다짐을 다잡는 의미에서라도 일지를 기록해 볼까 한다.내일이 기다려지는 마음은 참으로 오랫만이다. 아이들도 부디 이런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