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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송 Dec 14. 2020

역지사지의 한국어 수업

 일본분들을 대상으로 두 번째 한국어 수업을 했다. 외국어로 수업을 해야 되다 보니, 돈을 받고 하는 것도 아니고, 학교 수업에 비해 준비 시간도 배로 들지만 참여하시는 분들이 우는 애까지 옆에 끼고 달래가면서 수업에 참여할 정도로 열정적이라 두 번째 요청이 왔을 때 흔쾌히 응했다. 

 한국어와 일본어는 기본 문장 구조가 비슷하여, 한국어도 일본어 기본 단계들을 다른 언어에 비해 쉽게 배우듯, 일본 분들도 생각보다 빨리 내용을 익히신다. 그런데도 복잡한 건 우리말의 조사. 일본어의 조사와 쓰임은 비슷하지만 주격 조사 이와 가처럼 앞 말이 자음으로 끝나느냐, 모음으로 끝나느냐에 따라 형태가 달라진다. 한국어가 모어인 사람들은 앞말을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조사의 형태를 자연스럽게 택하여 사용할 수 있지만 한국어가 외국어인 이들에겐 그렇지 않았던 것. 학교 문법 시간에도 잠깐 언급하는 내용이긴 하지만, 애들도 한국어 화자인지라 어려움 없이 넘어가는 부분이라 크게 신경을 써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이런 조사들은 왜 또 그렇게 많은지. 

 일본 사람들이 어려워 하는 또 한 가지는 발음이다. 일본어가 받침 소리가 있는 언어가 아니다 보니 자꾸 받침으로 오는 자음에 'ㅡ'같은 모음을 붙여 발음을 하려는 습성이 강하다. 한국에서 코미디 프로그램 같은 곳에서 일본 사람을 흉내낼 때 하는 '-했스무니다', '-이무니다'와 같은 발음이 결코 과장된 게 아니었다. 'ㄹ'이나 'ㄴ'이 받침으로 올 때도 발음을 힘들어 한다. 'ㄹ'받침 소리는 아예 내는 방법을 몰라 내가 입과 혀 모양까지 그려가며 설명을 했는데도 쉽게 하지 못하고, 'ㄴ' 받침 발음은 'ㅇ'받침 발음과 구분해서 듣는 것도, 발음하는 것도 힘들어 한다. '사랑'과 '사람'을 발음했더니, 똑같은 소리로 느껴진다고 한다. 

 예사소리, 거센소리, 된소리 발음이 제일 난코스였다. '달', '딸', '탈'을 같이 연습했는데('ㄹ'발음을 힘들어 한다는 것도 여기서 알게 되었다.)만약에 그들이 발음을 하고 내가 받아쓰기를 했다면 죄다 '탈', '탈', '탈'로 적을 판이었다. 수업을 하고 나니 그간 한국 여행을 갔을 때 한국어로 이야기를 몇 번 시도해 보았는데 사람들이 전혀 못 알아 듣던 이유가 발음 때문인 것 같다며 웃으셨다. 


 나에게는 자연스러운 언어가, 누군가에겐 이렇게 몇 번의 산을 넘고 넘어야 하는 험한 길일 수 있다. 상대적인 어려움이야말로, 그 입장에 직접 처하기 전까진 아무도 모르는 것일 터. 

 작년에, 나와 친자매처럼 친한 사촌 동생이 갑상선암 진단을 받고 수술을 했다. 건너 건너 누구도 갑상선 암이더라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들어온 터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런데 수술날 병원에 가서 간병을 하는데 그게 아닌 거다. 상체를 쉽게 들어올리지 못하니 일상에서 하는 모든 동작을 힘들어 했고, 수술을 하고 나서도 몇 개월간 꽤 고생을 했다. 동생은 '갑상선 암은 암도 아니야.'라는 말은 진짜 걸려보지 않은 사람이 한 말이 틀림 없다고 했다. 

 몇 년 전 1교시만 끝나면 교무실로 찾아 와 진통소염제 광고마냥 두통, 복통, 생리통을 번갈아 호소하며 조퇴하겠다고 하는 아이가 있었다. 처음에 몇 번 돌려보내다 조금 참아볼까라고 말을 건네면 또 교실로 쪼르르 가길래, 엄살이나 꾀병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길 며칠 반복하다 아이가 내 앞에 와서 펑펑 눈물을 쏟았다. 

 

"선생님, 저는요. 수업 시간에 하는 선생님이 설명들을 한 마디도 못 알아 듣겠어요. 그럴 때마다 교실에서 제가 혼자 동떨어져 있는 느낌이에요. 그래서 스트레스를 받으면 선생님의 설명 소리가 윙윙윙하는 소음처럼 느껴질 때도 있고, 그냥 아예 외계어처럼 느껴질 때도 있어요. 다른 애들은 다 알아 듣고 열심히 하고 있는 걸 보면서 교실에 같이 앉아 있는 게 너무 힘들어요."

 

 아뿔싸, 나도 모르게 나는 모든 아이들이 교실에 앉아, 눈을 말똥말똥 뜨고, 내가 하는 수업을 다 이해할 것이고, 그래야만 한다는 착각에 빠져있었구나. 아이의 고통을 구체적인 말로 듣고서야, 아이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누구나 자신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일일 수록 그것이 누군가에게 어려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하기 힘들다. 그렇다고 매번 그 상황에 처해 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 간격을 메꾸어 가는 것이 교육의 역할일 것이다.  

아이들은 자라나며 상대편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느껴보는 상상력과 공감력을 충분히 키워 나가야 한다. 사회 구성원들의 행복한 삶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자세들이다.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저 내 편의를 위해 잊고 지낼 때도 꽤 많다. 학교 생활을 즐겁게 해 나가고 있는 아이들이 몇이나 되는지, 반대로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는 아이들은 얼마나 되는지보다 1등급을 받은 아이들이 몇 명인지가 공공연한 관심사가 되고, 어떤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에도 늘 처음 하게 되거나 받게 되는 질문이 "걔, 성적은 어떻게 되요?"가 되는 세상에선 더 그렇다. 아이들의 입장에서 아이들의 삶을 이해하고 바라봐 주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을 오직 교사와 세상의 잣대로만 나누고, 평가하고, 가르치는 곳이 되어 버리곤 한다. 

 아이들의 입장에서는 숫자 몇 개로 자신의 모든 것이 평가 받는 학교가 얼마나 차갑고 답답한 곳이었을지. 그렇게 자라난 아이들이 만들어 갈 사회는 얼마나 냉랭한 곳이 될는지. 


 모두가 힘들게 보낸 1년이다. 어수선했어도, 뭔가를 마무리 지을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더 큰 시련이 닥쳐 오는 느낌이다. 지칠 수록 누군가를 탓하고 원망하는 마음이 드는 것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심리이기에 상황이 안좋아질 수록 여기저기서 시끄러운 아우성들도 들려 온다. 다른 이가 겪는 어려움을 살피고, 배려하는 모두의 마음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당분간은 그것이 삶을 버티게 해 주는 제일 큰 힘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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