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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송 Dec 09. 2020

인서울

 반의어를 살펴 보면 의미가 명확해 지는 단어들이 있다. 평상시엔 거의 쓸 일이 없다 학교에서, 진학 상담 기간 유난히 많이 입에 올리거나 듣게 되는 단어 '인서울'. 

단어의 조어법으로 보자면 '인서울'의 반의어는 '아웃서울'이어야 할텐데 그런 말을 쓰는 경우는 없다. '인서울'이란 말은 곧장 '하냐', '못하냐'란 말들과 어우러지기 때문이다.  


 "아빠(혹은 엄마)가 서울에 있는 대학 아니면 대학 가지 말래요."

 

 진학 상담 때 늘상 듣게 되는 이야기다. 아예 학부모 총회 때 올 한 해동안 아이에게 하지 말아야 될 말이라 당부를 해보아도 마찬가지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게 뚜렷한 아이일수록 원하는 공부를 위해 '인서울'을 고집하지 않지만, 그런 아이와 나의 바람이 '인서울'이란 장벽에 막히게 되는 경우가 너무 흔하다. 

 

 "어휴, 그래도 딸아인데, 어떻게 혼자 지방까지 보내겠어요." 

  

 상황이 거꾸로라고 가정한다면, 학교와 가족이 지방에 있고 아이가 서울에 있는 학교를 지원한다면 그때도 똑같이 이야기할 것인가. 라고 질문을 던지고 싶은 마음이 불쑥 일지만 꼭꼭 눌러담는다. 


 서울에 있냐, 없냐로 합격선이 확연하게 차이가 나는 대학들을 보면 '인서울'이란 단어에 지나치게 가치를 부여한 것이 그들 탓만은 아닐 터. 지방에서 대학을 다니거나 졸업한 이들이 어떤 부당한 대우를 받는지 수도 없이 실사례로 접하다 보니 부모로서 그런 욕심을 부리는 것도 이해가 가기는 한다.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면 정체 불분명의 '서울 소재 15개 주요 대학'이란 말까지 등장할 때도 있다. (저 15개에 어떤 학교들이 무슨 근거로 들어가 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우리 사회의 못된 습성 중 하나가 바로 이처럼 곳곳에서 무리를 만들고, 무리의 위계를 만들어 내고, 아무런 근거없는 위계에 의해 편견을 가지고 차별을 일삼는 것 아닐까. 자본주의 사회답게 무리 짓기의 기준은 역시 '돈'이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는 그닥 교육열이 높은 곳은 아니다. 고만고만한 사람들이 아이들을 소박하게 키우는 동네이다. 아이가 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그렇게 믿었다. 그러나 이 안에서도 임대 주택이 많은 아파트 단지의 아이들이 가는 학교와 그렇지 않은 학교, 골목길에 사는 아이들이 많이 가는 학교와 그렇지 않은 학교가 나뉘고, 어느 학교에 배정받는지에 따라 집값이 조금씩 차이가 난다는 것을 얼마 전에서야 알게 되었다. 

 서울에서 집값 높기로 유명한 어느 동네는, 동마다 아파트 평수의 차이가 커서 아파트 동별로 친구 그룹들이 나뉜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다. 

 

 서울과 서울이 아닌 곳으로, 서울에서도 강북과 강남으로, 그리고 또 다시 구별로, 동네별로, 한 동네 안에서도 무리 짓기는 끝도 없이 이어진다. 그리고 무리 짓기의 희생양은 소수의 그룹에 분류되지 못한 다수의 '우리들'이다. 그렇다면 다수가 무리 짓기를 거부하거나 무리를 해체해버린다면 간단히 해결될 것 같은데, 소수의 무리들들이 단단하게 틀어쥐고 있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보니 늘 실패로 끝난다. 하는 수 없이 다수의 사람들은 그 안에서도 무리를 만들고 위계를 부여하며, 어떻게든 '상위 소수 그룹'에 속하고자 발버둥을 쳐 본다. 

 

어제, 강남의 어떤 동네에서 혁신 학교 지정을 놓고 학교와 동네 사람들의 갈등을 빚고 있다는 기사를 보았다. 동네에 내걸렸다는 현수막을 보니 쓴웃음이 나왔다. 

'000(교장 이름), 나는 죽어서도 너를 잊지 않겠다.' , '조용하던 00동에 혁신폭력 웬말이냐 일방적인 혁신 전환 불법이고 폭력이다.' 

 기사 내용을 보니 혁신 학교는 공부를 안 시키는 학교고, 내 동네에 있는 학교가 공부를 안 시키는 학교가 되면 집값이 떨어지기 때문에 사람들의 반발이 심하다는데, 그들의 주장뿐만 아니라 현수막의 짧은 문구조차도 논리가 심각하게 결여되었고, 창의성 마저도 없다. 이게 교육비 지출 1위를 자랑하는 동네의 수준이라니. 무리 짓기의 '상위 소수 그룹'에 속한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동네일텐데, 저렇게 저열함을 드러내며 사실은 그게 얼마나 허황되고, 근거없는 것인지를 스스로 증명해 내고 말았다. 


 서울과 지방, 한강의 이북과 한강의 이남이라는 말들이, 본연의 의미로 돌아가 단순히 지리적인 차이만을 뜻할 때, 어느 곳에서나 사람들은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아이들의 행복한 삶을 바란다면, 우리들은 사회의 편견에 굴복해서 살아가기보다 조금씩이라도 그것에 맞서고 싸울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대접 받는 소수'에 속하려 노력하는 것보다 어쩌면 그게 더 손쉽고 빠른 방법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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