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순례는 고생이다

2015.10.19. Day 31

by 메추리

33 순례는 고생이다

2015.10.19. Day 31


눈이 떠졌다. 새벽 4시. 제기랄. 잠 좀 푹 잘려했더니만. 잠이 안 오니 어쩔 수 없이 순례기를 써야겠다. 8인실이니 아이폰 불빛도 부담스럽다. 가장 어둡게 설정해두고 에버노트에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서울을 떠난 지 사흘째다. 시차 때문에 잠이 안 와 시작한 순례기인데 좋아하는 분들이 계셔 계속 써야 한다. 약간 의무사항 같다. 그래도 쓸 수 있다는 게 어디냐?

조금 써 내려가다 어제 먹은 독주로 인해 아랫배가 아파온다. 똥은 조금이라도 여지가 있을 때 많이 자주 싸 놓아야 순례길이 가볍다.

똥을 쌌더니 배가 고파온다. 먹을 것도 없고. 다시 누웠다. 알람은 오전 7시로 맞춰놓았다. 6시 45분에 다시 눈이 떠진다. 일어나는 수밖에.

러시아 친구랑 8시에 같이 출발하기로 하였기에 서둘러야 한다. 배가 고파서 집 떠나기 전 와이프가 막판에 싸준 미숫가루를 물통에 넣고 흔들었다. 그리고 초코바로 간단히 허기만 채웠다. 어디 조금 가다 보면 아침 먹을 데가 있겠지.

8시, 드디어 순례길 출발이다. 표지석은 110킬로를 가리킨다. 노란색 화살표만 따라가면 된다고 러시아 친구가 알려준다. 아직 깜깜한 밤이다. 비까지 추적추적 내린다. 으스스한 기운이 느껴진다.

우리나라로 치면 8시면 해가 떠서 어둡지 않은데 스페인 아침 8시는 완전 한밤중이다. 오늘 일출은 8:48. 그래서 네이버에 찾아보니 영국을 제외하고 유로존이 거의 동일한 시간대를 쓰고 있었다. 그러니 서쪽 끝에 있는 스페인은 이렇게 아침 8시에도 어둡지. 미국처럼 시간대를 좀 나누지.

시간대 핑계는 그만하고 다시 걷자. 어두워 화살표가 잘 안 보인다. 함께 걷는 순례자가 손전등을 비춰준다. 이정표를 찾고 또 걷는다. 산속으로 들어간다. 숨이 찬다. 다들 지팡이를 들고 있다. 난 가다가 산길에 있는 나무 막대기를 지팡이로 쓸 생각으로 굳이 사지 않았다. 그런데 나무 막대기가 잘 보이지 않는다. 좀 더 헉헉대며 걷다 보니 약간 구부러진 막대기가 하나 보인다. 이내 집어 들었다. 손에 이물질이 잔뜩 묻는다. 툭툭 털며 잔가지들을 정리했다. 그리고 막대기를 짚으며 걸으니 한결 편해졌다.

영화 'Cast Away'에서의 톰행크스처럼 나무 막대기 이름을 정해야겠다는 생각이 순간 들었다. 그래서 카미노(순례길)에서 따서 '카미'라고 지었다. 카미가 있으니 든든하다. 좀 더 걷다 밤도 하나 주웠다. 그 친군 '바미'라고 지었다. 오른손엔 카미, 왼손엔 바미를 잡고 걸으니 친구 두 명이 생긴 느낌이다. ㅎㅎ

계속해서 언덕을 올라간다. 비도 더 거세지고. 길은 질퍽질퍽. 산티아고 오기 전 만났던 퓨처플레이 한재선 박사와 산티아고 유경험자인 그의 와이프(권정우 대표)와의 저녁자리에서 산티아고 가는데 제일 중요한 준비물이 뭐냐는 질문에 딴 건 다 포기하더라도 등산화는 좋은 거 사 신으라는 얘기를 난 굳이 듣지 않았다. 그것도 발목 감싸는 방수등산화로 꼭 사 신으라 몇 번 강조했건만. 근데 난 그냥 신던 등산화를 신고 가기로 했다. 그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스페인을 선교하다 돌아가신 예수의 제자 야고보(스페인어로 Santiago, 영어로 James)를 보러 천년 전부터 수많은 순례자들이 산티아고를 걸어서 왔는데 난 방수복에 죽이는 배낭에 각종 초경량 제품으로 무장하고 있으니. 사실 많이 부끄러웠다. 이렇게 무장하고 가는 건 고생하는 순례가 아니다. 그런 부끄러움이 든 순간부터는 새로운 등산용품을 사지 않기로 결심한 터였다. 그래서 '카미'를 내 옆에 둔 건지도 모르지. ㅎㅎ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수등산화를 안 산건 후회하실 일이라고 계속 말씀하신다. 내가 뜻을 굽히지 않으니 그럼 '고생 많이 하고 오라'고 살짝 저주를 퍼붓는다. 그 저주가 통해서일까, 실질적으로 걷는 첫날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길도 질퍽거리고.

싸리아에서 오늘 목적지인 포루토마린까지 가는 길에 유독 밤나무가 많다. 처음엔 어두워서 둥글둥글 밟히는 것이 뭔지 잘 몰랐다. 날이 밝으니 다 밤송이다. 밤꽃 향이 가득한 오뉴월에 순례길 왔다면 여심이 많이 들썩거렸을 것이다. 혼자 웃는다. 나도 오늘 밤 밤꽃 향기 좀 뿜어볼까? 아뿔싸, 오늘도 남녀공용 다인실 일터.

시간이 지나면서 밤꽃 향기 생각은 하나의 사치임을 이내 알게 되었다. 배가 너무 고프다. 초코바 하나에 한 컵 미숫가루는 도무지 성에 안찬다. 그리고 두 시간을 넘게 가는데 레스토랑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길거리에 밟혀 뽀얀 속살을 드러낸 밤을 다 주워 먹고 싶다. 밤꽃 향기가 뭐다냐? 다 주. 워. 먹. 고. 싶. 다.

그래 '마션' 책을 버려야 돼. 그리고 스테인리스 보온병까지. 내가 미쳤지 왜 이걸 가져왔을까? 특히, 두꺼운 그 책 말이야. 잠 안 올 때 친구였던 것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지금은 단지 1킬로 정도 무게를 내는 나쁜 놈이라는 것 밖에. 리디북스 전자책을 가져왔어야 했는데 그놈의 결제 오류 때문에. 쩝!

내 앞뒤로 걷는 순례자들은 도무지 쉬지 않는다. 보니 거의 3시간에 한번 정도 쉬는 것 같다. 나도 그런 건장한 유럽 사람들 체력에 맞춰 걸으니 녹초가 된다. 그렇게 세 시간을 비바람 헤치며 고군분투하니, 사실 내가 왜 여기 왔나 라는 생각이 막 들려고 할 때쯤, 꿈에 그리던 카페가 나타났다. 오 마이 갓.

판초의랑 배낭을 벗어두고 카페로 들어갔다. 커피와 참치 샌드위치를 시켰다. 둘 다 라지로. 샌드위치를 다 먹고 하나 더 먹고 싶어 주문하려 간 사이 먹다 남은 커피를 종업원이 치워버렸나 보다. 내 아까운 커피. 어쩔 수 없이 주님을 찾았다. '레드 와인 플리즈'

따뜻한 거 먹고 배도 채우니 한결 살 것 같다. 신은 우리에게 딱 감당할만한 고통을 주시는 것 같다. 이렇게 세 시간의 힘든 코스 뒤에 빵과 주님을 허락해 주니 말이다.

다시 걷는다. 지금까지 15킬로 걸었으니(그것도 3시간 조금 넘는 시간 동안) 목적지까지 10킬로만 더 걸으면 된다. 이 코스는 내리막 코스가 많다. 비는 더 내린다. 방수 재킷에 판초의 까지 입으니 속은 땀으로 흥건히 젖는다. 아까 카페에서 다른 옷으로 갈아입었음에도 불구 또 축축하다. 된장.

이젠 제법 카페가 자주 나타난다. 계속 들렀다. 그래야 순례자 여권(크레덴시알)에 도장(스페인어로 세요)을 받을 수 있거든. 이 도장을 받아둬야 산티아고 대성당 도착했을 때 순례 완주 인증을 받을 수 있고 순례자들을 위한 미사에서 이름이 호명되며 축복기도를 받을 수 있거든.

이 카페에서 화장실에 들렀는데 샹송 'Ne me quitte pas, 느 므 끼뜨 빠, 날 떠나지 마세요'가 나를 자꾸 붙잡네. 난 대변이 아니라 소변을 볼뿐인데. 더 나올 것도 없단 말이얏!

비를 맞으며 추운 날씨에 걷다 보니 내 꼬추도 몸통에 쪼그러져서 붙어버린 것 같다. 에고고 불쌍한 놈. 주인 잘못 만나 서리. 쭉 뽑아서 쉬하기가 더 안쓰럽다. 쩝!

각설하고 구글맵 찍어보니 5킬로 남짓 남았다. 또 걷는다. 멀리 강 건너 포르토마린이 보인다. 빗속을 뚫고 와서 그런가 더 아름답다. 이제부턴 본격적인 내리막길이다. 작은 마을을 하나 통과하는데 그때 마침 소 목장에서 소를 풀어 모는 중이다. 소와 순례자가 뒤섞어 골목길을 내려간다. 개판 아니 소판이다. 한참을 소와 함께 가다 보니 뒤에서 순례자들이 부른다. 그 길이 아니라고. 소 따라갈 뻔했다. ㅎㅎ

강을 건넌다. 강바람이 거세다. 아래엔 고기를 모으려고 V자 모양으로 돌을 쌓아둬 물길을 바꾼 것들이 여럿 보인다. 포르토마린 입구 계단을 올라가서 문을 통과하니 마을이 나타난다. 27킬로 도보 완료.

한재선 박사의 저주는 그리 신통치 않았다. 내 등산화도 젖지 않았다. 물집도 살짝 잡힐까 하는 수준이었고. 근데 지금 이런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다. 빨리 숙소(알베르게)를 구해야 한다. 두리번거리다 식당 딸린 멋진 알배르게를 골랐다. 꾀죄죄한 모습에 안경도 습기 차 안 보이는 상태로 묻는다. 'Do you have a bed?' 있단다. 내 뒤를 이어 독일 여자애가 들어온다. 좀 전 카페에서 만났던 친구다. 그 친구도 방 있냐고 묻는데 없단다. 얏호! 내가 마지막 득템. 역시나 운이 좋아.

내 방으로 왔다. 6인승인데 난 2층 침대 위칸이다. 1층이 더 좋은데 어쩔 수 없다. 후다닥 샤워를 마치니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놈의 꼬추도.

이젠 나에게 포식을 허락할 시간이다. 식사 전에 주님 영접은 필수, 맥주부터 시켰다. 뭘 먹을까 고민하다 T본 스테이크와 과일 샐러드를 시켰다. 오늘은 이런 거 누릴 자격이 있다. 음하하.

KTB에서 같이 근무했던 정재우가 말을 걸어온다. 뭐 먹구 다니냐고. 그래서 스테이크 먹는다고 사진 찍어 보냈다. 뭐 먹으러 순례길 갔냐고 나무란다. 칫! 잘 먹어야 걷지.

잠시 쉬었다. 빨래도 좀 돌리고. 미국 아주머니 세분이 들어오신다. 세 명이서 프랑스 생장부터 걸어오는 길이란다. 32일째. 난 오늘이 첫날인데 말이다. 그중 한 아줌마인 니키에게 물었다. '왜 카미노 오셨나요? 무엇 때문에' 그랬더니 본인은 이번이 두 번째인데 첫 번째는 TV에서 순례길 소개하는 것 보고 넘 오고 싶어 자료도 모으고 준비해서 왔단다. 그때 느낌이 넘 좋아 이번엔 친구 두 명을 데리고 다시 그 코스를 걷고 있단다. 그러면서 나한테도 왜 왔는지 묻는다. 내 대답은 'I wanna change my life!' 그랬더니 자기도 그렇단다. 자긴 여기 오려고 직장까지 관뒀단다. 나두 지난주에 관뒀다고 맞장구쳤다. 좋아라 한다.

다인실은 이런 게 좋다. 사람 사는 냄새가 난다. 지금 밤 10시. 밖에선 기타에 노랫소리가 들린다. 오늘은 푹 잘 수 있을 듯.

Tip
1. 눅눅한 등산화 습기 제거법: 신문지를 구겨서 넣어둔다.
2. 비가 많이 오면 판초의도 소용없다. 촌스럽더라도 두꺼운 비닐 재질이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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