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20. Day 32
34 Keep your Pace or Keep your Faith
2015.10.20. Day 32
이 빌어먹을 '마션'은 왜 이리 무거운 거얏! 왜 주인공 놈은 화성에서 오래 살아남아 이렇게 생존기를 두껍게 쓴 거지? 짜증이 몰려온다. 진짜 버려야 되나?
어제저녁만 해도 물 빠진 생쥐 상태에서 샤워 후엔 완전히 다른 차원의 개운함과 빗속을 뚫고 걸은 뿌듯함이 있었다. 오후 3시 무렵 도착해서 시간적인 여유도 있었을뿐더러 다리 상태도 나쁘지 않았거든. 그런데 오늘은 사뭇 달랐다.
먼저 이번 순례길 유일한 친구이자 동반자 '카미' 얘기부터 해야겠다. 이른 스테이크 저녁으로 시간 여유가 많아서 뭘 할까 고민하다 카미를 좀 다듬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접이식 칼(우리 세대 표현으론 맥가이버 칼)을 꺼내 남아있는 지저분한 가지를 정리하고 껍질도 깔끔하게 제거했다. 카미도 나와 같이 샤워 후 뽀송뽀송한 느낌이다. 체헷!
순례자의 일상은 단순하다. 다들 프랑스 생장부터 30여 일 넘게 걸어오신 분들이라 아주 기계적으로 움직인다. 아침 7시가 되면 불이 켜지고 짐을 꾸리기 시작한다. 난 아직도 시간이 좀 걸리는데 다른 이들은 순식간이다. 짐을 다 꾸린 후 한결같이 발을 만진다. 바셀린 같은 연고도 바르고 밴드도 붙이고 등등. 그리고 각자 아주 빠른 속도로 간단히 아침을 해치운다.
나도 어제 아침의 허기를 너무나 생생하게 기억하는지라 아침으로 전날 스테이크 먹을 때 꼬부쳐둔 빵을 뜯기 시작했다. 자판기 커피 두 잔 뽑아서 돌처럼 딱딱한 빵을 찢어 커피에 찍어 넘긴다. 먹어야 산다. 먹어야 걸을 수 있다.
8시쯤 숙소를 나오니 순례자들이 줄지어 걸어간다. 그 무리를 자연스럽게 따르면 된다. 다들 넘 빠르다. 뭐 한달 동안 그 짓만 했으니 안 빠르면 이상한 거겠지. 그렇다고 그들 속도에 맞추면 쉽게 지치게 된다. 출발 무렵부터 잠시 함께 걸은 영국 아저씨 로버트도 연신 '킵 유어 페이스'란다. 'Keep your Pace' 인가, 'Keep your Faith'인가. 아님 둘 다인가?
장거리 순례길처럼 긴 인생에서 페이스 조절도 중요하고 신념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겠지. 그리고, 신념을 지키기 위해 넘 급하게만 가려 말고 페이스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겠지.
70은 되어 보인 이 아저씬 넘 잘 걷는다. 30분쯤 함께 걷다 언덕 부근에서 도저히 스피드를 못 맞출 거 같아 바로 얘기했다. 'Please go ahead'
여기 오기 전 많은 일들을 하고 왔다. 새로 만들 회사에 대한 구상과 파트너 구성. 특히 사람이 제일 중요한 요소였다. 사실 지난 2월 말부터 앞으로 할 일들을 구체화시켜오다 5월 초쯤엔 첫 파트너 영입도 거의 끝이 난 터였다. 그런데 5월 말 그분이 회사를 옮길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여 동시에 내 정신 한계도 무너진 적이 있었다(이런 국적 없는 말은 쓰기 싫지만 요즘 말로 '멘붕'). 그래도 그 분과 함께 영입하려고 했던 A가 합류하기로 해서 마음이 놓였다. 그런데 두 명 만으론 부족했다. A도 아는 B의 합류가 된다면 우린 최강팀이 될 수 있을 텐데. 그래서 나와 A는 B를 합류시키기 위해 두 달 동안 고생했다. 많이 만나고 많이 얘기하고 그리고 설득하고. 그리고 7월 중순 우리 세명은 점심때 강남의 어느 일식집에 모였다.
"맘의 결정은 하셨는가?"
"형, 이번에 힘들 거 같아요. 회사에서도 중책이 맡겨졌고 사실 따로 준비하고 있었던 것도 있고"
"그래 알았다. 먹자"
사람 영입이 제일 힘들다. 이 친구를 알고 지낸지도 4-5년인데 술도 많이 먹고 얘기도 많이 한 친구인데 쉽지 않다. 그래도 포기할 순 없다. 7월 말 이 친구에게 이메일을 하나 썼다. 보내려니 회사 이메일 밖에 모르겠더군. 혹시 스크리닝 될지 몰라 카톡으로 보냈다.
사랑하는 OO에게,
함께 술은 많이 먹은 것 같은데 이런 메일은 처음이구나. 모르지 이메일이 힘들면 카톡으로 보내게 될지도.
처음 벤처캐피탈 회사 만들 계획을 세우면서 제일 먼저 떠올랐던 얼굴이 자네였네. 뭔가 함께하면 끌리는 것이 있고, 대화도 잘 통하고 해서 내가 VC를 한다면 자네를 1순위로 생각해 두었거든.
VC는 사람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그래서 나도 더 신중히 생각하고 있고. 지난주에 A와도 얘기를 했는데 자네랑 꼭 함께 하고 싶다고 하더군.
물론 자네가 꿈꾸는 인생이 있을 것이여. 그리고 그것이 자네에겐 무척 소중하리라 믿어. 그래도, 지난 몇 년간 서로 알아온 우리의 인연도 소중하지 않을까? 거기에 자네와 꼭 함께 VC를 만들고 싶어 하는 두 남자의 마음도 소중하고 간절하지 않을까?
다시 한번 마음을 한번 움직여 보시게. 우리 두 사람의 간절함이 부디 자네에게 전달되길 바라네. 이런 진심을 담은 간절한 마음을 받는 것만으로도 자넨 이미 성공한 인생을 산 거지. 내가 너무 앞서갔나? 몰러. ㅎㅎ
난 서로 마음 통하는 사람들이 진심을 담아 처음부터 하나하나 만들어 가는 VC를 꿈꾸네. 자유로운 커뮤니케이션 환경과 서로에 대한 신뢰, 그리고 투자에서도 나름 한국 경제에 기여할 수 있는 그런 것들을 하면서 말이여. 내가 정한 우리 회사의 캐치프레이즈는 ‘Creating Jobs, Boosting Korea’ 일세. 다소 거창해 보일지 몰라도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하여 우리나라 국격을 높였으면 하네.
그러니, 자네의 인생계획 살짝 몇 년만 뒤로 미뤄주고 새로 시작하는 우리 VC에 자네의 힘을 보태주면 안 되겠는가? 간절한 마음을 담아 다시 한번 부탁해 보네.
2015년 7월 22일
이희우 올림.
또 까였다. 쳇! 팀빌딩이 원래 이런 건가? 내가 진행하는 '쫄지마 창업스쿨'에서도 주로 '스타트업 팀빌딩'을 가르치고 있는데 나에게도 이런 시련이 있다니. 이거 제대로 못하면 앞으로 이 과목 어떻게 가르치나? 쩝!
다시 순례길로 돌아오자. 언덕을 다 올라가니 해가 뜬다. 앞서가던 로버트 아저씨가 날 보며 외친다. 'Look backward, it's a lovely day!' 앞만 보고 달렸구나. 이렇게 뒤돌아도 봐야지. 그래야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알지. 인생도 그런 거지. 실로 어제와 대비되는 너무나 아름다운 풍경이다. 이 맛에 아침 일찍 걷는지도.
순례자들은 통상 아침 8시부터 오후 3-4시까지 하루 6-7시간 25킬로 정도 걷는다. 숙소는 알베르게라고 부르는 순례자들 전용 다인실들이 곳곳에 있다. 온라인으로 예약도 안 되는 곳이 대부분이라 일찍 도착해야 좋은 숙소를 구할 수 있다. 그래서 다들 매일매일 전투 치르듯 엄청 열심히 걷는다. 천년 전에도 그랬을까? 그땐 숙소 문제 때문이 아니라 빨리 도착해서 선교를 하기 위해 열심히 걸은 건 아닐까?
오늘은 두 시간을 걸어오니 카페가 보인다. 스페인식 브런치 메뉴가 여럿 보인다. 그중 계란 프라이 2개, 소시지 7개가 삶은 감자 위해 올려져 있는 것이 5유로(7천원 정도). 싸다.
감자라고 하니 화성에서 고생하고 있는 '마션'이 떠오른다. 이 친구가 구조 우주선이 오는 4년을 견디기 위해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식량자원이 바로 감자였다. 그 감자를 키우기 위해 흙과 물이 필요했던 거고. 그래서 물을 만드는데 사력을 다한 거고. 화성에선 고가의 각종 장비와 화학적 지식을 활용하여 물과 산소를 만들어야 겨우 먹을 수 있는 감자를 우리 지구에선 땅에 심으면 바로 먹을 수 있다. 얼마나 축복인가.
그런 감자, 사실 난 감자전만 좋아했고 후렌치 프라이는 잘 먹지도 않았는데 여기선 감자가 너무 맛나다. 감자 하니 여기 오기 직전 1백만원 들여 창업 한 예능 하이라이트 동영상 앱 '요즘예능' 어플을 서비스하는 주식회사 먼데이펍을 '감자(Decrease of Capital)'치고 온 게 생각난다. ㅋㅋ
거의 먹어갈 때쯤 니키와 아줌마 둘이 들어온다. 반갑다. 다시 만나자고 하고 자리를 일어났다. 다시 걷는다. 도로변을 끼고 계속해서 올라가는 지루한 길이다. 이 망할 놈의 마션은 또 나를 괴롭힌다. 책 읽은 부분까지 찢어 버리고 남은 부분만 들고 갈까? 걍 다 버리고 한국 가서 리디북스에서 다운받아 볼까? 이 놈의 마션.
오른쪽 검지 발가락에 물집이 잡혔다. 온통 그 발가락의 따끔거림에 정신이 쏠린다. 이윽고 왼쪽 종아리가 뭉치기 시작한다. 이젠 모든 정신이 종아리로 쏠린다. 이런 걸 경제학 용어로 '구축효과'(Crowding-out Effect, 정부의 재정지출 확대가 민간의 투자 위축을 발생시키는 것)라 하지. 즉, 왼쪽 종아리의 고통이 오른쪽 발가락의 쓰라림을 밀어낸다고나 할까? 지랄. 힘드니 별소리를 다하네.
배낭도 나를 짓누른다. 나의 업보요 삶의 무게다. 내가 지고 가야 한다. 몸은 다 젖어 찌든 땀내가 나는데 바람은 매섭다. 오른쪽 발가락, 왼쪽 종아리 그리고 끊어질 것 같은 어깨. 아, 힘들다. 이때 떠오르는 성경구절이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래도 아침을 빵으로, 아점을 감자+소시지+계란 프라이로 많이 먹어 둬서 인지 몰라도 아점 먹은 10시에서 10시 반까지를 제외하곤 1:30분까지 쉬지 않고 계속 내달린 거 같다. 또 카페가 보인다. 종아리가 넘 땡겨 이번엔 쉬어야 한다. 초코 영양바 하나와 직접 짜 주는 오렌지 주스를 시켰다. 주스가 넘 상큼하고 맛있었다. 그래서 하나 더 먹었다. 오래 있으면 퍼질 거 같아 바로 일어났다.
이젠 제법 절뚝거린다. 그럴수록 의도적으로 더 빨리 걸었다. 왜냐면 빨리 도착해서 쉬고 싶기도 했고 이렇게 걸어야 고통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2.8킬로만 가면 도착이다. '팔라스 데 레이' 마을이 보인다. 한재선 박사의 저주도 이제 서서히 끝나간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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