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21. Day 33
35 가끔 뒤돌아 보자
2015.10.21. Day 33
걱정 마시라. 마션은 아직 안전하다. 혹 내가 나중에 화성에서 조난을 당했을 때를 대비해서 살려두기로 했다. 그 대신 '바미'의 친구들이 희생양이 되었다. 가장 작고 이쁜 바미 하나만 남겨두고 바미와 함께 주운 밤 다섯 개를 휴지통에 버렸다. 흑흑 미안해 바미 친구들.
어제 숙소는 참으로 특이했다. 첨엔 약간 이상했다고나 할까? 고된 순례길이라 '팔라스 데 레이' 마을이 나타나자마자 그 삼거리에 있는 알베르게에 들어갔다. 동네 할베들과 카드 치고 있던 주인장이 왜 왔냐고 묻는다. 그래서 Bed 하나 있냐고 물으니 옆 계단으로 날 인도한다. 10유로(만삼천원)에 2인실 1층 침대칸을 배정받았다. 근데 오후 3시쯤인데 순례자가 나 밖에 없다. 약간의 불안감이 엄습한다.
일단 샤워부터 해야 했다. 씻으니 인간의 모습이 된다. 옷을 편하게 갈아 입고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나선다. 바람이 매섭다. 다리를 절뚝거리며 식당을 찾기 위해 애쓴다.
내가 뭐 먹었다는 게 뭐가 재밌겠는가? 먹긴 아주 잘 먹었겠지. 실망시키지 않겠다. 어제는 T본을 먹었으니 오늘은 폭찹. 맥주는 덤. 저녁을 다 먹어도 시간은 채 4시도 안되었다는 게 문제다. 다시 숙소로 돌아온다. 1층 빠에서 주인장이 날 즐겁게 인사한다. 이내 자리를 잡고 외친다. 'Beer Please~'
알베르게 주인장은 맥주만 시켜서 안쓰러웠는지 조그마한 종지에 돼지고기, 소시지, 감자 등을 넣어 만든 스튜도 함께 준다. 근데 이게 대박이다. 얼큰하면서도 구수한 국물이 그리웠는데 딱이다. 이거 하나 더 얻어먹으려 맥주를 더 시켰음을 부인하진 않겠다. 그리고, 그거 먹고 난 후 두 개 더 시켰다.
그렇게 맥주 네 잔을 해치우고 나서도 6시밖에 되지 않았다. 내 방으로 돌아왔다. 방 세 개 총 열대여섯 개의 Bed에 어느 한 명의 순례자도 없다. 이 알베르게에선 내가 유일하다. 그리고 다음날까지 이 상태는 유지되었다.
여기까지가 어제 일이다. 왜 어제 안 썼냐고? 너도 한번 걸어봐라 그런 소리 나오나. 하튼, 오늘도 루틴의 반복이다. 7시에 일어나 전날 저녁 먹다 꼬부쳐온 빵을 먹고 8시에 숙소를 나왔다. 첨엔 시내에서 약간 헤맸다. 한참을 걸었는데 어느 순례자도 안 보이는 거다. 그래서 원위치로 다시 돌아와서 순례자 무리들이 움직이길 기다렸다. 그리고 그 무리에 합류했다.
산티아고 가는 길은 주로 해를 등지고 걷는다. 동쪽에서 대서양 쪽에 가까운 서쪽으로 가는 것도 그 이유이지만 주로 해뜨기 전 시작해서 오후 3시 전에 마치기 때문에 해를 마주하며 걷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래서 멋진 풍경을 보기 위핸 어김없이 뒤를 돌아봐야 한다. 어제 로버트 아저씨의 조언이 있어 오늘은 자주 뒤를 돌아봤다. 뒤돌아 본 하늘은 정말 명품이다. 어떻게 이런 때깔이 나오는지.
조금 더 걸으니 아름다운 숲속길이 나온다. 다시 만난 미국 아줌마들은 여기가 산티아고 800킬로 길 중에서 가장 이쁘단다. 약간은 동굴 같기도 하고 나무뿌리가 보이는 깊숙이 파인 그 길을 걸어가니 배낭의 무게가 전혀 느껴지지 않고 발걸음도 가볍다. 벌써 고통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러너스 하이' 상태에 도달한 것인가? 한재선 박사의 저주 약발이 이 정도였단 말인가?
조금 더 가니 아주 작은 마을이 나온다. 자신의 집 벽을 순례길 표식인 가리비 조개로 이쁘게 화살표를 만들어 둔 게 보인다. 포루토마린에서 만난 미국 아줌마들이 거기서 사진을 찍으며 물을 마신다. 나도 찍고 있으니 그들이 한마디 한다. "Camino Mama Says, Drink water" 아이고 친절하셔라 우리 마마님. ㅎㅎ
앗, 이 순간 아파트 담보대출 상환 문자가 날아온다. 젠장.
넓게 펼쳐진 평지 길이 나온다. 까미노 표지석이 보이는데 뒤에 한 아줌마(캘리포니아)가 익스큐즈미 한다. 고개를 돌리니 표지석 앞에서 사진을 찍어 달란다. 흔쾌히 찍어주고 나도 찍어달라 부탁했다. 그리고 몇 마디 더 나누는데 여기 카미노(순례길)는 이혼하거나 짤리거나 방학(은퇴) 때 오는 곳이란다. 하하. 나도 회사 관두고 왔다고 했다. 자기는 휴가 길게 내고 왔다면서.
오늘의 1차 목적지는 멜리데다. 이곳이 문어숙회(Pulpo)로 유명한 곳이다. 세 시간은 쉬지 않고 걸어야 도착할 수 있는 곳이다. 산티아고 오기 전 만난 권정우 대표는 꼭 멜리데의 문어숙회는 먹어야 한다면서 식당도 하나 추천해 주었다. 그 식당을 찾으려 많이 헤맸다. 결국은 포기하고 순례자들이 많이 들어간 식당으로 들어갔다. 사실 지치기도 해서 눈에 들어온 식당으로 그냥 들어간 것이다. 'Casa Alongos'
목이 말라 콜라, 맥주 그리고 생수를 시켰다. 왜 이리 많이 시키냐는 눈치다. 남이사. 그리고, 문어숙회와 여기만의 스페셜이라는 문어 버거를 시켰다. 와아~ 괜히 문어요리로 유명한 곳이 아니었다. 완전 부드러운 식감에 가끔 입안에 퍼지는 소금의 달콤 짭짜름한 맛은 지친 순례자의 심신을 어루만져 준다. 하나 더 먹고 싶어 이거 추가로 싸주실 수 있냐고 물으니 가능은 하나 이건 식으면 딱딱해서 맛 없어진다고 그렇게 하지 말란다. 양심적인 주인이다. 문어 버거도 그런 문어숙회를 다져서 패티처럼 얹은 것인데 그것 또한 별미로세. 입 제대로 호강했다.
다시 짐을 싸 오십 미터 정도 걸어 올라오는데 좌측에 권대표가 추천한 식당이 보인다. 고작 오십 미터를 못 참고 이 식당을 못 오게 되다니. 그래 우리 인생이 그렇지. 그래도 여길 몰랐을 땐 아까 그 식당이 나에겐 최고였어. 우리 인생도 수많은 선택의 순간에서 이렇게 생각하면 편하지 않아? 또 문어가 나를 가르쳐주네. ㅎㅎ
이제 2시간 40분 정도 더 걸으면 된다. 언덕을 오르니 내리막이 나온다. 뒤에서 열심히 걸어오는 청년이 보인다. 동양계다. 아까 그 문어 식당에서도 본 친구다. 익스큐즈미, 웨어 아유 프롬? 한국에서 왔단다. 정확히는 한국사람인데 폴란드 파견근무 중 휴가 왔단다. 국내 굴지 대기업 폴란드 주재원이다. 카미노 4일째 첨으로 한국분을 만났다. 자기도 한국분을 많이 만날 줄 알았는데 내가 처음이란다. 영어로만 떠들다가 우리나라 말 하니 편하다.
숙소도 함께 구하기로 했다. 드디어 리비도소를 지나 언덕을 오른다. 오늘 최종 목적지 아르수아에 도착했다.
오늘 밤은 이 친구와 제대로 파티를 즐겨야겠다. 주님 기다려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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